'자료실'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4.07.30 :: 재독한국여성모임 제 34차 총회와 봄세미나 열려 - 안차조
  2. 2014.07.28 :: 여성모임 단체여행 (한겨례 신문 기사)
  3. 2014.07.28 :: 2010년 재독한국여성모임 봄세미나에 다녀와서 - 류현옥
  4. 2014.07.28 :: 재독한국여성모임 2009년 봄세미나에 다녀와서 - 류현옥
  5. 2014.07.28 :: "재독한국여성모임 2008년 가을세미나에 다녀와서" - 이정회
  6. 2014.07.28 :: "재독한국여성모임 2007년 가을세미나에 다녀와서" -이정회
  7. 2012.05.30 :: Seminar 20-23.04.2012(풍경신문)
  8. 2012.05.30 :: Seminar 20-23.04.2012(교포신문)
  9. 2012.04.30 :: Seminar 20-23.04. 2012(베를린 리포트)
  10. 2009.11.13 :: 재독한국여성모임과 베를린일본여성이니시어티브의 공동세미나 참가기 - 류현옥
  11. 2008.10.10 :: 재독한국여성모임 30주년 생일잔치에 다녀와서 -류현옥
  12. 2008.05.31 :: 재독한국여성모임 30주년 행사(우리신문)
  13. 2008.05.31 :: 한국민주화 도우미’ 재독한국여성모임 30돌(한겨례) -한주연
  14. 2008.05.31 :: 재독여성모임 창립 30 주년 축전 참관기-이은희
  15. 2007.09.30 :: 여성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시아여성영화제>, 안숙영 박사, 2007
  16. 2006.12.01 :: 고국답사기 2006년 10월 23-30일
  17. 2006.10.31 :: 한겨례신문 기사(2006년 10월 31일)
  18. 2006.10.20 :: Lieblingsgeschichte -Sun-Ju Choi
  19. 2006.07.10 :: 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는 곳 -송현숙-
  20. 2006.07.09 :: 아량과 인성으로 우리의 능력을 연마하는 곳 -김현숙-
  21. 2006.07.08 :: 아기 걸음마에서 뚜벅뚜벅 걷기까지 -김양순-
  22. 2006.07.07 :: 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 -박인숙-
  23. 2006.07.06 :: 내 삶의 여정의 동반자 -유정숙-
  24. 2006.07.06 :: 세계인으로 고민하고 연대하는 단체 -김순임-
  25. 2006.07.06 :: 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 (송금희)
  26. 2006.07.05 :: 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27. 2006.07.05 ::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 (조국남)
  28. 2006.07.04 :: 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29. 2006.07.04 ::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
  30. 2006.07.03 :: 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자료실/- 언론 자료 2014.07.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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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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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14.07.28 18:05

험한 타국살이 버텨낸 한국인의 힘
 
76년 강제해고 송환 대응 위해 첫 조직 꾸려 노동탄압, 정신대문제 알리고 모금활동 펼쳐 회원 12면 인종차별, 향수담은 에세이집 펴내

"(1968) 경부고속도도를 놓을 당시 독일에 갖고,(도로를) 계속 놓기 위해 일했죠."
 
1970년 간호사로 취업하기 위해 독일에 간 박정숙(56)씨는 지금 치과의사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해 밤을 밝혀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린 박씨는 85년 치과의사가 됐다. 박씨처럼 72년 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송현숙(55)씨는 현지에서 미숙을 공부하고 지난 84년 전남대로 유학을 와 한국미숙사를 다시 익혔다. 간호사에서 화가로 변신하게 된 내력을 ㅅㅇㅆ는 "한국과 독일의 문화적 차이를 그림일기식으로 그리기 시작한 게 계기였고 고향 생ㅇ각을 달랠 수  있어 더욱 그림에 매달렸다"고 말한다.

박씨와 송씨처럼 지난 60-70년대 한국정부의 정책에 따라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들이 30년 만에 고향땅 한국에서 다시 뭉쳤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난주 열린 "재외동포엔지오대회" 에 참석을 해 독일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의 현실과 애환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친척을 만나기 위해 개별적으로 한국을 찾은 예는 많지만 이번처럼 10여명이 동시에 한국에서 모임을 여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들의 결속력은 이미 1978년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재독한국여성모임"을 꾸리면서 다져졌다. 76년 때 재독간호사들 가운데 강제로 해고당하고 한국으로 송환까지 되는 예가 늘자, 이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됐다. 힘겨운 싸움 끝에 독일 연방정부를 상대로 무기한 체류허가를 받아내면서 이들은 "조직의 힘"을 처음 깨달았다고 한다. 79년부터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지를 만들고 91년부터는 소식지(까치소리)를 펴내고 있다.

이들이 그간 펼친 활동은 눈부시다. 70-80년대 노동운동의 대표적 탄압 사례인 "와이에이치 사건(79년)과 " 원풍노조 투쟁"(82년)을 독일 사회에 알리고 성금을 모아 한국여성노동자들에게 전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풍물패를 조직해 한국전통문화를 독일에 에 전파하고 재독동포 2세를 위한 한국어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90년대 초반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연대해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후원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조국남, 안차조씨 등 12명의 회원은 지난 2003년, 30년에 이르는 독일 생활에서 느낀 인종차별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를 모아 기념 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모임에서는 이때 쓰여진 글에 창립회원 4명의 인터뷰를 묶어 지난 5월 단행본<집에(zuhause)> 를 독일 현지에서 독일어로 펴냈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현지 언어로 이런 책을 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안차조(61)씨의 글에는 당시 2만여명에 이르렀던 재독 파견간호사들의 응어리진 삶이 오롯이 녹아있다. "독일인들도 내가 거주하는 곳을 묻기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독일에서 살아도 나는 이방인이다."


(한겨례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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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14.07.28 17:27

지난 5월 4일부터 5월 6일 사이에 빌레펠트에서  „이슬람과 여성“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재독한국여성모임의 봄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과속화되어지고 있는 지구화현상은 이 곳 독일을 비롯한 다른 유럽공동체국가내에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인 충돌과 이해대립을 첨예화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대두되고 있는 종교적인 문제를 여성의 문제와 연결시켜 재조명하고자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이 세미나를 마련했다.
 
금요일 저녁시간에 상영된 우리학교라는 도큐멘타필름은 에다가와 조선학교에서 전개되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현황을 다루고 있었으며 이들의 민족교육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결성된 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과 전국교직원 참교육연구소 민족교육연구실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문제대책위원회와 국내 시민단체 및 국외 재외동포단체의 연대가 활성화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토요일에 상영된 세 인터뷰-„ Mein Kopftuch gehört dazu“, „Fünf Säule des Islams“,“Konstuierte Wirklichkeit“-는  봄세미나의 주제인 „이슬람과 여성“에 관해 좀 더 활발하게 토론을 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본격적인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이슬람과 여성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Esra Erdem 강사의 주제강연은 독일에서의 이민정책과 이슬람 그리고 여성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독일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회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열띤 토론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TIO에서 근무하고 있는 Esra Erdem의 박사논문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독일의 이민정책의 후진성, 특히 여성의 독립된 체류권신청의 어려움 그리고 강제결혼으로 인한 독일에서의 체류권 상실과 이에 대한 회복을 위한 법적 조건의 까다로움과 절차상의 복잡함은 2005년 이민법이 새롭게 개정이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고 부분적으로는 적용면에 있어서 더 외국인여성에게 불리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한 개선책을 위해 TIO는 다른 여러 여성단체와 연대하고 있으며 특히 이민여성에게 심각하게 대두되어지고 있는 가정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자 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주제토론 이후 회갑을 맞은 재독한국여성모임의 회원을 위한 잔치가 정성스럽게 마련되었으며 뒷풀이에서 보여준 회원들의 신명난 장구에 맞춘 노래와 춤은 파독되었던 그 때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 세대의 젊은 여성과 다른 단체에 소속된 여성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연대도  계획하고 있는 이 열린 모임에 더 많은 재독여성들의 동참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베를린에서 개최될 다음 가을 세미나 역시 좋은 주제선정과 준비로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본다. 

움직이는사고를 하는 그리고 이를 적시에 실천하는재독한국여성모임의 회원들이 참 아름답게 보였으며 이 자리를 빌어서 새로운 세대의 이주여성을 대신해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이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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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14.07.28 17:25

재독한국여성모임 2007년 가을세미나 

이정회 변호사 (베를린 거주)



재독한국여성모임에서 주최한 가을세미나가 2007년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 클라도우에서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열렸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출간된 한일 여성공동저서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를 소재로 지난 15년 동안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위안부 희생자의 보상 및 명예회복을 위해 오랜 연대활동을 해온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함께 마련한 세미나였다.
기존의 역사책이 그 당시의 여성의 역할과 역사상의 중요성을 도외시한 반면 여성의 관점에서 재조명된 한일 근현대사를 일본여성들과 함께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이 번 세미나는 더욱더 의미가 깊었다고 볼 수 있다. 다 수의 한국 사람들의 지나친 편견과 적대적인 일본에 대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페미니즘의 시점에 서서 이제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의 식민역사의 전 후에 나타난 한일여성의 위치와 역할의 유사함과 상이함 그리고 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특히 이 시대의 산 증인과도 같은 노령의 세미나 참석자들의 경험과 맞물려져 역사의 건조함을 벗어난 흥미롭고 진지한 살아있는 토론이 가능했다.
토요일 오전에는 Frau Juliane Boehm의 강연이 “식민시대에서(1910-1945)의 한국여성과 일본여성의 영향과 중요성”라는 소주제로 열렸다. 이를 통해 강연자는 1868년과 1919년 사이의 한일여성의 법적, 사회적 위치를 강조했으며 특히 역사상 잘 거론되어지지 않았던 일본 여성인권주의자  Frau Hiratsuka Raicho와 여성평화주의자 Frau Kaneko Fumiko의 재 조명을 통해 식민시대에 그들이 요구한 선진적인 여성인권의 핵심 내용을 발표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식민시대의 한일여성운동단체의 종류와 추구 내용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당시 강경했던 정치활동금지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여성운동단체가 존재했으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하고도 실질적인 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던 현 일본과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의 모태를 추적해 볼 수 있었다.   
연속해서 Frau Jung Hwa Han의 강연이 있었다. “문화 대 문명: 한국 근현대과정에 나타난 성별 질서”라는 소제목 하에 식민시대 이 후 성별에 따른 근현대화과정에 나타는 이중성과 불합리함을 지적했으며 식민시대 이 후 아직까지도 현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잔재하고 있는 성별 체제가 Gender관점에 따라 재조명야 되어야하고 이를 통한 새로운 성평등에 입각한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함을 강조 했다. 
오전에 발표된 강연 내용을 토대로 오후에는 참석자의 선택에 따라 소그룹토론이 한일 양쪽의 그룹리더와 함께 “식민시대의 여성의 학교교육”, “식민시대의 여성의 법적 지위” 그리고 “오전 강연에 관한 열린 토론”으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다. 세미나참석 소감을 쓰는 본인은 분과토론“식민 시대의 여성의 법적 지위”를 진행해야 헸기 때문에 다른 두 분과토론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과 토론 후 이에 대한 각 분과 별 보고와 연 이은 질문, 응답을 통해 다른 분과에도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토론이 종결된 뒤 “사랑”이라는 주제 하에 세미나에 참석한 한일여성들은 국경을 초월해 여성으로 사회 곳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상문제, 특히  뿌리깊이 내린 비민주적인 가부장제가 생산한 남성과 여성간의 지배, 종속의 권력구조를 즉석 연기를 통해 연출해냄으로써 많은 웃음과 더불어 이 세미나를 마쳤다. 2008년 일본여성회와 공동주관으로 개최될 봄 세미나에서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근현대사의 후반부가 다루어질 예정이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한일 근현대사에서 소외된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을 재구성하고 여성 인권의 의식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한 번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이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이 점차 폭넓게 공유되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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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12.05.3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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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20-23.042012 kyoposhinmun.pdf       


23 교포신문 <787 호 15 면>  2012 년 05 월 20 일


재독한국여성모임 제 34 회 총회와 봄 세미나 - 안차조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제 34 차 총회 및 봄 세미나가 2012 년 4 월 20 일에서 23 일까지 뮌헨

인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Erzabtei Sankt Ottilien)에서 열렸다. 

이 수도원은 1909 년부터 천주교 수도자들을 조선으로 파견하여 우리나라에 최초의 천주교

수도원을 건립한 본거지로 한국천주교의 역사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그로 부터 일 세기가 지난

오늘 재독한국여성모임이 그 곳에서 우리의 정신문화의 근본인 불교에 대한 세미나를 하게 된

것은 상당히 의미 깊은 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프로그램은 각 지역에서 참석한 회원들의 동정을 경청하고 세미나에 새로 참석한

손님들과 서로 사귀면서 시작 되었다. 시사 시간에는 지난 4 월 11 일에 있었던 한국 19 대 총선

결과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에 대한 발표가 있었고 제 19 대 총선 평가에서 야권의 자멸인가, 

새누리 당의 승리인가? 대한 회원들의 열띤 토론이 있었다. 

토요일 오전과 오후는 마인츠 대학에서 불교계율에 대한 연구문을 쓰고 있는 영공스님을

강사로 모시고 불교 주제의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교주 고오타마 석가모니가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것을 공부하는 한국스님, 즉 한국 불교의 역사 의 발자취와 오늘날의 불교

수행 방법 그리고 불교속의 여성상 등에 대한 함축성 있는 강연이었다. 


불교(Buddhismus)는 기원전 6 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붓다(석가모니)에 의해 시작된 종교로 깊은

명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 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오늘날까지 2,500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교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오랫동안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파된 불교에는 지역에 따라 많은 종파가 생겨 전체 를

아우르는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교는 일반적으로 개조(開裲)로서의 부처, 

가르침으로서의 법, 그리고 이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의 삼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 또는 1 차적인 목표는 깨달음(반야, 보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열반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며 불성을 깨치는 것과 동일하다. 

불교경전인(열반경)에는 이러한 견해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특별히 불교 공부를 하지 않았고 기독교 사회에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좀 낯설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들이 있었으나 발제 후 질의응답으로 풀어가는 시간을 가져 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인식하여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여성모임 창립에서부터 지금까지 해온 중요행사 중의 하나인 회원들의

회갑축하연이 있었다. 그동안 긴 세월을 조직 내에서 동지로, 친구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었던 회원들의 회갑잔치다. 잔칫상은 뮌헨지역 회원들의 성의가 흠뻑 담긴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앞으로도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면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비정부단체(NGO)로서 재독한국여성모임의 활동을 계속 함께 펼쳐나가자고 다짐하였다. 

노래 와 춤으로 만남의 기쁨을 같이한 잔치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 채 계속 되었다

일요일 오전 총회를 시작하기 전 세미나에 참석한 임혜지씨의 ‘4 대강사업과 토건 행정’대한

보고가 있었다. 임혜지씨는 보고에 들어가기전에 재독한국여성모임을 알게 된 경위부터

시작하였다. 서울의 주간신문인 ‘시민의 신문’에 개재된 여성모임회원들의 글을 읽으면서

(재독한국여성모임은 2002 년에서 2003 년 걸쳐 시민의 신문에 ‘파독간호사의 눈물’ 이란

제목으로 회원들의 자서전을 연재한 바 있다) 그리고 1980 년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

사실을 독일사회에 앞장서서 알리면서 투쟁하는 여성단체임에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임혜지씨는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독일에서는 경험을 통해 알려진 독일 최악의 토목사업으로

일컬어지는 라인-마인-도나우 운하를 모델로 한반도 대운하사업을 계획했다. 국민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무산 된지 4 개월 만에 정부는 강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사대강사업을

시작했다. 대학교수들, 종교 지도자들, 법조인들, 시민단체들과 해외교민들이 힘을 합쳐 정부를

규탄 고발 했다. 4 대강사업은 위법적인 졸속 공사며 홍수 재앙, 수질 악화, 농림업 피해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음 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하천공사의 역사가 깊은 독일에서

손꼽히는 하천전문가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현장을 조사한 후 4 대 강 뿐 아니라 그리로

흘러들어가는 샛강까지 허물어져 내리는 전국적인 환경재앙을 예견하는 법정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런 규모의 후유증을 막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고

지적하며 당장 공사를 중단하고 강을 예전으로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 4 대강사업은 완공에

다다랐고, 한국과 독일의 전문가들이 예견했던 갖가지 후유증들이 벌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에선 그 후유증을 또 다른 토목공사로 막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조국의 토건 행정을 막기 위해 활동하는 번역 팀은 그간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었고 여러모로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준 재독여성모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표명했다. 이어 열린 34 회

총회에서는 총무단보고서와 회계보고가 있은 후 현 총무단의 임기가 만료되고 후임 총무단을

선정하였다. 새 총무에는 조국남, 김영옥회원이 선출되었고 임기는 2 년이다. 

새 총무단에 대한 환영인사와 더불어 전임 총무단의 노고에 대한 많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여성모임을 장기간 이끌어간 안차조, 유정숙총무의 열정과 노력에 대한 

각별한 감사의박수는 더 웅장했다. 

2012 년 여성모임 사업계획에서 다가오는 가을의 정기세미나는 또 다시 베를린의 일본

여성이니시아티브와 공동으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베를린에서 날짜는 11 월 3 일부터

5 일까지 주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Atomkatastrophe in Fukushima)’를 선택하였다. 그동안

네차례 걸쳐 지속되었던 일본여성이니시아티브와의 공동 역사학습 세미나는 한일 근 현대사에

대한 한일여성의 유대관계를 깊게 해 주었다. 


재독한국여성모임과 일본여성들과의 연대활동의 시초를 더듬어 올라가면 1988 년 매춘관광을

테마로 세미나를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그 후 현재까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함께 해 나가고 있다. 또 하나의 공동사업으로는

지난 해에 일본 여성 이니시아티브와 함께 했던 베를린의 여성역사 기행인데 올해는 6 월

17 일에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외 2012 년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사업으로 현재 카셀에서 열리고

있는 ‘도쿠멘다’행사에 단체 견학을 가기로 했다. 


세미나에 대한 총평에서 강사 영공스님은 여성모임에 참석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당장

여성모임회원이 되고 싶다고 표명을 해서 모두 기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의 세미나를 통해 얻은 불교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의 핵심인 시간과

인연의 관리법에 대한 주제로 영공스님을 다시 모시기로 했다. 우리는 각 종교의 교리를

뛰어넘는 차원에서 카톨릭 수도원에서 불교계율 공부를 하신 영공스님의 불교에 대한 강의를

접하면서 깨달음에 한발을 들어놓은 느낌이었다. 


손님으로 참가하신 분들과 또 그 중에는 여성모임에 새 회원으로 가입하신 분들도 늦게나마

여성모임과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귀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여러 점에서 성공적인

세미나였다. 

교포신문 <787 호 1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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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08.05.3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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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08.05.3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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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언론 자료 2007.09.30 18:54

여성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시아여성영화제>
사단법인 황해도 한뜻계 보존회가 개막식에 축원굿으로
                                  

안숙영박사


재독한국여성모임이 주최한 <아시아여성영화제>(Asian Women’s Film Festival)가 지난 9월 23일 저녁 한국의 임순례 감독이 만든 „와이키키 브라더스“(Waikiki Brothers)의 상영을 끝으로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베를린 아시아태평양 주간“(Asien-Pazifik-Wochen Berlin) 행사의 하나로 지난 9월 19일부터 5일 동안 아르제날 극장(Kino Arsenal)에서 열린 이 영화제에는 많은 관객들이 찾아옴으로써, 유럽에서 아시아와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서울여성영화제가 협력하고 주독 한국대사관 문화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및 삼성전자 등이 후원한 이 행사에서는, 아시아 8개국의 여성감독들이 만든 다채로운 영화들이 소개되어, 여성의 관점에 서서 아시아 각국의 급속한 발전을 바라볼 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독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영화의 발전사를 보여주고자 마련된 „한국영화 회고전“에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만들어진 고전영화 5편이 상영되었다. 근대화과정에서의 여성의 삶 및 여성의 성을 소재로 한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자유부인“, „갯마을“, „지옥화“ 및 „김약국의 딸들“ 모두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당시에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당시의 한국여성의 삶을 21세기에 다시 돌아보면서, 여성의 삶의 조건이 이후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신에 담긴 비밀을 배경으로 젊은 두 여성의 사랑을 그린 개막영화 „거미 나리꽃“(대만 2007)을 비롯한 11편의 극영화에서 나타난, 가족, 젠더, 사랑, 노동, 세계화, 이주 및 전통 등에 대한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비판적 접근은 관객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갔다. 다문화적 사회의 복잡성에 촛점을 맞춘 „길게 째진 눈“(말레이지아 2004), 고독과 침묵속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성의 삶에 무게중심이 놓인 „침묵의 신부“(베트남 2005), 한 가족이 과거의 슬픈 가족사와 비판적으로 조우하는 과정을 그린 „샤라“(일본 2003), 결혼식 날 밤 남편이 사라지면서 한 여성이 자신안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한 „하룻밤 남편“(태국) 및 고독과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을 화면에 담아낸 „여름이 가기 전에“(한국 2006) 등은, 아시아라는 공간에서 현대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러나 다양하기 그지없는 여성들의 삶의 면면을 감동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한국, 일본 및 중국에서 온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오늘날 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잡한 사회적 현상들을 드러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디어 평양“(일본 2005)은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구조가 한 가족내의 성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어 관객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수천명의 가난한 농촌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기차로 여행하는 과정을 기록한 „희망의 철도“ (중국 2001)는 중국내에서의 새로운 이주현상을 잘 부각시켰으며, „쇼킹 패밀리“(한국 2006)의 경우는 가족안에서 망각되어 가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세 여성의 시선을 기록, 가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노가다“ (한국/일본 2005)는 한국과 일본의 건설현장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맞서 싸우는 일용직 노동자의 현실을 설득력있게 담아냈다. 이 영화를 만든 김미례 감독은 영화 상영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 영화가 현장 및 공원에서도 상영되어 이들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아시아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한 여성들의 생존 가이드“라는 주제로 9월 22일에는 심포지움이 열리기도 했다. 남성이 지배적인 영화현장에서 여성감독으로서 겪고 있는 어려움, 아시아에서 영화를 만드는 여성감독들간의 네트워크 및 아시아와 유럽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감독들간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필요성 등을 둘러싸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독일에서 여성과 노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온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이번 영화제 개최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간의 대화를 위한 새로운 장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여성문화라는 새로운 여성문화의 지평을 열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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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길에서 (2006년 10월 고국답사기)

김순임


10 월 23 일 화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늘부터 8 일 동안 함께 여행할 여성모임 회원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떠 올려본다. 정숙, 국남, 차조, 금희, 숙희, 영옥, 정자, 미자, 숙영... 약간 이상한 기분이다. 서울에서 만나게 되다니....
출근을 서두르는 벤지에게 “지하철역 독립문을 어떻게 가지?” 하고 물으니, “엄마 택시 타고 가 한다.” 방향감각이 별로 둔하지 않다고 자부 하는데 서울에 오면 언제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친척 중 한사람이 항상 가이드로 따라 나서든지 아니면 택시를 이용하고 만다.
“기사님 독립문에서 제일 가까운 출구에 내려주세요.” 하고 택시 기사 에게 약간 걱정서린 목소리로 부탁했더니 기사는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40 년의 타국생활이 나를 완전히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의 어설픈 이런 비한국적인 행동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다시한번 나에게로 돌리게 한다.
하아!!!............ 독일국기를 할랑할랑 흔들며 서있는 박정숙과 회원 몇사람이 눈에 띠었다. 기발한 아이디어! 독일기를 준비 해오다니. 도착하는 회원들마다 엉뚱한 정숙의 장난에 폭소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꼭 장난만은 아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커다란 독립비문이 서있는 작은 공원으로 가꾸어져있는 우리들의 출발장소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빈터인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들을 (정신대할머니) 위한 박물관을 세울 장소로 서울시에 신청중 이라는 곳이다.
이번 여행이 성사하도록 애써주신 정숙의 자매 흥순님 그리고 8 일 동안 우리의 길잡이가 되실 한운수 기사님 과 인사를 나누고 12 인승 버스에 올랐다. 날씨는 흐리고 가랑비까지 내리고 있다.
"어제 내린 폭우로 산길이 무너질 염려가 있어 백담사에서 절에 오르는 길 통행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의 첫 목적지인 백담사는 오늘 못가고 안동 하회마을에 갔다 다시 올라와서 백담사를 봅시다." 우리 가이드 정숙의 첫 안내말씀이다. 여기저기서 뭐 하러 다시 올라와 백담사는 이번에는 그만두지 하는 의견들이 나오고, 꼭 백담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 정숙은 달리는 차속에서 손전화로 다시 한 번 그곳에 확인 통화를 해본다.




가능하다면 방향을 백담사로 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곳의 안내말씀은 부정적이었다. 버스안은 첫 목적지부터 차질이 생기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아무도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고 이제는 고국도 이정도로 책임자들이 환경보호에 애쓰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가볍게 백담사를 포기하고 오늘은 영주 부석사, 도산서원 그리고 안동에서 저녘 식사후 하회마을에서 첫 여장을 풀기로 했다. (사진 버스 와 운전수) 먼저 경기도 남양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나숙희를 대리러갔다. 약속장소에서 숙희는 나주배를 한상자 안고 버스에 올라왔다. "와...나주 배 !"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 나주 배를 숙희 아버님이 직접 농사지으셨다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벌써 배를 깍아서 앞뒤로 돌리기 시작하고, 입속에서 사근사근 슬슬 녹아나는 그 배맛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수없는 감격스러운 맛이다. 80 고령의 숙희 부모님은 대부분의 배농사 농민들이 어린이 머리만큼 큰 개량종 배를 재배하는 것과는 달리 아직도 재래종을 최소한의 농약을 사용하며 재배 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차가 강원도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어린시절 수학여행 떠나는 차속에서 한껏 부풀었던 기분들로 차속이 어벌쩍 떠들썩 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분이 밝아지면서 여기저기서 활기찬 대화들 과 기분 좋은 웃음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금년은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서 단풍이 별로 아름답지 않아 아쉬울 것이라 하기도 하고, 산이 이렇게 많고 기후도 그리스와 비슷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올리브를 재배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왜 우리나라 아나운서들은 똑 같은 음성 과 똑 같은 억양으로 뉴스를 읽는지 듣기에 거북함을 넘어서 거부감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중에 누군가가 "이번 여행기는 누가 쓰나?" 한다. 자동적으로 한두사람 입에서 "조국남!" 한다 "나는 이번에는 안 쓴다". 국남의 단호한 목소리. "그럼 내가 쓸게." 나는 자신 없지만 글 쓸 일 있을 때 마다 국남에게 밀어부칠려는 여성모임의 고질(?)이 여기서도 발병하는 것 같아 얼른 받았다. 누구도 아무 부담 없이 이여행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솔직히 말 하자면 나 자신은 약간 부담스럽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스스로 짊어진 짐을.....




그러다가는 즐거운 여행은 즐기고 쓰는 일은 여행후 쓸수 있으면 쓰고 힘 드는 일이 된다면 그만두지 하고 결정하고 나니 내 마음도 가볍다.

고국의 아름다운 가을 산들이 가깝게 그리고 멀리 달리는 버스 유리창을 스치면서 사라지면 다시 다른 산 과 벌판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는 독일에서 두 아이들을 기르면서 하고 싶었던 일 두 가지를 실천 하지 못했다. 하나는 아이들의 초등학교 삼사학년을 시골 어느 학교에 보내고 싶었고 또 하나는 아이들이 칠팔학년 때 온 가족이 배낭을 메고 도보로, 버스로 그리고 기차로 조국강산을 다니면서 함께 문화역사 공부를 하고 싶었다. 산은 자꾸 오고 또 사라진다.
단체여행을 많이 운전하셨다는 기사님은 우리일행을 어떻게 분류해야할지 몰라서 그런지 버스가 강원도를 지나서 충북으로 들어갈 때까지 침묵 속에서 차를 몰지만 운전솜씨는 약간 거칠어서 우리가 바뿐길 아니니 위험한 추월은 삼가라는 경고를 하니 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많은 물음표를 안고 있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광고 와 선전물들이 즐비한데 그중에 '관광문화 전문도시 단양' 이라는 약간은 웃기는 허풍스러운 문구가 있는가 하면 '베트남 며느리 중매 합니다' 라는 우리를 슬프게하는 광고문도 있다. 외국인 노동자, 국제결혼 이주여성,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한국사회에 새로운 사회문제가 아슬아슬하게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도매체를 통하여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광고문이 차창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을 아리게하는 슬픔같은 것을 느낀다.

정숙 과 흥순님이 밤 새워 준비하였는지 달리는 차속에서 12 사람이 먹고 또 먹어도 김밥을 다 해 치울수 없다. 한국에서 가장 길다는 죽령재 터널을 지나 영주에 도착하여 소수서원 과 선비촌을 둘러본다. 선비촌의 주막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주ㅡ욱 마시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냥 다시 버스에 올라 부석사로 향한다. 고국 답사지만 전문 안내인 없이 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가 보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지자제 도입 이후 지역발전을 지역 스스로 해결해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역사성이 있는 것들은 단장을 시키고 해설문들을 곁 드려서 관광객을 모으기에 바뿌고 특산물들을 장려하여 상품화하기 위해 축제들을 많이 하는데 그중에는 무안의 마늘축제, 함평의 나비축제, 나주에는 배 축제, 또 상주서는 곶감 축제 등을 한다. 40 년 전에 노동 이주민으로 독일에 간 우리는 가는 곳마다 축제요 관광지마다 돈을 쏟으는 사람들로 붐비는 잘 살게 된 한국을 보는 것도 싫지는 않다.





부석사로 향하는 도로변의 사과밭에는 탐스럽게 익은 붉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나뭇가지들이 휘어지고 있다. 사과나무들은 자란지 몇 해 되지 않는 어린 나무 같아 보이는데 저렇게 많은 사과들을 달고 있으니 아마도 개량종인가보다. 차에서 뛰어내려 하나 뚝 따서 와삭 베어 먹고 싶은 욕심이 날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부석사에 도착한 우리 여행 첫날 오후는 바람이 엄청난 속도로 불어서 체중이 가벼운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바람에 날릴 것 같다. 얼마나 와 보고 싶었던 부석사 인가! 그런데 날씨가 태풍 과 시커먼 먹구름을 동반하고 이러니 은근이 화가 치민다. 의상대사가 절을 세울 때 바위가 공중에 뜨는 기현상이 일어나서 부석사라 부르게 되었다던데 그때도 돌이 날려갈 정도로 바람이 몰아쳤던 것은 아닐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다.
한국의 건축가들이 '가장 잘 지은 고건축' 으로 평가했다는 무량수전에 들어가 아미타 부처님께 3 배를 드리고 나와 무량수전 앞에 서서 유홍준씨가 대한민국 국보 0 호로 지정하고 싶다는 태백산맥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전경을 바라본다. 아~~~!!! 의상대사는 화엄세계를 장엄할 이 자리를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짚신을 바꾸어 신으셨을까!? 가슴이 뭉클해온다. 먹구름을 이고 있는 대기 때문에 유홍준씨의 부석사 예찬론에 나오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아쉽게도 접할수 없지만 그 예찬론이 허풍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고 신록의 5 월의 아침이나 가을의 석양에 펼쳐지는 전경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예술을 보는 눈이 없는 나에게 우뚝 서있는 당간지주 와 무량수전 앞의 석등이 오래 동안 내 마음에 새겨질 것 같았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부석사는 창건주인 의상대사에 대한 많은 설화를 안고 있다. 그 설화들은 시대 와 쓰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그중에 여성이 주인공인 설화 하나만 소개한다. 여성은 지구의 절반이 아니던가! 원효대사 와 요석공주, 황진이 와 서화담 그리고 의상대사 와 선묘 아가씨 등 역사는 청정도인들 주위에도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배를 타고 중국 유학을 떠난 의상이 도착 한 곳이 등주였다. 계속 먼 길을 가야할 의상은 그곳 어느집에서 하룻밤 쉬게 되는데 그집 딸이 그만 신라 진골 출신인 젊은 스님 의상에게 반해버렸다. 의상은 흔들림 없이 공부하러 떠나고 중국 아가씨 선묘는 세세생생 의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 한다. 종남산의 지엄 화상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선묘의 집에 들려 예전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배에 올랐다. 그때 집에 없었던 선묘가 돌아 왔을 때는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선묘는 한달음에 선창으로 달려가 배가 떠난 쪽을 향해 풍덩 바다 속으로 뛰어 들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의상의 배가 무사히 신라에 도착 하도록 보호할 수 있도록 빌었다 한다.



귀국한 의상국사는 화엄세계의 이미지를 장엄할 절터를 이곳에 정하고 신라 문무왕 16 년(676 년)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부근에 생활근거지를 두고 약탈행위를 하던 도적들이(혹자는 사교의 무리들 이라함) 불사를 방해함으로 선묘의 혼이 큰 바위가 되어 무리들의 위에 부웅 뜨니 그들이 놀래어 물러났다 한다. 그래서 부석사에는 선묘도를 모신 선묘각이 있고 일본에서는 선묘사라는 절 까지 세우고 선묘상을 만들어 오랫동안 신앙의 대상으로 모셨다한다. 부석사를 뒤로하고 꾸불꾸불 산길 과 굽이굽이 안동댐을 따라 도산서원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막무가네로 밀고 들어갔지만 안내원도 없고 대부분의 전시실은 불이 꺼저 있어서 그 야말로 휙 돌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 선생은 이조 연산군 7 년(1501 년)에 안동군 도산면에서 출생하여 34 세에 과거에 급제 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명종 16 년(1561 년)에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과 사상에 큰 맥을 이룬 분으로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사후 유림들의 노력으로 선조 7 년(1574 년)서원을 세웠으며 그때 선조는 한석봉 친필을 사액(서원이나 사찰의 현판을 임금이 하사함)하였다. 1970 년 정부가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도산서원을 성역화 하였다.(이상 인터냇에서 발췌).
저녘 7 시가 넘어 정숙의 언니 명숙님의 화실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 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셨을까? 언니는 자그마한 냄비에 우리를 위해서 햇밤을 다글다글 삶고 계셨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신다는데 크고 작은 그림들이 큰 화실을 꽉 체우고 있다.
우리는 독일에 오셔서 작품전을 하시라고 격려 하면서 언니가 ‘이웃집’이라는 식당에서 베풀어주신 청국장 과 고등어구이가 겯드린 저녁 식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웠다. 너무 너무 맛이 좋다. 저녁식사 후 숙영은 안동에 살고있는 동생과 함께 가고 우리는 하회마을 번남 민박에 도착하여 시계를보니 21:00 시다. 방에 들어가 배낭을 방구석에 쌓아두고 둘러보니 우리가 어려서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밥 먹고 공부하고 잠도 잣던 방 그대로다. 이제는 친척 방문을 해도 대부분 말끔한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정겨운 옛날 집에 들어오게 되니 모두 감격해서 “어머!!!....우리 옛집에 왔네!” 한다. 모두 씻고 아직도 기운이 팔팔한 이들은 동동주를 주문하고 피곤한 사람들은 자리에 누우려고 하는데 정숙의 막내 동생 부부가 딸 까지 앞세우고 인사차 왔다한다. 어두운 길을 이렇게 늦게 찾아오다니... 정숙의 형제들은 이렇게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살기 때문에 모두 잘 사는가 보다고 혼자 짐작한다. 


10 월 24 일

가을 아침 햇빛이 마당으로 쏟아지는 아침의 번남민박은 밤에 느꼈던 것보다 더 격렬한 향수를 일게 한다. 추수를 몇일 앞둔 만족스러운 그러나 약간은 분주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골 우리집 마당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부지런한 우리는 아침식사 전에 동네를 한번 돌아보고 앞마당에서 기공을 한다. 담을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들이 살랑 살랑 고개를 흔들면서 잘 왔어 잘 왔어 하는 것 같다. 시래기국 과 깔끔한 배추전 그리고 고등어구이를 올린 아침식사는 어떤 찬사도 필요없는 너무나 맛좋은 식사다. 이번에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안동 고등어구이가 유명하다는 것이다. 번남 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가 민박 주인께 물어보니 아주 간단한 대답이다. 옛날 이집안에 번남이라는 촌에서 시집온 분이 있었고 그분이 이집안 식구가 된후로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기로 그때부터는 이집이 번남(댁) 집이 되었다 한다. 마당의 장독대며 화단의 가을꽃들 그리고 마루에 쏟아지는 햇살들이 하루쯤 더 머물고 싶은 아주 깔끔하고 정겨운 곳이다. 어제 동생 따라 간 숙영에게서 몸이 불편하여 동생집에 있어야 겠다는 연락이 왔다. 빨리 회복하여 우리와 다시 합류하길 바라면서 배낭들을 챙긴다.
하회마을은 자동차 통행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님은 동구 밖에서 기다리시게 하고 우리는 도보로 마을을 한바퀴 돌고 마을을 안고 흐르고 있는 낙동강변으로 나간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답사객은 우리 뿐인것 같다. 맑은 강물 과 깨끗한 모래사장이 드높은 푸른 하늘을 이고 거기 있었다. 우리들의 얼굴도 모두 맑고 평화로워 보여서 맨발로 모래벌판을 거니는 모습들이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다. (낙동강 사진 영옥 정자 숙희) ......................




아쉽지만 고래등 같은 기와집, 주렁주렁 열린 박을 아슬아슬하게 이고있는 초가집, 바람 따라 금비를 내리고 있는 늙은 은행나무, 그리고 마을 주변의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 벼논등이 어울려서 소리 없는 전원 교향악을 연주 하고 있는 하회마을을 뒤로하고 10:30 분 병산서원에 도착하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유교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병산서원에는 전문 안내원이 있어서 만대루에 모여서서 그의 유창한 안내에 귀를 기우린다. 병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서애 유성룡 과 그의 셋째아들 유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봄 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향사를 지낸다. 유성룡은 1542 년하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25 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많은 벼슬을 지냈다. 그는 1592 년 임진왜란 때 탁월한 정치인의 안목으로 인재를 천거 등용(이순신, 권률)하고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선도하여 의용군을 모집하며 군량미를 준비 하는 등 조선을 전란에서 구했던 공신으로 조선의 5 대 명재상중에 속한다. 말년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하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한다. 이책은 임진란시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격었던 고통스러웠던 7 년 동안의 전쟁사를 기록한 기록문학으로써 국보 132 호로 지정되어있다. 유성용의 사후 유림들이 1610 년 그의 사당을 지은 후 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 되면서 사액을 받았다. 고종 5 년(1868 년)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문을 닫지 않고 선비들이 계속 공부를 했던 47 개 서원중의 하나였다고 안내원은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병산서원은 7 폭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우뚝우뚝 서있는 산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 과 백사장 을 전경으로 지어졌으며 소슬 대문으로는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선비나 양반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관광객들이 이문을 드나든다. 잘 보존되고 있는 만대루, 입교당, 위패를 모신 존덕사, 와 3000 권의 도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장경각등을 둘러보고 나와서 아랫사람(상놈)들이 사용했다는 지붕 과 문이 없는 달팽이모양의 화장실 통시를 보면서 우리는 웃는다. 양반 과 상놈은 출입문 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따로 썼던 시대를 상상해보니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눌려 살던 백성들에게도 유모는 있어서 지붕 없는 화장실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볼일을 보면 통쾌하고 시원하다고 해서 통시라고 했다한다.




맑은 아침공기 속에 안온하고 잘 정리 되었으면서도 자연의 일부처럼 서있는 병산서원을 뒤로하고 버스는 안동역으로 간다. 서울에서 있을 재외동포활동가 대회에(10 월 24~27 일) 참가할 차조 와 영옥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그들 과 헤어진 우리는 주왕산으로 향한다. 옛날 왕위를 빼앗긴 주왕이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는 이상한 전설이 있는 주왕산은 경북 청송과 영덕 사이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높은 산은 아니나 기암절벽 이며 폭포와  시원한 소가 곳곳에 있어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인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덩달아 산위에 까지 따라 올라갔다. 그사이 우리와 친근해진 기사님은 ‘여기서시오’ ‘저기서시오’ 하면서 우리더러 기념사진 찍으라고 재촉을 하는가하면 이상하게 우뚝서있는 바위를 가리키면서 저 바위를 ‘남자의 거시기 바위’ 라고 한다고 농담까지 하신다. 산에서 내려오니 목마르고 허기가 져서 모두들의 눈이 즐비하게 서있는 간이식당으로만 간다. 드디어 우리 전주가 ‘파전 좀 먹고 갈까요’ 하니 모두 기다렸던 것 처럼 우루루 한 주점으로 들어가 둘러앉아서 파전 과 도토리묵 에 온갖 과일을 둥둥 뛰우고 있는 동동주를 주문하여 단숨에 먹어 치운다. 더 먹고 싶지만 오늘저녁에 엄청 잘 먹을 것이니 그만 먹자고 우리 전주가(정숙) 말린다. 버스는 어느새 다시 동해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구불구불 돌아서 영덕에 도착하니 바닷가에는 온통 식당천지인데 식당마다 대게 선전문이 요란하다. 대게를 얼마나 대량생산을 하기에 대중식당의 메뉴가 되었을까. 아니면 한국의 생활수준이 대게쯤이야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높아진 것 일까. 나는 정말 한국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기사님은 저녁 식사 전에 풍력발전소 먼저 보자고 한다. 우리는 바람개비 풍력발전소야 독일에도 흔해빠졌는데 시끄러운 그곳에 일부러 갈 필요가 뭐 있겠는가 했지만 기사님은 한국의 풍력발전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원대로 우리는 바닷가 언덕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몇 개의 발전용 바람개비를 보러간다.

풍력 발전소 보다는 거센 바람타고 밀려오는 엄청난 파도 와 석양의 반사로 붉게 물든 바다위의 구름이 우리의 시선을 더 사로잡는다. 바람이 너무 세고 시장하기도 하여 우리는 빨리 어시장으로 내려온다. 기사님은 능숙하게 시장 안 어느 게 가게로 우리를 안내한다. 수많은 게들이 우글거리고 있고 상점주인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한국게, 러시아게, 중국게, 알라스카게 너도게 등 종류 도 많다. 그중에 너도게 라는 게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주인의 설명이 우리를 웃긴다. 알라스카게 와 사할린게를 배합해서 만들어 놓고 보니 너무 못생겨서 ‘너도 게냐?!’ 하고 한숨을 쉬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게를 먹을 만큼 주문하고 몇사람은 건어물을 산 후 위에 있는 식당에서 잠간 기다리니 삶은 게를 수북하게 식탁에 쌓아놓는다. 모두들 눈이 둥그래진다. 나는 우리가 너무 식탐을 하지 않나 싶다. 껍질이 두꺼워서 그렇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라고 흥순님이 우리를 안심 시킨다. 모두들 한손에 가위를 다른 손에는 게를 잡고 대게 오르기를 시작한다. 베를린에서는 Ka De We 같은 백화점에서나 엄청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대게를 이렇게 작은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있는 우리, 더구나 사치스런 대게를 먹는 곳 이지만 너무나 소박한 아니 초라하게 까지 보이는 식당 과 오가는 종업원들, 모든 것이 좀 어떨떨하다. 어제는 고등어구이 와 청국장 먹고 정겨운 번남댁 온돌 에서 자고 오늘은 대게 파티 후에 아모래 러브호텔 의 편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으니 어제 와 오늘 사이에 한국의 양면성을 우리는 실감한다. 어제 번남 댁에서 아침 식사를 즐기면서 나는 오래전 우리아이들 과 영국답사 시 즐겨 찾아 다녔던 호반의지역 유스호스텔을 생각했다. 영국의 사양귀족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경우 그 성을 박물관으로 만들거나 유스호스텔을 만들어 만인에게 공개를 하면서 그 성들을 유지 하고 있다. 남편은 아이들 과 나를 자주 그런 곳에 대리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영국의 문화역사를 터득하게 해 주었다. 번남 민박 역시 집의구조로 보아 옛 양반집인 것 같으나 생활을 위해서 후손들이 용감하게 민박으로 개방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해 본다. 고찰이나 폐사지를 찾아다니면서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배우면서 감탄하는 것만이 고국답사가 아니라 우리가 고국을 떠난 40 년 후의 변화한 한국 사회상을 보고 느끼는 것 역시 보람 있는 답사임을 알게 된다.




10 월 25 일

남성용 향수까지 비치한 러브호텔 아모래 에서는 미리 예약 하지 않고 들었기 때문에 아침식사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한다. 어제부터 구룡포 의 복국찬사를 하시던 기사님은 버스를 ‘함흥 복식당’ 앞에 세운다. 일부는 식당에 복국아침식사 하러 들어가고 일부는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바닷가를 산책한다. 어선들은 양옆에 즐비하게 등을 달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밤에 오징어잡이를 할 때 불 을 밝게 켜고 하면 오징어들이 때를 지어 몰려든다고 국남이 설명해 준다. 발밑에 보이는 바닷물은 참으로 맑아서 물고기 헤엄치는 모습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제법 잘 정돈된 상태의 선창가에는 여기저기 어망이나 어부들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널려있는데 한 곳에 허름한 작은 버스가 서있다. 버스에는 구직알선, 노인 휴식처 등의 문구들이 쓰여 있다. 국남 과 나는 동시에 어부들을 위한 Sozialamt 라고 짐작한다.(사진 버스) 철강 산업으로 한국의 경재발전에 앞장서느라 엄청난 굴뚝들이 세워진 포항으로 버스가 들어서니 산업도시 특유의 도시계획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널찍한 도로 와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고층 상가들 나는 대구를 방문했을 때처럼 내 고향 전라도와 비교해본다. 길이 넓고 고층건물이 즐비해야 만이 그 도시가 잘 발전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영남 출신 대통령들 치하에서 호남 과 영남 지방 의 차별적인 발전상은 삼척동자도 알아 볼 수 있으리라.



그동안 독일 촌사람들 끼리 만 보낼 수 없어 여기까지 우리를 동행했던 흥순님 과 포항 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우리는 계속 통도사로 달린다.

통도사는 송광사(승보) 그리고 해인사(법보) 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종찰 중의 하나로 대웅전에 불상이 아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불보사찰이다. 선덕여왕 15 년(646 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시 오대산에서 기도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받아와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금강계단에 그 사리를 모셨다한다. 한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에서 계를 받으며 그 스님들은 모든 진리를 회통하고 중생을 제도한다 하여 통도사라 이름 하였다고 안내서에 쓰여 있다. 또한 취서산(옛 산 이름)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 하셨던 영취산 과 비슷하다 하여 영취산 통도사로 불린다.

놀라운 일은 영남의 부산, 대구, 포항 등 도시에서만 부가 넘쳐흐르는 것이 아니라 영남의 절에서도 넘쳐나는 부를 느낄 수 있다. 사찰내에는 기도하는 신도, 관광객, 답사객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저기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구경도 한 후 공양간(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정갈스럽고 맛있는 절 음식 오랜만이다. 떡 까지 먹고 후원으로 나오니 부지런한 숙희는 배낭을 짊어지고 앉아서 이절 신도들 과 더불어 체소를 다듬고 있다. 맛있는 밥 얻어먹었으니 밥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부처님은 금강경을 설하시던 무렵 스라바스티에서 1000 명이 넘는 제자들 과 더불어 걸식을 하셨다. 물론 일생동안 걸식 하셨지만 나는 금강경을 통해서 이따금 부처님 과 제자들이 걸식하는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상상하곤 한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은 엄청난 민폐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수행하는 스님들께 보시하는 것을 복짓는 일이라 하며 부처님 당시에는 왕족 과 부자들은 다투어서 부처님 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드렸다. 물론 그때의 스님들은 부처님처럼 일일 일식 즉 하루 한 끼만 드셨다. 부처님 시절 탁발(걸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제자 아난 과 마하가섭에게 어떻게 탁발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난은 가난한 집은 나누어 줄 음식이 없을 것 같아 일곱 부자 집에(칠가식) 서 얻어오고 마하가섭은 가난한 자들이 빨리 복 많이 받고 부자 되라고 가난한 집에만 가서 얻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자 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말고 탁발하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때로부터 2500 년도 더 지난 오늘 우리는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절에 와서 걸식을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북적거리는 본사보다는 조용한 암자라도 하나 더 보고 싶어서 어떤분께 걸어서 갈 수 있는 암자를 하나 알려 주라 했더니 자장암으로 가라고 한다. 자장암 이라면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수도했던 도량이리라. 가까우리라 생각했던 자장암은 의외로 멀어서 90 분 이상을 걸었다. 상당히 지쳐서 암자에 도착하니 어떤 남자가 암자에서 나오면서 “오늘 금와(금개구리)보살이 나왔는데 여러분은 복있는 사람들이오” 한다. 우리는 그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자장암은 신라 진평왕때(587) 세워진 절이며 자장율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 한다. 관음전 뒷 바윗속에 작은 구멍이 뚤려 있는대 그곳에 금개구리가 살고 있으며 그 개구리를 자장율사가 길렀다는 전설이 있다. 금와보살은 항시 볼수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복이 있어서(그 남자 말) 그 신기한 개구리를 보았다. 금빛 찬란한 개구리가 아니라 눈 과 입 가장자리에 아주 가느다란 금빛선이 그어져있다. 신앙은 전설의 도움이 있으면 날개를 달고 확장된다. 그래서인지 자장암에서도 금개구리를 금와보살이라 부르며 금와보살을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자장암은 바위 위에 지어서 그랬던지 법당에 상당히 큰 바위가 바닥으로부터 돌출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날씨는 화창하지만 내려오는 길은 기사님께 부탁하여 차로 내려온다. 버스는 이제 경주로 향한다. 한글 과 더불어 한국문화의 자존심 경주, 보문 관광단지를 조성하여 경주의 고전미에 상처를 만든 경주,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한국의 보물들이 천년이 넘도록 숨쉬고 있는 경주에 오후 4 시경 도착한다. 여기 저기 이것 저것 볼것도 많겠지만 버스가 먼저 발견한 주차장에서 내리고 보니 분황사다. 어느사이 독일기는 기사님의 손에서 떠나질 않고 우리는 그기만 따라다니게 되었다. 분황사에는 무료 전문 안내인이 있다. 외세의 침략 방어를 기원하며 선덕여왕 16 년에 세워졌던 동양에서 가장 컷던 높이 225 척의 구층탑이 있었던 황룡사는 국찰 이었던 반면에 분황사는 여왕의 사찰 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