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

송금희(심리치료사, 보육교사)



 
한국은 내가 태어나 자라고 사춘기를 보낸 '모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30여 년 동안 독일 생활을 하면서 항상 향수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 있을 때면 여전히 불편해 하는 나를 느낀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살던 시절의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은 탓일까?

나는 팔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유교적인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난 우리 어머니는 나 역시 아들이길 바라셨다. 아들이길 바랬던 막내딸은 이번에는 '여성스럽게' 자라나 주길 바랬던 당신의 뜻과는 달리 수줍음을 모르는 사내아이 같았다. 위로 세 언니들이 있었기에 내 또래의 다른 여자 친구들 보다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자유로웠던 것은 사실이나, 그로 인해 더더욱 말괄량이 취급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공부하기를 아주 싫어했던 나는 예상대로 대학 입학시험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열등감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와도 툭 터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강요에 사춘기 열등감 중압
 
내가 가진 장점과 능력을 키워주기 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그것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남자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는 그 때까지 내가 느꼈지만 인정할 수 없었던 모든 열등감을 어느 정도 씻어주고 내 마음도 편하게 하여 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는 그 친구를 자주 아무도 모르게 만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휘영청 달이 밝은, 어지간히도 밝은 밤이었다. 논 사잇길을 함께 걷고 있을 때 그 친구가 느닷없이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친구를 밀쳐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냅다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가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으로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다시 얼른 뛰어 가서 "우리 또 한번 하자"고 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여자가 어떻게  ' 하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아무리 수줍음을 모르는 사내아이 같다 할지라도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 친구를 만나도 예전의 마음 편했던 상태가 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성 의식은 애써 무시해야 될 거추장스런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결혼하기도 전에 입을 맞추다니!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분명 "과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과거는 내가 갖고 있던 열등감을 더 부추기는 셈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훨훨 날아가 버렸으면! 군대라도 갈까?"

그러던 중 나에게 "훨훨 날아가 자유롭게 살" 기회가 왔다. 동생의 말괄량이 같은 성격을 항상 불안하게 생각하던 큰오빠는 "금희 독일가면 버려요"라며 반대했지만, "요즈음은 여자들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 되고 볼 수 있으면 많이 보아야 된다"고 생각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갈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안은 내가 독일에 가서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의식주와 동생들의 교육비는 해결할 수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내게 독일이라는 나라는 돈을 벌기 위한 신세계라기보다는 자유를 얻기 위한 신세계로 느껴졌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베를린에 도착하게 되었다. 독일 생활의 처음부터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된 한국 간호원 스물 세 명중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고향친구가 하나 있었다.
 
남자친구 첫 키스에 놀라 그만...
 
수억 만리 타향살이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척 위로가 되었다. 또한 병원 측의 배려로 우리 스물 세 명은 같은 층에서 살 수 있었다. 물론 병원 생활은 무척 고됐다. 문화의 차이로 인해 오해를 받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지만 누구나 외국에서는 애국자가 되듯이, 나도 한국이란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며 허리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는 밤마다 한국음식을 해먹고 독일 간호원들 흉도 실컷 보고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우리 민족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 중 노래가 빠질 수 있으랴. 한국에서의 말괄량이 시절이 헛되지 않은 기회였다. 내가 한국에 있을 당시에는 국악은 등한시하고 양악을 선호하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유행가 보다 김 세레나의 타령을 좋아했고 제법 부를 줄 알았다. 또 얼마간 국악원에 다닌 덕분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나는 기꺼이 고향의 춤과 노래를 그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내가 원하던 생활이던가! 정해진 틀에 나를 맞추면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으니.



<사진> 처음 독일에서 생활할 때엔 밤마다 한국 음식 해먹고 독일 간호원 흉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병원기숙사 부엌에서 저녁식사 뒤 동료들과 즐겁게 놀고 있는 장면.


68세대가 만든 보육원서 첫 교사생활
 
독일생활은 나에게 잘 맞았다. 그러나 병원 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나의 자유 분방한 기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보육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립 보육원에서 2년 6개월 간 근무한 후, 사립 보육원 교사로 채용되었다. 이 보육원은 1968년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자녀들을 비권위주의적이며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육시키고자 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립적으로 설립, 운영하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독일은 그들이 역사에 남긴 중대한 과오 때문에 배타적인 민족의 나라로 낙인 찍혀 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고, 여전히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독일인 중에는 그 과오 때문에 타민족에 대하여 무조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있다. 타민족에 대한 이 두 가지 태도는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이고 이 극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독일의 숙제이겠지만, 문제의 여부를 일단 떠나서, 이 보육원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외국인 선생 일부러 채용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학부모들이 나를 채용한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그들이 나를 채용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손해를 볼 것이란 기분이 들 정도로 나의 행동이 꾸밈없고 당당하였다는 것이며, 둘째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른 문화를 의식적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없고 자연히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도 없앨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다.

학부모들은 교대로 그날그날 아이들과 교사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했고, 교사가 아프거나 다른 도움이 필요할 때는 교사를 도와 근무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청소 역시 학부모들이 돌아가며 했고, 교사들은 아이들 돌보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열두 명 있었는데, 근무를 시작하고 보니 이곳 아이들은 시립 보육원 아이들과는 정말 차이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옷을 입힐 때 예쁘고 깨끗한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아이들이 활동하기에 편한가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육원에 올 때는 맘 편히 놀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 역시 아이들의 옷이 더러워 질까봐 아이들의 행동에 제약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또 입을 옷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아이들의 흥미나 요구를 인정해 주는 데 놀랐다.

아이들 중에는 다니엘이라는 네 살 짜리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누나가 있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다니엘도 따라하기를 좋아했다. 다니엘은 누나를 따라서 머리도 묶고 치마를 입고 보육원에 왔기 때문에, 난 한참 동안 다니엘을 '여자 아이'라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다니엘과는 또 다른 우스꽝스러운 경험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가다가 아이들이 소변을 보겠다하면 서슴없이 길옆에서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독일에서는 개라면 길옆에서 똥, 오줌을 실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런 사회에서 조그마한 동양인 교사가 독일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다니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옆에서 아이들을 소변보도록 도와주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한 명이 "오줌 마려워" 하면 모두 같이 따라서 마렵다고 하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다니엘이다.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서 소변을 보고 있는 희한한 광경을 옆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술 더 뜨는 격으로 여자아이로 보이는 아이가 치마를 위로 번쩍 치켜올리고 고추를 내어놓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무에다 오줌을 누고 있으니 그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애들과 즐거운 아수라장...
 
보육원의 개방적인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했고, 그것은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는 비결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근무하는 날이면 어느 땐 즐거운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에버라는 독일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나와는 반대였다. 성격이 조용할 뿐 아니라
차분하고, 독일식의 자립적이고 개인적인 교육방법이 투철하여 가끔은 이기주의적이고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세 살 짜리 아이가 나무로 만든 놀이무대 위에 올라갔는데 올라갈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갔다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 높아 무서워 내려오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에버는 "너 혼자 올라갔으니 혼자서 내려올 수 있다"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번쩍 안아서 내려주고 싶었지만, 그때는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어느 교육 방법이 내 것인지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가슴은 아팠지만 그냥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진> 보육원서 얼굴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개구쟁이들.


'나눔 문화' 모르는 그들과 씨름...

그 이후 차차 나도 나의 교육방식을 찾았다. 나는 공동체를 강조하여 아이들이 서로 돕도록 했으며,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어린 아이들은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형처럼 따르게 했다.

그러다 보니 개인주의적인 에버와 자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성격, 자라온 문화 등 모든 것이 달랐다. 뿐만 아니라 에버가 그 때까지 개인적으로 교제한 외국인은 내가 처음이고 보니 나를 이해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그가 사표를 내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에버가 보육원을 그만둔 후로 나는 나의 교육방식을 계속 고수해 나갈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은 자기만 먹는다. "네 것 좀 먹어 보자" 하기 전에 "내 것 좀 먹어 봐"라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도 아침식사로 싸 가지고 온 빵 등을 각자 자기 것만 먹었다.
 
공동체주의 가르치느라 생고생...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먹기 좋게 잘라 한 접시에 담아 중간에 놓고 먹고 싶은 데로 먹도록 하였다. 서로가 나누어 먹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탕 하나만 가져 와도 열두 개로 잘라야 하는 것이 생소하여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누어 먹음의 즐거움을 배운 아이들은 일부러 매일같이 나누어 먹을 것을 가져 왔다. 그런가 하면, 나누는 것이 싫어 혼자 몰래 먹다가 들킨 아이들도 있었다.

한번은 세 살 짜리 꼬마가 없어져서 모두 찾느라 난리가 났다. 큰 아이들은 밖에 나가 그 아이 이름을 부르며 보육원 주의를 찾아다녔고, 나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놀랐지만 나머지 어린 아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마음을 가다듬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의 심정을 일각이 여삼추라 하던가?

잠시 후 뜻밖에 교실 안에서, "금희! 토마스 여기 있어요!"라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뛰어 들어갔다. 토마스가 문 뒤에 숨어서 자기가 가지고 온 사탕을 혼자서 몰래 먹다가 들킨 것이다.
그는 놀란 토끼 같은 동그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마지막 입 속에 남은 사탕을 오도독 오도독 빨리 깨물어 눈을 꼭 감고 꿀꺽 삼켜 버렸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무렵 아이들은 이미 형제처럼 서로 도와가며 지내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왜 말도 없이 숨어서 우리를 걱정하게 만드느냐고 야단법석이었다.

토마스의 일은 나에게 소리 없는 항의로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문제 때문에 학부모들에게 직접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식사를 함께 시작하였으면 모두가 끝날 때까지 아무리 지루하여도 기다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나는 먼저 식사가 끝난 아이는 일어나서 다른 교실에 가 놀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루한데도 예의 때문에 궁둥이를 뒤틀며 앉아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보기가 너무나 안쓰러워서였다.

서양 사람의 생활양식 중 눈에 띄게 우리와 다른 것은 입식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의자와 침대 생활을 하는 이곳의 문화 때문에 신을 신고 방에 들어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 역시 구두를 신었다가 벗었다가 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방에 들고 날 때마다 신을 신고 벗는 것을 아주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신고 벗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 되어 있기 때문에 힘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안에 신을 신고 들어온다는 것이 용납되질 않는다. 나는 이곳에 삼십 년 이상을 살았어도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신발을 벗고 들어오도록 한다.

보육원에서도 나는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물론 보육원에 신발장이 있어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실내화로 갈아 신기도 하지만 이것은 위생상의 이유보다 편리함을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아이들은 갈아 신기 귀찮으니까 어느 때는 그냥 하루 종일 신을 신은 채이다.
 
주장하려면 남 얘기 받아들여야
 
또 학부형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갈 때는 구두를 신은 채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학부형 회의에 안건으로 제시했고,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래도 학부형들은 습관이 되지 않아 구두 발로 들어오다가 나에게 들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무안해서 얼른 벗거나 날아가는 흉내를 내며 빨리 뛰어 나간다.

아마도 내가 없을 때는 모두들 구두 발로 마음 편하게 드나들었으리라!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었을까? 나는 학부형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갈 때마다 신발 신고 들어 올까봐 걱정이 되어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것을 통제하느라 아이들의 아침 첫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부모들과의 아침인사도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이미 이국의 생활습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당장 실천에 옮기도록 요구하였던 것이다.

에버의 일과 그 밖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나는 나를 주장하려면 타인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받아들일 자세가 되지 않은 주장은 고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집이라는 이 악마 같은 강한 집념은 타인과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오해를 하게 하며,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말꼬리를 잡고 엉뚱한 소리만 하게 하고, 오히려 상대방이 날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을 느끼게 할 뿐임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사진> 77년 같은 반 (보육 전문학교) 학생과 어린이 탐험놀이터에서 실습하며.


잉꼬부부의 비결

보육원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갖춰야 할 기본의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사회는 보육원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 더 작게는 부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의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애 삶에 대한 권리이다. 그러한 권리를 나에게 일깨워 준 것은 내 첫 남편이었다.

우리는 1976에 결혼하였는데 슬프게도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결혼 생활 내내 그는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며 정신적 안내자(Initiator)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나를 옥죄고 있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고,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내가 누려야 할 행복을 가르쳐 주었다. 또 그런 차원에서, 내가 여성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하도록 후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5개월 후, 나는 지금의 남편 랄프를 만났다. 사회의 관습은 사랑하는 남편이 떠나면 적어도 몇 년을 혼자서 살던가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첫 남편이 가르쳐 준대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 스스로 인정하는 데는 거의 2년이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무렵 랄프와 나는 똑같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것을 아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친한 친구들 세 명뿐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절대 비밀이었다. 어쩌다 사람들에게 들킬 때면 학교 친구인데 공부하기 위해 만난다고 속였다. 그러나 랄프는 나를 사귄 즉시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개시키고 어디든지 꼭 나를 데리고 다니려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혼자 다니려 할 때는 참을성 있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해주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도 내가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다.
 
독일의 한 유머에 어떤 결혼한 여성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가 남편에게 들킬 상황에서 같이 있던 남자를 농 속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나를 농 속에 숨겼었던 시절” 이라며 농담을 하곤 같이 웃는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잉꼬 부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또 어떻게 18년 이상을 항상 처음 사귄 사람들처럼 정답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랄프는 나보다 훨씬 연하인데다 전에 결혼한 경험도 없으므로 우리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넘겨짚는 경우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아동심리치료사 공부를 할 때, 우리 반 독일 학생들은 우리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우리가 무시하는 것 뿐 이라며 우리 부부의 문제를 찾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나를 분석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그 동안 우리에게 질문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인간의 욕망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또 주고받는다는 것을 사회적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의무와 권리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누구 한 사람이 계속 베풀지도, 계속 받지도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랄프는 18년 이상을 나와 같이 살면서도 지금까지 한번도 내 잘못을 탓하거나 비난한 적이 없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스스로 화가 나서 펄펄 뛰는데 그럴 때마다 나를 꼬옥 안아주면서 “당신이 이런 잘못을 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이런 잘못을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금희가 아니거든” 하며 위로 해 준다. 그러면 가슴이 뿌듯해지고 사랑과 정이 온 몸을 감싸주는 듯 하다. 또, 나는 살이 좀 찐 데다가 나이 오십이 넘으니 자꾸만 올라오는 뱃살은 조금만 신경을 안 쓰고 있으면 쑤욱 앞으로 나와 꼭 임신부 같다. 이래서 살을 빼야겠다고 신경을 쓰면 “야! 당신이 살이 찌니 당신이 더 많아져서 나는 더 행복한데.” 하며 나를 웃긴다.

그는 나의 불편하고 아픈 마음의 상처를 말 한 마디로 어루만져주고 치료하여 준다. 어려서부터 사내아이 같다고 꾸중듣고, 공부 안 한다고 꾸중듣고, 집에 못 붙어 있는 다고 꾸중듣던 나를, 남편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잘하는 것을 칭찬해 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해서 도대체 내가 무엇이 좋으냐고 물으면, 내가 앞 서 남편자랑 한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야말로 항상 나의 장점만을 찾아 칭찬해 주고, 내가 어떤 잘못을 하건 사랑으로 위로하며, 조그마한 것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 하니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쩌다 우리가 다툼을 할 때는, 상대방이 어떤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가 아니고 서로가 의견의 차이가 날 때인데, 이럴 때에도 서로가 가능하면 자기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려 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주면서 끝을 맺는다.

 이것이 우리를 지금까지 사랑으로 지켜준 중요한 비결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서로 마음의 노력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사랑도 계속해서 영양 공급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영양 부족으로 병을 앓게 되기 때문이다.


"이젠 편안한 고향 나들이 기대"...

오늘 나는 그 옛날 내가 원하던 바대로 훨훨 날아와서 날개를 쭉 펴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런데도 휘영청 달 밝은 밤의 첫 입맞춤, 논에 노랗게 익어있던 벼, 그 사이로 난 논두렁 길이 그립다.

나는 자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부엌에 선 채로 전날 먹다 남은 찬 눌은밥을 솥에서 긁어 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며칠동안 밥 구경 못한 사람이라야 나처럼 먹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좀 미련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도대체 배가 고프지도 않으면서 밥과 김치를 먹어대는 건 왜일까?

나는 풍요한 이 나라에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불만이나 시간의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 밥과 김치를 먹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보육원에서 일하던 시절, 하루는 어느 학부모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는데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금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지요!" 하고 내 대신 합창을 했다.
 
아직도 김치·밥에 집착하는 나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만은 아니다. 나는 독일 음식을 별로 즐겨 먹지는 않지만 더러는 맛있게 먹는 음식도 있다. 포솔포솔하게 삶은 감자, 싱싱하고 향기로운 아스파라거스, 향초가 섞인 쿼크 등은 뒷맛이 깨끗하고 먹은 후 속도 편해서 즐겨 먹는다. 스파게티, 피자 같은 이태리 음식도 좋아한다.

어느 때는 이런 음식들이 먹고 싶어 시장에서 잔뜩 재료를 사들고 오지만, 짐을 풀기 전에 어느새 또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있다. 심지어 때로 위가 아파서 자극이 강한 음식은 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김치를 상상하면 위통을 잊고 저절로 밥을 하게 된다.

며칠 전에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둔 감자, 아스파라거스, 쿼크 등이 '언제나 먹어주나'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나는 또 밥을 해서 김치와 먹고 있다. 이번 김치에는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더니 맛도 훨씬 좋을 뿐 아니라 씹는 소리까지 '사각사각'들려 천하 일미다.

나의 김치 씹는 소리를 들으면서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어느 날 서양음식으로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바닥에 철퍼덕 앉아 찬밥은 솥 채로, 김치는 통 채로 정신없이 먹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남편 한마디. "당신이 밥과 김치를 먹는 것을 보면, 밥과 김치 자체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향 한 조각을 먹는 듯 해."

남편의 말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내가 좋아서 떠나온 고향이었지만 아이러닉하게도 나는 그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밥과 김치를 먹고 있는 내 모습에 그 그리움이 베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는 "내가 한국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내 삶은 불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만약'을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은 없겠지만, 나는 내 지난 시절을 열등감에 휩싸여 살았던 불행한 시절로 그늘에 가려두지 않고 내 인생 전체에 있어서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감히 그런 우를 범하려 한다.

만일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도 난 내가 태어난 가정 외에도 사회경험을 했을 것이다.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또 취직을 했을 수도 있겠다. 난 거기서 누구나 그렇듯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이고, 또 내게 영향을 줄 많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테고 나름대로 만족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물론 구체적인 갈등의 정도나 만족스런 상태에 이르는 과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본 바에 의하면, 나에게 그 정도의 믿음은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 열등감' 털어놓으니 시원
 
둘째는 이 글이 내게 '고해성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또 그 종교제도가 가진 맹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악용된 예도 모르지는 않지만, 고해성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을 덜기 위해 고안된 훌륭한 장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동안 내 안에 고향 생각과 더불어 존재하면서 고향을 불편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 했던 나의 젊은 시절 열등감을 고백한 것이다.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자유로워지듯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열등감을 인정하고 동시에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음 번 고향 나들이를 기대해 본다. 내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은 이제 나의 모국, 그리운 고향의 의미로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사진> 내 결혼식에서 보육원 아이들이 꽃과 쌀을 던지며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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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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