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는 곳

-송현숙-

나는 1972년 독일에 도착해서 아주 작은 도시의 한 병원에서 4년간 간호보조사로 근무했었다.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1977년 함부르크로 이사를 한 후, 학생기숙사에서 살게 되자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날이 점점 적어갔다.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며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다시 귀국을 했거나 아니면 다른 도시로 가서 자기 생활에 바빠 서로 간의 연락도 끊겼다.

 대학에서는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려고 하니 배워야할 것도 많고 독일어도 새로 익혀야 했다. 또 독일친구와 연애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한국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지 않아도 잘 생활해 나갈 줄 알았다.

 그런 후 1년이 지나서부터 무엇인가 나 자신이 한국과 아주 멀어진 것 같고 나의 정체성이 모두 상실된 듯 하고, 정신적 갈등 문화적 이질성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들면서 한국인이면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언어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서 유학 온 한국학생들과 몇 명은 알고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일류대학을 나온 남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이질감이 들고 주눅만 몹시 들었던 것 같다. 마음의 문도 꽉 막혀버리기만 했다.

 이러한 나의 암흑기에 어떻게 소문을 통해 지금 남편인 Jochen하고 Berlin에 가는 기회에 독일 목사님 한 분을 찾아 뵙게 되었다. 그 분께서 한국인들이 활동하는 단체를 많이 알고 있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었던 것 같다. 그 분께서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연락처를 주어서 전화하고 집으로 찾아가 그 회원을 만났었다. 그 분도 간호사로 일하고 난 후 공부하고 있었고 한국인 남편도 광부로 왔다가 공부하고 있었다. 그 회원이(지금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 1978년 재독한국여성모임 창립세미나가 프랑크푸르트에 있으니 참석해 보라고 해서 침낭을 들고 가슴 설레며 기차를 타고 혼자서 출발했었다. 처음 참석했는데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고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분위기를 체험했었다. 어쩌면 꼭 초등학교 입학할 때의 그 순수한 마음, 서로가 서로를 긍정적인 호기심으로, 말없는 동질감,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하는 등, 나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서로 돕는 여성모임이란 말이 그 때 모인 여성들 몸에서 울려 퍼져 나온 듯한 실감을 했다. 창립세미나 때, 한 교회에서 그냥 무엇을 깔고 바닥에서 여럿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잤지만 참 다정다감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또 더 기뻤던 순간은 함부르크 지역에서 참석한 약 5-6명의 여성들을 만난 일이었다. 너무너무 반가웠다. 그 이후 한 동안 함부르크 지역에서도 매달 만나서 공부도 하고 친목도 돋우었고, 대표모임, 봄 세미나, 가을 총회도 열심히 참석했다. 그 때 참석했던 회원들은 지금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다. 나는 재독한국여성모임을 통해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자극을 받으며 배웠고, 그림을 그리며 내 정체성을 찾는데도 내용적으로 좋은 영양을 받았다. 좋은 책을 서로 빌려주며 용기를 주고, 대표모임에서 만날 때는 밤을 새우며 많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재충전을 했었고, 나는 한국에 11년 동안 못 가서 향수병에 시달릴 때는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여러 세미나를 통해서 또 다른 회원들이 먼저 경험한 것을 들으며 이중 언어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나는 간호보조원으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생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참 예민했었다. 그러나 간호원, 간호보조원, 유학생들 간에 서로 신분에 대한 차별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때 참석한 회원들 모두가 대단하고 활동성 있고 사회의식과 역사의식도 높았고 새로운 눈을 뜨려고 하는 새 회원들도 참 많아 보였다. 나도 그 당시 독일의 68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사회, 정치, 역사에 대해서 새롭게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기에 더 큰 관심이 생겼고 회원들에게 신뢰와 우정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였었다. 나는 그 때부터 재독한국여성모임의 회원 중에서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어떤 회원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살거나 한국에서 살거나 친구가 된 회원은 가끔 만나도 정말 허물없는 우정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 같다. 그 이외에도 할 말이 참 많은데 글로 표현을 잘 못하겠다. 이번 25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구 여성모임한테도 초청장을 보내어 우리들 자신들을 위해 잔치를 하게 되어 더욱 뜻 있는 행사가 될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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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량과 인성으로 우리의 능력을 연마하는 곳 



-김현숙- 

 

여성모임과 나와의 첫 만남은 아마도 1977년 Frankfurt의 한 회원 집에서였다. 여성모임이 발족되기 이전이었고 독일의 아시아 간호사추방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모였었다. 만 명의 서명을 모으기 위한 서명서를 작성하고 일을 분담하고 또한 이 사실을 각 도시마다 한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독일 정부와 정치 그리고 외국인법을 문제화시키며 외국인 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활동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의 사고방식과 지식 그리고 도덕관념으로는 정치, 경제 또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남자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활동에 동참함을 계기로 나의 삶과 생활에 변화가 왔고 그리고 그  변화는 한 발자국 앞으로의 전진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나의 어려운 시절에 삶의 긍지를 찾을 수 있는 동기이기도 했다. 


 여러 분야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있었고 그에 따른 에피소드나 체험도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내가 여성모임회원들과 더욱 가까워진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한솥밥 며칠만 같이 먹어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라고 흔히 말한다. 1986년 “한국의 문화를 알자” 라는 세미나가 있은 후, 뮌헨에서 사물놀이 수련회를 하게 되었다. 뮌헨의 이월선 회원은 숙소를 제공하고, 강원혜 회원이 악기를 여성회에 기증하고, 한국에서 김영동씨를 초대했다. 낯 설은 장단을 입으로 외워가며, 꽹과리 대신 냄비 뚜껑을 두드려 가며, 무릎은 장구장단을 맞추며 열심히 배웠다. 모두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이 우리 고전에 감각이 없다는 야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이야기를, 밥도 열심히 먹고, 웃는 것까지도 열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고 더욱 더 가까워지는 시간들을 가졌었다.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동지애와 형제애를 얻게 되었다. 


 또 한가지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은, 베를린에서 있었던 50주년 해방기념행사이었다. 여성모임과 정신대후원조직들이 주최한 이 행사에는 소련, 네덜란드, 중국, 북한, 한국 그리고 일본에 살고 있는 정신대와 관련되었던 여러 나라의 여성들을 초대를 했었다. 소련과 중국에서는 정치상황 때문에 아마 참석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행사에 참석하셨던 고령의 여성들은 그 시대의 역사와 정치의 재물이 되어 당했던 만행들을 하나하나 폭로하시면서 분노를 하셨다. 아픔과 눈물을 삼키시는 모습은 나에게 한 인간이 한 시대의 역사와 정치에 재물이 되는 이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바로 나와 여성모임과의 관계에서 의식화작업을 시작하는 동기이기도 했다. 


 여성모임과 나는 세월이 흘러가듯 함께 어우러져 흘러왔다. 여성모임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이었다고 보며 특히 각 지역마다 한번씩 대표모임을 가졌던 것은 여성회를 더욱 단합시켰었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이었다. 앞으로도 노년기의 인생을 더욱더 단합과 웃음으로 서로 서로가 아량과 인성으로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반평생 다져온 능력을 잃지 않는 노력이 있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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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걸음마에서 뚜벅뚜벅 걷기까지

-김양순-

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왔다가 브라질에 이민 가서 가족을 이루었고, 그곳에 살면서 그곳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그 국민성이 나에게 잘 맞아 내 것으로 알고 살다가, 하던 사업이 안 되는 바람에 결국 14년의 브라질 생활을 뒤로하고 독일로 다시 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독일생활에 다시 적응하기가 너무나 어려웠고, 특히 몸도 마음도 독일에서의 생활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이제야 어느 정도 자리도 잡히고 적응도 되어 내 삶에 대한 회고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브라질에서 돌아온 후 그게 1988년이었다. 당시 여성모임 이숙자 회원의 권유로 그 당시 뮌헨의 김현숙 회원 집에서 열린 여성모임 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하게된 나의 동기는 단지 상당히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고 사실 재독한국여성모임이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도 몰랐다. 그 날 청바지 차림의 유정숙 회원이 밤이 늦도록 지치지도 않고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면서 열렬히 말을 하는 것이 나에겐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 당시 한국말도 그리고 또한 독일말도 잘 구사를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열정에 감탄을 하였다고 할까? 그러면서 여성모임에 회원으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내가 여성모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렇게 느낄 수가 없었다. 회원들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회의 때 내가 말을 할 차례도 안 왔고 내 자신 스스로 입도 안 떨어지고 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 이상한 것은 여성모임의 회원들이 나에게는 뭔가를 비추어주는 느낌이었고 또한 나에게 인간적인 따뜻한 느낌도 주었다. 그러다 보니 꾸준히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여성모임의 회원으로서의 시작인 것 같다. 여성모임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입을 열게 되면서 말을 할 수도 있게 되고, 독일에 다시 와서 나의 한국, 브라질 그리고 독일에서의 삶, 그러니까 이 세 나라 속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여성모임에서 한국말도 다시 배우게 되었고 그 당시 내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심정이었는데 나를 북돋아 주어 이제는 성장하여 떳떳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기걸음마를 하다가 이제는 뚜벅뚜벅 걷는 것 같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이제는 내가 회원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고 이제야 활동을 시작한다고 느끼면서 보람도 느낀다. 현재 여성모임에는 남을 사람들만 남은 것 같고 그래서 여성모임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돌아보면, 여성모임은 새로운 회원이 들어와 쉽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고 본다. 씩씩하고 똑똑한 여성들이 많다보니 회원들 사이에 갈등도 많았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서로 부딪히는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사실 나에게는 어려웠다. 그것을 지금까지 내가 견디어온 것을 보면 나도 인내심이 있었던 것 같고 또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서로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오히려 에너지가 더욱 더 생길텐데 그렇지 않게 되었던 것이 아쉬울 때가 많았다.

 소수민족으로서 우리가 여기서 어렵게 살고 있는 부분을 회원들끼리 인간적인 정을 나누며 더 두터워 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과제로 본다.

여성모임에서 독일어연수프로그램을 만들어 자녀들과 함께 자녀들은 한국어를 배우면서 몇 주일 간 공동생활을 한 것은 나에게 아주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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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 


-박인숙-


나는 독일에 와서 약 10년 간 한국인과의 접촉이 없이 살았었다. 우연히 클라우젠호프에서 한-독 가정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여성모임회원이었던 장혜숙을 사귀게 되었다. 나는 에센에 살고 장혜숙은 보쿰에 살다보니, 자녀들과 남편들도 서로 사귀게 되었다. 여성모임에 나와 보라는 권유를 받고 여성모임에 나가보니 힘센 여성들이 많았다. 그 동안에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리고 또한 독일어도 뭐 그렇게 능통한 상태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주눅이 들었다. 김양순 회원 비슷하게 삶이 뭔가 뒤죽박죽 되는 느낌이었는데, 세미나 참가이후 집에 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나 자신이 어떻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모임회원들이 능력이 많으니 내가 큰 일은 못해도 그냥 그 자리에 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하는 생각 속에 여성모임의 회원으로 머물러 있게 되었고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이제까지 참석을 하고 있다. 


 회원으로서 같이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눈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것들을 '눈치'로 파악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요즈음 여성모임의 회원으로서의 나의 위치와 자세를 발견한 것은 나의 위치가 여기서 중요하게 되었고 또한 나의 자세도 능동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한국에서의 성장과정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의 지위에 따라 그 사람이 훌륭하냐 아니니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온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왔었고,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생각할 때 간호사나 은행직원, 상업학교를 다니는 여성들은 가정에서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 직업을 택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지방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는 그런 식의 사고를 하였는데, 독일에 와서 직접 간호사로 종사하는 여성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 자신도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배운 사고방식 때문에 뭔가 높은 그리고 낮은 지위가 어떤 직업을 가지는가에 따라 인간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독가정을 꾸려가고 있는데 남편은 나의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다. 오히려 내가 우울증이 생겨 나를 닫아버리려고 하면 남편이 적극적으로 그러지 말라고 나를 후원해 준다. 그런 것들이 나를 흐뭇하게 해준다. 또한 여성모임의 장이 다른 회원들도 나와 비슷한 문제가 있어 나를 이해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고 그에 대한 신뢰감도 준다. 


 여성모임의 미래가 회원들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에 달려 존망이 결정된다고 나는 보지 않고 그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제는 나이와 관련하여 우리들의 건강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탈퇴한 회원들이 그 전까지도 여성모임이 '친정' 이라고 말을 해 놓고도 탈퇴를 하는 것을 나는 비겁하다고 본다. 


 나도 간혹 여성모임에 나가는 것이 나에게 부정적으로 비추어 질 때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단체를 안보고 개인을 보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를 또한 극복하는 과정도 나에게 있었다. 


 내가 여성모임에 들어와서 재미있었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우리가 갱년기란 주제로 세미나를 준비할 때 회원이었던 전미자씨와 함께 책임을 맡은 적이 있었다. 회원이었던 김용주씨가 자료를 찾아오고 전미자, 신정남 회원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준비할 때였다. 


 안차조 회원의 딸과 아들이 엄마가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엄마가 여성모임의 회원인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면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것, 예를 들면 아이들이 어릴 때 한국말을 안 하려고 할 때 여성모임세미나를 통하여 배운 교육방법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접촉하게 된 것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나와 자녀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한마디로 나의 자녀들이, 내가 한국 엄마라는 것, 그래서 우리 집에 오는 한국 손님들이 한국말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두 딸은 두 문화권의 자녀들인데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는 것에 신경을 안 썼다. 나의 교육철학은, '아이들이 잘 놀고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 이었다. 내 딸들이 12, 13 살이었을 때, 클라우젠호프에서 있었던 우리 회원 송금희씨가 이끈 청소년모임 세미나에 참석하고 나서 내가 고추장을 사오면 이게 진짜 고추장인가 하고 물어보게 된 것, 아이들이 소풍갈 때 김밥을 싸달라고 하는 것, 첫 딸이 아비투어가 끝나고 구 회원 장혜숙씨 집에 갔다와서, '왜 나한테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첫 딸이 법학공부가 끝나고 실습시기에 한국에 가서 법률실습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한국과의 관계가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것에 대해 

기쁘다. 한국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것이 당연지사로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여성모임이 어떻게 꾸려져 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기대는, 회원들이 서로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이다. 자기를 먼저 주장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의견을 먼저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여성모임 내에서 진담이든 농담이든 서로 마음 터놓고 한 말들은 그것으로 끝나야지 그와 상관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하는 식의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여성모임은 이제까지 많이, 그리고 다방면으로 사회적인 일을 하였다. 앞으로는 여성모임이 여성모임이라는 특성 하에 예를 들면 이번에 시작한 '여성의 상담전화 설치'등과 관련된 일을 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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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여정의 동반자

-유정숙-

이제 나의 독일 삶이 19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중에서 약 16년 간 나는 여성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셈이다. 만약에 재독한국여성모임이 이 독일 땅에 없었다면 여기서의 나의 삶이 어떠하였을까? 하고 언젠가 나는 질문을 해보았다. 그런데 상상을 해 보려고 한참 이리 저리 회고를 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상상이 안돼 이 질문을 잊기로 하였다. 결국 나의 삶에서 여성모임이 그 만큼 이미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삶의 여정을 동반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현재 나는 우리 여성모임의 총무직을 맡고 있다. 그러니까 1989년에도 한 번 이 직을 맡았으니 두 번째로 다시 맡은 셈이다. 그 당시의 여성모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변하여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책임 있는 일을 두 번씩이나 맡아서 할까? 하고 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여보게 된다. 왜냐하면 여성모임의 발전과정이 그렇게 평탄치만 않았기 때문이다. 골머리를 앓을 때도 많았고 가슴이 아플 때도 많았고 상처받은 느낌을 가진 적도 있었고 그러나 기쁠 때 그리고 뿌듯할 때도 또한 많았다.

 내 기억에 그 동안 딱 한번 여성모임에서 나와 버릴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90년대 중반 이후인 것 같다. 회원들 사이에서 여성모임의 정체성, 그와 관련하여 회원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각자들의 의견의 차이가 그 당시의 갈등내용이었던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이제까지 지속된 여성모임을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이 갈등내용이 내포하고 있는 자연적 성격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성모임이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주변조건으로서의 정치상황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그것이 여성모임의 각 회원들의 일하는 방법과 내용에 대한 의견의 차이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여성모임 초창기서부터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는 특히 김 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는 어떻든 모든 회원이 반 독재투쟁을 같이 해 왔다. 김 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그러면 여성모임은 이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는 비정부조직(NGO)인가? 하는 질문이 던져 졌을 때, 여기에서 각 회원들의 의견의 차이가 점점 더 선명해지게 되었던 것 같다.

 나의 여성모임탈퇴에 대한 나 스스로의 질문은 머릿속에서 정리를 하고 이 질문을 던져 버렸으나, 약 몇 년간은 여성모임이 진행되는 상황에 내가 간격을 두고 지낸 적이 있다.     

 초기에서부터 현재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독일에 와서 약 일년 있다가 재독한국여성모임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도 그 당시에 그렇게 마땅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여성단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회원이 되었을 때는 이미 여성모임이 10년간 성장이 되어 그 구조나 일하는 방법, 그리고 회원의 수가 이미 자리를 구축하고 있는 상태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 회원으로서 여러 회원들의 눈치도 보면서 나의 자리를 잡으려고 수년 간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일의 내용들이 나의 가치관과 연결하여 볼 때 나에게 기쁨도 주고 뿌듯한 느낌도 주었기 때문에, 조직의 운영문제나 골치 아픈 인간관계의 문제도 있었으나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부담을 주지 않은 것 같다. 새 회원이 가지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오랫동안 회원으로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 당시 여성모임이 처해있던 상황 때문에 89년에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하였고 그러면서 여성모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좀 더 알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여성모임은 나의 삶을 점점 더 많이 동반해 가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2년간의 총무직을 끝냈을 때 아주 잠깐 동안은 마음이 상당히 허전하였다. 그 이후 서기직도 맡아 열심히 보고서를 쓰고 하는 재미도 있었다. 덕분에 한글을 컴퓨터로 치는데 도사가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회의하는 것을 녹음하여 집에 와서는 목욕을 하면서 그 걸 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정확한 보고서를 쓰기도 하였다.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남아 있는 느낌은 그 일을 하는 동안 기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여성모임 회원들이 있는 지역으로 대표모임이나 소모임의 일로 부산하게 돌아다니면서 어떤 때는 정신이 다 빠져 버릴 것 같은데도 미친 듯이 그러나 또한 기쁨을 가지고 돌아다녔다. “왜 이러는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에 대해서는 답이 명확하게 나온다. 그 시간동안 인간적으로 정을 나눌 수 있는 많은 여성모임회원들이 친구가 되고 언니로서 인생의 반려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디서 이런 친구와 언니를 사귈 수 있을까!!! 금상첨화라고 이 회원들과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가치관을 일을 통해 대화를 통해 서로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약 이년 전부터 다시 총무직을 맡았다. 내 생각에 책임이 무겁기는 하지만 기꺼이 맡았던 것 같다. 이제 25년이 되어 가는 여성모임은 제반 주위환경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르고, 회원들도 25년의 나이를 더 먹었으니 모임의 구조나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와야만 하는 시기가 되었다. 이 구조를 개혁하여 그 틀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 현재 여성모임의 과제인데 나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앞으로의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내어 쉬질 않고 여성모임 일하려고 그 아까운 휴가를 내어도 아깝지가 않은 것이 나의 마음이니 이것이 나와 여성모임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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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으로 고민하고 연대하는 단체

-김순임-

1980년 5월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접하게 된 광주 5월 항쟁의 무참한 소식은 그 때까지 안일무사주의로 살아온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체험하게 했다. 광주에서 어린 중 고등학생들이 두루미에 꾀인 조기들처럼 묶여서 군인들의 총칼위협을 받으며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평화로운 독일 안방에 앉아서 TV를 시청하는 나는 분노와 절망의 참담한 감정의 회오리를 정리하기 어려웠다. 나는 나와 가정, 나와 사회, 나와 조국, 나와 세계는 어떠한 연관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렇게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내 감정이 내동댕이 쳐버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까지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나는 빨갱이와 간첩들이 우글거린다는 베를린에서 의식적으로 교포사회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8개월 된 딸을 업고 남편과 함께 FU(베를린 자유대학)교정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서명을 받거나 미국정부에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는 교포나 독일인들이 있음을 알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얼마 후 내 친정이 있는 광주에서 그리고 내 조국에서 그런 살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충격을 받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 전에도 보도망을 통해서 많은 처참한 종족분쟁들을 접하면서 그토록 나를 움직이는 감정의 물결은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한 순간이었지만 나에게 가정과 사회, 그리고 인류 사이에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고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귀중한 체험이기도 했다. 그 체험은 안일무사주의와 반공의 옷을 벗어버리게 하였고 여성모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 같다.

 이따금은 여성모임 세미나의 주제들이 약간은 황당한 것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배우면서 서로 도우며 운영해 나가는 여성모임의 운영방침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민주적인 토론방법과 결정을 존중하는 여성모임 사업계획과 실천방법은 토론과정이 너무 길어서 실천할 수 없는 예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일부회원들에게는 어느 때는 가슴이 답답해오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 같다.

 사업내용은 주로 조국의 정치사회 문제를 독일과 국제무대에 여론화하여 국제연대를 발원하는 것이어서 여성모임이 갖고 있는 특유의 역동성과 견제력이 적당히 절충되어 잘 진행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주민여성단체로서 우리는 너무 조국애와 향수로 우리의 사업을 일관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1980년 광주항쟁이 광주에서 터졌기 때문에 그렇게 내가 충격 받았다고 판단했던 순간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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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믿음이 긷든 우리들의 집     

-안차조-

여성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66년 10월 Niedersachsen Verden의 시립병원에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과 인연을 맺어 베를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 둘을 낳았다. 병원 근무와 집안 일로 보낸 나의 첫 독일생활은 나의 삶에 대하여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나의 위치에 대한 의식 없이 살았었다. 아이들 아빠와 헤어지던 해인 1980년. 나의 끝없는 괴로움을 풀고 싶은, 한국말로 나의 아픔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한없이 헤매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함께 베를린에 있는 한국여성모임에 참석했다. 그 당시 여성모임에서는 한국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가만히 앉아 열렬하게 토론되고 있는 내용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입에서 침을 튀겨가면서 한국여성노동자들의 상황에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내가 받고 있는 상처와 아픔이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며, 남성들로부터 받고 있는 탄압이란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슬픔보다 분노의 마음이 앞서 그날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탄압 받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여성들에게 한없는 연대감을 가져보기도 했다.

 나는 여성모임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세미나에 참석하여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이중문화 속에서 사는 내 아이들의 정체성을 위한 한국어, 한국문화교육에도 많은 힘을 얻었다. 나의 움츠린 마음을 풀게 해준, 아주 즐거웠든 일은 회원들과 함께 농악과 탈춤을 함께 배운 것이다. 이렇게 나는 우리의 춤, 소리, 장단을 경험하며 쌓였던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도 있었다. “함께 가는 여성모임” 이란 여성모임의 모토에 맞추어 불평등한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조직원으로서 나의 몫을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여성모임에 참석했다.

 언어와 문화가 낯선 이곳에 뿌리를 내린 오늘까지, 우리는 정기적인 모임에서 밖에서 생긴 피로함을 잊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밤을 지샌 날도 허다하다. 서로의 의견충돌과 개인들의 지나친 욕심들 때문에 서로에게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하나로 간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걸어왔고, 또 우리들을 위한 배움터를 쌓아왔다.

 이렇게 여성모임은 나를 길렀고, 또 나는 여성모임의 한 조직인으로서 열정을 쏟은, 여성모임은 내 삶에서 중요한 한 장이다.

 나는 여성회모임이 오래 동안 침체된 상황에서 머물고 있는 점에 대하여 -물론 그 이유야 많겠지만- 이 지면을 통해 나의 의견을 몇 가지 쓰고싶다. 

 베를린의 경우, 그 동안 많은 공개행사를 직접 치르거나 또 다른 조직들과 연대활동을 했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테마에만 몰두하고 우리 자신들이 처해있는 현실과 입장(직장, 가정)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한 경우가 많았고, 우리들의 열정을 여성모임의 이미지만 앞세워 몰두하지 않았는가? 조직에서 개인들의 문제들을 다루기는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한번씩 우리들 마음의 편안함에 대하여 잠깐이라도 보살피는 여유와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었다. 생활에서 힘든 자신의 마음을 열어 함께 대화 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모임을 꾸려나가는데 중요한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 종종 해본다.

 행사를 치른 후 총평을 생산적으로 한 기억이 없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하여 잘못된 부분은 인정하고 그것을 거울삼아 더 나은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신뢰하는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총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개인의 이해타산과 자존심만 앞세워 논쟁을 벌여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종종 남성들이 나타나 함께 가려는 여성모임에 혼란과 분노를 야기하곤 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후유증이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도 우리는 모든 일에 저마다 열심히 참여했고, 진행과정에서 빚어지던 갈등들도 우리들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라고도 나는 생각했었다. 회원들 중 남성들과 함께 활동하고 싶어하는 생각으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개인적인 욕구도 인정을 했지만, 여성모임은 “여성들”이 자율적으로, 남성들의 간섭 없이 해야 한다는 회원들이 뜻이 있었기에, 베를린 지역모임이 존재할 수가 있었다. 이점은 여성권익을 위한 투쟁의 중요한 부분이다.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좀 지쳐있다. 지금까지 회원들의 교체가 거의 없이, 같은 회원들이 모여 조직을 이끌어 왔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나이로 보아 삶의 전환점에 와 있다. 또 회원들 개개인들의 살아온 과정과 생활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가 뚜렷하고 또 삶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개인들의 취향, 능력, 시간적인 여유가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회원들 간의 여성모임에 참여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당연히 그 활동에 따른 여성모임에 대한 기여와 바램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일부 회원들이 세계관과 개인의 취향에 맞은 조직을 찾아서 여성모임을 떠나고 있다. 한 때 나는 여성임에 대해 회의감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용기와 힘을 얻게 된 것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나 삶의 가치관에 대하여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재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젊은 시절에 여성모임은, 내 생의 전부인 마냥 집안일과 아이들은 뒷전으로 하고 달려간 그곳, 나의 정체성과 삶의 용기를 얻으려 드나들던 곳이다. 여성모임은 나에게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또 앞으로의 생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준 곳이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배워 언제나 새로운 삶을 시도하듯, 우리는 지난 일들을 인정하고 나 자신과 여성모임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으로 활동한다면, 우리는 함께 가는 동지이고 마음의 벗이다. 나와 여성모임과 만남은 우연이 아닌 귀중한 것이며,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 나에게 손을 내민 중요한 만남이다.

 이젠 우리는 옆에 있는 회원들을 먼저 돌아본 뒤,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찾고 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여력의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우리들의 마음이 편하지 않고, 신뢰가 없이는 이 사회에서 우리들의 몫을 할 수 없다. 집안이 편하지 않으면 이웃도 이 사회도 편할 수 없듯이 우리는 먼저 여성모임을 좋은 에너지로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지나치게 일에 대한 개인의 욕심은 조직의 발전에 기여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점이 여성모임에서 많은 갈등을 가져왔고 또 회칙수정과 조직개편의 필요성을 지적하게 된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여성모임은 빠른 시일 내 앞으로의 조직의 원활한 활동을 위한 좋은 짜임새에 대하여 세미나의 주제로 정하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다시 한번 더 모든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정리를 하고, 분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은 가능하면 모든 회원들이 즐겨 참여할 수 있는 테마를 찾되 우리들의 힘의 한계를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현재 회원들이 하나 둘 여성모임을 떠나는 문제는 어떤 조직이든지 그 곳의 성장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상적인, 건강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20년 이상으로 어떤 조직에서 몸담고 있다보면, 취향이 바꿔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한 생에서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고 또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않는가? 다만 지금 머물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여성모임을 이끌어 가는가에 대한 숙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

 회원들이 여성모임을 친정이라고 하는 말들을 우리들은 자주 들어왔다. 여성모임을 떠난 회원들도 친정을 외면하지 않고 나들이를 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집안을 꾸며나가야 한다. 그래서 뒷날 언젠가는 우리들의 집에 사랑과 믿음의 열쇠고리를 만들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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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터, 새로운 무늬



-조국남-


가끔 나는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구체화시켜서 알록달록한 색실로 짜 올라가는 직물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날실이 팽팽히 죄어진 베틀 앞에 마주 앉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각 개개인이 자기의 인생이라는 천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종류의 그리고 무슨 색상의 실이 선택되어서 어떤 무늬가 짜여 나올까 하는 호기심도 함께 천에 박힌다. 


 여성모임은 내가 독일 사회에서 한 이주민여성으로서의 직물을 짜나가는데 늘 새로운 무늬를 제공해 주었다. 조직의 사업과 활동 속에서 얻는 성취감이나, 회원들 간에 맺어지는 우애, 한국에서 온 이주민 1세 여성으로서 찾아가는 나의 위치와 입장, 아이들의 성장, 나 스스로의 자립 등의 셀 수 없는 문양들은 견본이 없이 즉석에서 짜야하기에 베틀의 북을 이쪽 저쪽으로 재빨리 던져가며, 사이사이마다 바디로 꼭꼭 빗어가며, 발로는 디뎌가며, 한 눈 팔 틈이 없이 그 과제를 위해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했었다.

 

언니는 돈 벌어서 하늘에 다 뿌려버리네!“, 언젠가 한국방문 했을 때 여동생이 한 말이다. 1970년에 독일에 와서 3년간의 고용계약이 끝나자 마음 설레면서 찾아간 첫 고국방문에서부터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모국어와 모국(Muttersprache, Mutterland)을 익히기 위해 가족 모두와 함께, 한국이 아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는 나 혼자서, 아버지가 임종하시기 전에,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형제 자매들이 보고 싶어서, 지금까지 십 수 번 한국을 오갔다. 독일로 향한 나의 길은 낯 설은 타향 길에서 시작해서(부모님과 헤어지면서 "잘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인사했었다.) 손님으로서의 왕래 길을 거쳐서(“저 다시 왔습니다!/저 다시 독일로 갑니다”) 이주민생활이 30여 년이 지난 오늘은 종래의 왕래길이 이제는 나의 귀향 길로 변했다(저 이제 집으로 갑니다. 다시 한국에 들리겠습니다!). 


 내 나이가 쉰 중반이 되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향한 길이나 한국에서 독일로 향한 길 이 모두가 이제는 나에게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짜 내린 직물의 무늬가 서로 연결이 되면서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하게, 단순하게, 때로는 복잡하게 매듭이 맺힌 채. 이 모두가 

필연적이었음도. 여성모임은 나의 독일에서의 성장시기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있다. 인정이 샘솟는 

곳, 배움의 터, 인생의 학당으로.   


 올해는 여성모임이 창립 25주년을 맞는다. 여성모임의 창립회원으로서 지난 25년을 되돌아보면 여성모임은 창립취지에 충실하게 회원들이 민주주의적이고 자주적으로 조직을 이끌어 왔다. 이주민 여성조직으로서의 실천한 정치 사회적인 사업과 활동의 성과는 인간사회에 여러 형태로 기여하였고, 여성모임회원들에게는 산 경험으로 집합되어 이주민여성으로서 우리의 미래를 새로이 창조하는데 기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10년 후쯤 내가 짜나가고 있는 나의 인생직물은 어떤 종류의, 무슨 색상의 씨실로 짜여 있을까? 그 때쯤 아마 나는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새로운 인생의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고향 길을 오고가면서 어느 곳에서나 마음이 편한 자유인으로서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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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포용 속에서 누리는 연대감

-한정로-

여성모임과 내가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여성모임이 창립된 몇 년쯤 후였던 것 같다. Neukoelln의 한 가정집에서 만나는 여성모임에 참석하면서 첫 접촉을 맺었다. 그 뒤 나의 학교생활 시작 등으로 바쁘면서도 TAM의 모임에 간혹 참석했었다. 그 당시 회원들에 대한 첫 인상은 처음 오는 사람에게 따뜻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면서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적어 보여서, 마치 관청에 온 것 같은 조금 냉정한 분위기로 느껴졌었다. 그렇다고 회원이 되기를 간청하거나 설득하는 시도도 없었기에,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전달이 존중되고 개개인의 입장을 중요시하는 단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후 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일은 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도우면서 대단히 촉발되었다. 이것은 여성모임을 통해 간호사로 이 땅에 온 우리의 사회적 위치뿐만 아니라 나의 삶을 돌이켜보는 전환점이 되었다. 고요히 흐르는 맑은 강물이 겉보기에 내 시야에는 깨끗하고 유유하게 잡히지만 그 강물의 깊은 바닥은 맑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로써 조용히 살던 나의 삶에 작은 파장이 생겼다. 독일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나 개인의 정의심과 사회적 인식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성모임은 나의 삶과 동반하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했기에, 다른 말로 하자면 마치 “친정”과도 같이 나의 모든 생활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모임 속에서 내가 집중했던 일은 “군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많은 독일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내기도 했었는데, 그들은 할머니들의 참혹한 인생이 마치 자기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것과 같은 태도를 보여주며 도왔다. 즉, 정신대 할머니들의 기막힌 사연을 자기 운명과 슬픔으로 해석하면서, 보편 종교인의 그런 충실하고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었고, 우리의 운동을 격려해주는 그들을 체험했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자문하게 되었었다. 독일 여성들이 어떤 억울하고 비참한 경우를 당했을 때 나도 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진정으로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 즉 “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서 왜곡된 한일 관계사의 사록 변경에 대해 방관하거나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2000년 여성법정 지지서명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당시 무능한 한국의 상황 그리고 여성모임 회원뿐만 아니라 독일인 여성에 대한 친밀감과 연대감을 동시에 확인하면서 독일 사회가 나에게 부여해 준 “의식주” 의 해결과 안정에 대해 감사의 마음은 하늘과 같은 데도, 이상한 이기주의가 나를 휩싼다.  즉,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독일사회의 복지나 번영을 위해서는 한국과 관련된 일에 비해 노력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다. 22년을 살았던 한국에 대한 태도와, 내가 35년이 넘도록 살아온 이곳 독일에 대한 태도와 모습이 이토록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나는 흠칫 놀라곤  한다. 즉 독일사회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처럼 끈질기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보다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여성모임 활동 속에서 한국을 비판하는 데 집중해 왔기 때문에, 한국사회가 갖는 장점과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대시키는데 조금 태만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거나 여전히 나에게는 한국에 대해 연민의 정이 강하게 자리한다. 나의 이런 모습은 독일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독일단체에 참석하고 협력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즉 독일 단체에 대해서는 그 목적을 위해 끈기 있고 적극적이며 지속적인 모습을 발휘하기가 힘이 든다. 바로 이점이 나에게 있어서 “한국 여성모임”과 다른 것이다.

 내가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과는 그냥 서로 마주하고 앉아 많은 대화가 없어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에 비해, 독일 단체 내에서는 언제나 발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사전달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물론 독일 사람들과도 장시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인간적 친밀성이 싹트고 서로에 대한 이해심과 존중의 느낌을 받게되며 서로 진실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독일인과는 어떤 분명한 간격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들은 나의 개인적인 정서에 정을 주거나 사적인 인생살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내가 특별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여성모임은 다르다. 서로의 세계관을 넓히고 인간대 인간의 사적인 사귐은 일을 통해서만 시작했기에, 지금 돌이켜 보면 입장과 의견의 차이로 간혹 남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또 이런 반목은 이슬 같이 없어지기도 한다. 이것도 25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단체라기 보다는 마치 가족과 같은 관계란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이러한 따듯한 정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사회적 인식을 깨워주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시야를 기를 수 있게 했던 여성모임에 모든 정력을 쏟아 소정의 목적을 성취했을 때 만족감을 향유했었지만, 때론 일에 치어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는 여성모임 안에서 위로와 편안함을 염원하고 싶다. 점점 이 세상을 등지는 회원들이 생기고 있고 이는 앞으로 더 늘어갈 것을 생각하면 멜랑코리한 감정과 아쉬움이 남는다. 서로를 포용하며 따뜻하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깊이 있는 신임을 바탕으로 하는 연대감을 누리면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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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경험을 나누며 모든 회포를 풀 수 있는 곳

-박재신-

1970년 5월 6일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어둡고 춥고 배고플 때였었다. 그때 시립 우르반 병원에서 꽃다발로 날 환영해 주었고, 운 좋게도 병원의 공사를 마무리되지 않아 3개월 동안 괴테 어학원에서 언어연수만 해도 되었다. 독일에 대한 사전지식은커녕 독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고 소양교육/반공교육만 받은 우리는 헬레나라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시립병원은 거의 30%이상이 한국인 간호사로 운영되는 상황이어서 언어소통은 그런 데로 되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비타 생명보험회사는(Vita Versicherung) 우리를 속여 생명보험을 들게 하여 장기동안 머무는 이에게는 해를 끼친 경험이 있다. 모친께서는 내가 파독될 당시 가난을 한탄하시며, 우리 귀한 장녀를 3년 식모살이 보내는 심정이라시며 꼭 3년 후 돌아오라는 부탁을 하셨다. 그러나 그 3년이 33년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때 나보다 5년 일찍 도착한 이들도 있었다. 지금은 보건소인 그때 기숙사에서는 50여명의 한국간호사만 살았다. 나는 좀더 많은 독일인과 만나서 문화, 언어, 풍습 등을 알고 싶어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 일은 나중에 교회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는 재독 한국여성모임을 나의 정치적 정체성을 실현하는 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성모임이 억울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그들과 함께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여성모임의 당연한 몫이라고 나는 본다. 그리하여 88올림픽 전에 여성노동자를 초대하여 한국의 여성노동자의 상황을 알리는 일을 대학생들과 함께 추진하여 홍보가 잘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정신대문제대책도 일본여성회와 함께 국제회의를 추진하여 자랑스럽게 여성모임의 능력과 귀한 뜻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의 식민지 만행을 국제여론에 고발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본다. 그 당시 몇몇 회원은 나의 일 하는 방법에 대하여 비판한 줄로 안다. 그러나 나의 느낌은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일 망정, 일 중심으로 그냥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욕먹으면서도 항상 일하느냐”고 했다. 나에게 아무리 욕해도 욕은 안 먹으면 그만이고, 일을 하지 않으면 구설수에 오르지도 않는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학업에 충실해야할 시기와 남편의 사망으로 힘들었을 때 나는 여성모임에 나가 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때 회원 중에서 날 포옹할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어둡고 춥고 배고플 때 파독되어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그저 일만으로 만족하며 살아온 게 어쩔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하여준 독일사회에 감사한 생각이 든다. 물론 그 길을 함께 한 여성모임은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여성모임 초기에는 세미나준비에다 밥도 해야지, 새 회원상담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지, 하며 그 주말 세미나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며칠이나 몸살을 알아야 했다. 그래도 짜증나지 않았고 남편인 Horst 또한 좋은 동반자로 항상 대화로 날 도와주었다. 나는 한 가지 일에 빠지면 거기에 미쳐 다른 것 모두 잊는 형이라서 Horst한테 전화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항상 어떻게 알았는지 날 데리러 온 그를 보고 난 행복한 줄도 모르고 행복했었다. 

 한 개인의 성장과 자립은 한 단체는 한 성원, 성원이 모여 이루어짐으로 그 단체의 자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모임에서는 가끔 그렇지 못함을 경험 할 때가 있다. 나의 경험은 어렵게 만들어 낸 책을 축하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망신을 주는 태도는 누어서 침밷는 꼴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여성계에서 명망 있고 학계에서 인정받은 유명출판사에서 10년을 넘게 일하고 연구한 책이 나오는데, 나의 의견이나 뜻을 묻지도 않고 이의 서안을 보낸 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언어의 콘텍스트에서 이해 할 수 있는 뻔한 것을 가지고 “여성회 창립을 나 혼자 했다”고 썼다는 항의라고... 내가 서운한 점은 나를 그 정도밖에 모르는 여성모임의 나에 대한 태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여성문제를 당당하게 여성모임을 통하여 해결하려 노력하였고, 정치적 정체성을 실현하려 힘썼다. 그리고 성공으로 추진하였다고 본다. 내 개인의 명예나 권익을 위하여 여성모임을 통하여 한일은 없다.    

 우리 모임이 앞으로 더 커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나오는 회원과 그 전에 열심히 활동했던 성원들을 동원하여 옛정과 그 뜻을 모아 공동의 경험을 나누며 모든 회포를 풀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과제로 보인다.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그러기에 그 살아온 삶을 다시 정리하는 마음으로 만나면 후배들에게 또한 한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고 보다.

 이제 어둡고, 춥고, 배고프던 우리 생활의 경험들은 행복함과 풍요로움으로 바뀔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다. 이제 모든 것을 용서하여주고, 또한 용서받고 싶다.

그리고 모든 이 들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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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나눌 수 있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광장

-오선녀-

내가 여성모임을 알게 된 것은 약 20년 전 즈음 같다. 공부를 할 때 한두 번 여성모임에 참석 한 적이 있다. 마음이 분주하게 살다보니 관심과는 달리 자주 참석하질 못했다.

난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의 한국인과 접촉이 없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관심이 여성모임에 생겼고 또 여성과 가정상담을 하는 나로서는 독일인의 그리고 다른 외국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인들의 생활에도 관심이 생겼다. 내 직장을 통해 내게 오는 사람들은 90년대에는 약 75%가 독일인이었고 외국인들 중에서는 터키인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동유럽 사람들, 소련, 폴란드, 유고, 필리핀, 타이랜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등의 사람들이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상담대상자 중 독일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이제는 60% 정도의 상담대상자들이 외국인들이다. 한국인들의 수는 아주 적은데, 아마 이민을 온 유형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는 다르고 (예: 간호사) 또 문제가 있으면 해결방책이 다르고, 이런 상담소에 온다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든다.

 내 직장에서의 상담내용에서 특히 외국인여성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는 것은 외국법 제 19조의 조항이다. 이것은 외국인들이 독일배우자와 결혼하면 4년을 함께 살아야 배우자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체류허가권을 얻을 수 있다는 조항이다. 만약의 경우 4년 전에 별거를 하면 독일에 머무를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많이 상담 하다보니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심리상담 등도 중요하지만, 이 19조 법 조항이 혼인을 통하여 독일에 온 외국인들이 배우자에 종속된 체류허가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 그들에게 많은 문제를 던져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가정폭력을 행사해도 독일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하여 4년 간 폭행을 참고 메어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린 1992년에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이 법 조항의 수정을 위한 소그룹을 결성하였다.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 토론을 하면서 새 법안을 상정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97년에 연방의회에서 통과, 연방참의회의 승인을 받아 이 법 조항내용이 수정되었다. 이제는 4년이 아니라 2년만 같이 살고 배우자와 별거를 할 경우 독일에 머물 수가 있다.

 난 이 일을 꾸준히 같이 하면서 독일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행이 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이 법안이 통과되는 데는 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다. 각 정당들이 자기 정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정안을 만들어 수많은 토론을 하였어야 했다. 특히 그 당시 집권정당인 CDU(기독교민주당)가 법 수정을 반대하였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돕는 정당들과 수백 번에 걸친 의견수렴과정을 거쳐야 하였고, CDU 소속인 Rita Suesmuth씨가 하는 여성정치모임을 동원해 도움을 받는 작업도 하였다. 수많은 성명서를 발표, 서명운동, 데모 등을 하여 이 법의 수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론화하다보니 전 독일 차원에서 여성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여기서 나는 민주주의가 이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동양인으로서는 혼자 이 소그룹에서 일을 하면서 늘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이 그룹에서 같이 일하는 동양인이 있어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했다. 여성모임회원들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여성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모임에 나간지는 얼마 안 된다. 늘 참석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모임을 지키는 여러 회원들이 꾸준히 만난다는 자체가 큰 성의와 노력임을 느낀다.

 지난 25년 동안 여성모임을 꾸준히 이끌고, 발전시키고 그리고 많은 사회, 정치, 여성 그리고 문화문제들을 다루고, 독일사회에 한국 그리고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이주민이 있다는 것도 알리는 데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는 것에 감명하고 있다.

 내가 외국, 직장생활에 힘이 들어 허덕이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힘이 안 들겠는가,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대화의 장소를 마련하고 좀 더 낳은 사회, 정치와 공정하지 않은 것들을 해결코자 토론을 하고 시간을 희생하고 하는 것이 내게는 류 관순 여사 같은 여성들이라 생각이 들어 눈이 시큰해진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이런 든든한 여성모임이 서 있다는 것은 25년 동안의 회원들의 성의와 정성인 것으로 나는 안다.

 30년 이상의 독일생활에서 여성모임회원들은 한국인들이 아니고 이제는 지구인들이다. 말, 식생활, 사고하는 방법 등이 자기도 모르게 한-독 문화가 범벅이 되어 엉켜있다.

 나는 여성모임이 우리들의 성장을 위하여 서 있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발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광장이라고 생각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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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 여성들의 열린 별장                                   


-강여규-


2003년 8월 7일부터 11일까지 재독한국여성모임 25주년 기념문집과 자료정리를 위해 편집위원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40도까지 올라가는 살인적 더위가(이 더위로 유럽연합에는 만 여명의 노인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극성이었다. 더워 죽을 지경인데 불때서 음식까지 만들어야 하니 부엌은 말 그대로 한증막이었다. 정말 에어컨 생각이 간절했고, 이럴 때는 전화 한 통으로 짜장면이며, 콩국수 같은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한국자본주의의 서비스업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여성모임 회원들은 고물 '메이드 인 차이나'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하면서 머리 맞대고 열심히 일을 해 나갔다(몸에 땀띠가 난 회원도 있었음). 우리에게 밥해준다고 사진 자료와 음식거리를 장만해 달려온 회원도 있었고, 그 더위에 싫은 소리 한 마디 없이 부엌당번을 자청한 회원도 있었다. 나는 이런 모임이 있을 때 다른 회원들이 보여주던 자상한 주인으로서의 역할은 엄두도 못 내고,'각자 알아서 편한 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몰염치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회원들이 섭섭하다는 눈치 한 번 보내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눈치 안 보려고 해서 못 보았나? 


 아무튼 여성모임 회원들 참 지독하다! 그 더위에 하이델베르크 시내 구경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일한다며 집에서만 떡을 치다니. 그런데도 한 편으로 나는 즐거웠다. 아무리 일 때문에 회원들이 만났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만나는 기쁨이나, 편안한 마음의 교류가 바닥에 깔려 있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이 여성모임이 주는 독특한 즐거움이라고 느낀다. 일은 그것을 하는 사람들끼리 마음이 맞지 않으면 괴로움의 근원이다. 최근 4, 5년 여성모임에 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는 회원들과 더 깊이 사귈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나름대로 따뜻한 정도 느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성모임의 회원이 된 지도 벌써 13년이다. 지금이나 처음이나 회원 중에서는 나이가 적은 편에 속하는 나는, 모임에 가입을 할 때, 나이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나이 값'하는 회원이 비교적 적은 것에 안심이 되었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성격이 비딱해서인지 한국의 일반적 행동양식인, 윗사람-섬김을 잘 못하고, 아래-사람-건사도 잘하지 못한다. 사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모두에게 인간 사이의 기본 예절이면 족하지, 우리가 무슨 봉건 사회나 씨족 사회에 사는 것도 아닌데, 언니, 오빠, 동생, 어머님, 아버님의 가족 칭호로 남을 불러야 한다는 말일까? 아무튼 여성모임에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씨'로 통일해 부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유감없이 회원들의 이름에 씨를 착착 붙이며 부르곤 했다.      


 그러나 내가 몸담고 있던 13년 동안 여성모임 안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원의 수가 현격히 줄었다. 그리고 회원들 사이의 갈등도 여러 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여성모임의 정체성, 여성모임의 방향 설정 등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거론되었고, 최근에는 여성모임의 조직개편에 대한 시도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한 조직의 성장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성모임의 이런 변화는 여성모임의 태생적 한계나, 지금까지의 활동 방향이 가진 내재적 문제에서도 온다고 생각한다. 


 여성모임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해 왔다. 그 근저에는 한국의 사회-정치-경제 현상에 대해 일반적으로 좌익성향이라 부를 수 있는 의식과 태도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연대 및 남녀평등사회를 위한 여성조직과도 연대를 해왔다. 그리고 독일에서 자라는 한국 이세들의 정체성 확립이나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한 문화활동과 한글교육 등에도 관심과 정열을 쏟았고, 정신대 문제를 독일사회에 알리고, 세계적 연대를 위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독일 통일에 자극을 받으며, 군사독재정권이 그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분단상태를 반공이데올로기로 경직시키는 것에 대항하는 통일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로 이어진 한국 민주화의 점진적 성공은, 여성모임 내부에서도 한국과의 연대운동이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야 하며, 목표의 재정립도 필요하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째, 과거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우리가 무엇을 위해 한국과 협력을 할 것인지, 그리고 한다면 어떤 단체들과 협력을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해졌다. 둘째, 여성모임 회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과거처럼 투쟁형식의 운동을 하는 것에 점차 회의를 갖게 되었고,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한국과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막상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독일 사회에서는 소외된 것이 아닌가란 질문들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념적 운동도 좋지만, 우리 회원들 사이의 결속이나 깊은 관심, 또는 동지애 같은 것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모든 질문, 회의가 타당하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모임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서로 충돌도 하고, 머리 맞대고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은 여성모임의 결속과 존속을 위해 구조의 변경이라는 힘든 일도 해냈다. 아쉽게도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회원들이 탈퇴를 했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자신이 계속 참여할 단체들을 찾아가거나 새로운 조직에 가입하기도 했다. 회원수가 줄어드는 것이 물론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단체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탈퇴한 회원이나 남아있는 회원이나 모두 자신이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탈퇴한 회원들이 다른 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하는 것도, 가령 그 단체의 성격이 우리에게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일단은 지켜보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주력해야 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여성모임을 '어떻게,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25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그 동안의 활동과 노력들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은 의미가 깊다. 정리를 한다는 것은 어떤 회원의 좀 냉소적인 표현처럼 무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한 재정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받은 주제는 '여성모임과 나' 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여성모임 자체가 어떻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고, 회원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그런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자기야, 나 짝 사랑하기 싫어!). 그래서 마음에 드는 회원과는 앞으로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고, 아직 친하지 못한 회원들과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내 삶의 행동원칙에(뭐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니 핀잔주지 마시구요) 어긋나지 않는 한, 즐겁게 함께 무슨 일이던 할 수 있다는 게 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성모임 회원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 모두 주체적 참여자가 되자는 것이다. 수동적 자세로 관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없으면 우리 모임에 무엇이 결여될 것이란 주인의식을 가지고 여성모임을 함께 꾸려나가자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여성모임의 일을 맡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라도 주인이 되어 있으면 언제든 시간의 여유가 생기며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여성모임의 미래는 열려 있다. 모든 회원들은 각자가 모임에서 바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다른 회원들을 설득하시라.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이며, 자신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멋진가를 보여 주시라. 


우리 모두 서로에게 기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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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들과 함께 차별 없는 사회로

-주재순-

나는 여자로 성장하면서 받은 차별대우가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을 항상 느끼고 산다. 거기다가 타국에 와서 받는 인간차별대우 또한 나의 정의심을 더 돋구어 주어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 주고 존경을 받는 사회, 나의 삶을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

 젊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개인을 인정하고, 직위나 성, 문화 차이를 중시 않고 함께 추구하는 목적을 따라 가면 될 것이다 하면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오해, 의사소통 문제가 자꾸 일어나는데, 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체계와 교육성장문화차원에서 오는 문제가 많은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차별대우에 예민하다보니 당연히 나의 경험과 거기에 따라 오는 감정을 분석하고, 왜 이런가, 어떻게 하면 이런 문화를 없앨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소하는가 궁금하고 같이 싸울 수 있는 동지를 찾게 되었다. 또 같이 모여 힘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재독여성모임에서 뜻이 맞는 여성 동지들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었는데, 단체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여성에게 별로 친절하게 “어서 오세요” 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맞는 여성들이 있으니, 대화를 할 기회나 씩씩한 동지들을 보는 것이 좋았고, 여성인권운동, 특히 한국여성노동자의 인권운동과 연대하여 힘을 보태는 것이 나에게 중요하였다.

 한국경제가 발전이 되어 가면서 노동조건이 향상되고 사회가 점차적으로 민주화로 진전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여기서의 나의 삶, 이주민여성으로의 역할이 나의 관심을 붙잡았다. 왜 내가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고, 얼굴이 다르게 생겼다고 괄시나 천대를 받나, 나의 인권은 어디로 갔나? 어떻게 이런 사회적 편견을 배제할 수 있는가란 생각을 했다. 나는 노동이주민으로 와서 학업을 할 수 있는 체류허가를 받았는데도 독일남자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 설명서를 써야 했을 때 너무나 치사하고 모욕이라고 반항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관청뿐만이 아니라, 동네에서도 괄시가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맞는 독일 여성들과 그룹을 만들어 여성을, 특히 이주민여성을 무시하는 사회구조, 법, 사고방식과 행동을 지적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라는 칭호 아래에서 서로 단결하자였는데, 여성 운동권 아래에서도 다른 문화권에서 온 여성들에게 많은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눈에 띠고, 다른 이주민여성들의 경험을 많이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훼미니즘은 북미, 서유럽여성의 전용으로 생각을 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견해는 미비한 발전이 더 필요로 하는 것으로 대접을 하였다. 훼미니즘의 정의가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시일이 필요했다.

 특히 많은 독일 여성운동가들이 자기들도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을 동등하게 취급 안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차별 문제에 자기들의 역할을 분석하고 책임을 추구하게까지는 많은 토론과 언쟁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동시에 이주민 1, 2세, 흑인 여성, 피난민, 유태인 여성들과 다른 그룹(ELISA)을 만들어 인간차별반대 운동을 했다. 우리를 위한 회의를 조직하고 어떻게 우리 요구를 공개석에, 정치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반영시키는가 등등을 궁리하면서 실행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한 동안 동시에 세 개의 여성그룹에서 활동을 했다. 재독여성모임, 국제여성그릅, ELISA (im Exil Lebende Immigrantinnen und schwarze Frauen in Aktion) 단체였다.

 이렇게 그룹활동을 할 때에는 상담도 했지만 이론과 이상추구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로마사람들과 일하면서 나는 나의 경계를 체험했다. 어디를 가도 인간대접을 못 받고 괄시 당하고 쫓기는 로마사람을 위한 단체에서 그들의 짓밟은 인권을 되찾는 운동이었다. 정치적으로 나의 정의감도 충족시키는 일이었지만, 내가 독일인도 아니고 로마 사람이 아니라 중간에서 끼어서 있는 나의 역할이 꽤나 어려웠다. 로마계의 문화, 역사, 사회배경을 많이 알게 되었고 훌륭한 사람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몇몇 로마사람들한테서, 특이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한테서 나의 생김새를 놀리고 모욕하는 언사가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이들을 이해하고 무의식적으로 한 언사에 신경을 많이 안 썼다. 이런 일이 자주 번복되다 보니, 아무리 정치적으로 연대감이 필요하더라도 나의 마음이 자꾸 이들한테서 멀어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일은 하였으나 진심에서 우러러 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기간은 나 개인한테 꽤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신적으로 극복해야할 것이 많았다. 이때 나는 여성모임의 총무직을 맡아 즐겨하면서 만족감을 받고, 또 인정도 받아 나의 바닥에 기어있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주는 힘을 받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데는 이주민 여성상담소 agisra인데 이주민여성의 인권운동 단체이다.

우리 팀은 모두가 이주경험이 있는 여성이다. 이 나라에서 겪는 인간차별, 성차별의 반대운동과 우리의 존중받는 위치를 찾는 일을 하면서 독일여성뿐만이 아닌 세계여성들과 네트워크를 하면서, 서로 존중하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한국 여성부에서 재작년부터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 회를 열어 해외에 있는 한민족여성과 한국에 있는 여성과 연결을 해주었다. 작년에 여기에 참석을 하였는데, 한국에서 참석하신 분들은 경제, 사회평화라는 주제 아래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나, 해외에서 오신 여성들은 활동분야가 꽤나 다양하다. 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나의 생각은 자꾸만, 한 가지 의문에 뱅뱅 돈다. 이리 다양한 여성들이 한민족이라는 칭으로 어떤 네트워크를 할까? 회의 자체를 네트워크로 생각하는 것인가?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네트워크를 하려면 내용을 중심으로 네트워크 할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외국에서 적응하고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야 되는지, 자신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알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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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당


-김정숙-

1980년 광주에서 대학생, 시민항쟁이 투열하던 피비린내 나든 5월!
지금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는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 정현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얘, 정숙아, 테레비 봤니?” “왜?” “한 번 봐봐. 기가 막히고 치가 떨릴 거야.”
난 당장 테레비를 켜 보는 순간 너무도 아찔했다. 무작정 패대는 군인경찰들, 맘대로 휘두르는 그들의 총칼질 앞에서 엎드려 있는, 질질 끌려가는 젊은이들!

이것이 과연 내 조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눈물이 그칠 새 없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흘렀다.

이 젊은이들의 부모님들께선 얼마나 불안 속에서 떨고 계실까?!

얼마 후 다시 현옥이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숙아, 테레비 봤니? 야, 우리 이러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너, 그 정 목사님 잘 알지, 그 분께 연락해보자.”
이렇게 난 처음으로 우리 나라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짧은 시일 내에 베를린을 중심으로 반 군정 시위대모를 신청조직을 위한 한독 친선회가 창립되어, 재유럽한인들의 많은 민주주의단체모임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고, 광주항쟁을 위한 재유럽민주연합단체가 창설되었다.

 이때 많은 한국 남성 민주인사와 여성으로서 최영숙 운동권 내 선배님을 알게 되어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또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한인간으로서 실로 “동지”라는 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후 남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갖기 위해 꼭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친구인 박재신 사회학박사의 권유로 베를린의 재독한국여성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우리 모임의 회원이 되었고, 잠시 베를린구역의 대표를 맡은 적도 있었다.

 우리 모임이 나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보물은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말 속에 들어 있는 유머를 주고받으면서 “내 배야 찢어져라” 하고 배를 잡고 맘껏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난 우리여성모임이 내 친정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친정”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면의 생각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엉터리 생각일진 모르겠으나, 옛날에 한번 시집간 딸이 시댁에서 쫓겨나면 집안 망신시킨 딸이라고 친정에도 돌아갈 수가 없지 않았는가! 난 우리여성모임이 이런 친정이 아니었으면 한다.
 
 1987년 내가 간암으로 죽음 직전에서 헤맬 때, 말없이 찾아와 기울 옷과 때묻은 옷을 정리해준 김은주님도 우리 여성모임에서 알게된 분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각별히 한번 더 고마웠어요 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이 분 외에도 여러분들의 격려로 난 암을 친구로 사귀게 되어 진정한 친구가 생겼다. 감사합니다.
 
 1993년 세종학교를 여러분과 함께 건립할 당시 지금 교감선생님으로 계시는 김영옥님과 난  우리 모임의 회원이었기에 우린 여러 면에서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린 아주 재미있게 열심히 뛰었고 우리 모임의 배려가 우리에겐 큰 힘이 되 주었다.

이제 6월 14일이면 세종학교 제 십 주년 개교기념일이다.

이렇게 우리 여성 모임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당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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