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

송금희(심리치료사, 보육교사)



 
한국은 내가 태어나 자라고 사춘기를 보낸 '모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30여 년 동안 독일 생활을 하면서 항상 향수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 있을 때면 여전히 불편해 하는 나를 느낀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살던 시절의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은 탓일까?

나는 팔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유교적인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난 우리 어머니는 나 역시 아들이길 바라셨다. 아들이길 바랬던 막내딸은 이번에는 '여성스럽게' 자라나 주길 바랬던 당신의 뜻과는 달리 수줍음을 모르는 사내아이 같았다. 위로 세 언니들이 있었기에 내 또래의 다른 여자 친구들 보다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자유로웠던 것은 사실이나, 그로 인해 더더욱 말괄량이 취급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공부하기를 아주 싫어했던 나는 예상대로 대학 입학시험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열등감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와도 툭 터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강요에 사춘기 열등감 중압
 
내가 가진 장점과 능력을 키워주기 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그것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남자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는 그 때까지 내가 느꼈지만 인정할 수 없었던 모든 열등감을 어느 정도 씻어주고 내 마음도 편하게 하여 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는 그 친구를 자주 아무도 모르게 만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휘영청 달이 밝은, 어지간히도 밝은 밤이었다. 논 사잇길을 함께 걷고 있을 때 그 친구가 느닷없이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친구를 밀쳐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냅다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가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으로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다시 얼른 뛰어 가서 "우리 또 한번 하자"고 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여자가 어떻게  ' 하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아무리 수줍음을 모르는 사내아이 같다 할지라도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 친구를 만나도 예전의 마음 편했던 상태가 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성 의식은 애써 무시해야 될 거추장스런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결혼하기도 전에 입을 맞추다니!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분명 "과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과거는 내가 갖고 있던 열등감을 더 부추기는 셈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훨훨 날아가 버렸으면! 군대라도 갈까?"

그러던 중 나에게 "훨훨 날아가 자유롭게 살" 기회가 왔다. 동생의 말괄량이 같은 성격을 항상 불안하게 생각하던 큰오빠는 "금희 독일가면 버려요"라며 반대했지만, "요즈음은 여자들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 되고 볼 수 있으면 많이 보아야 된다"고 생각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갈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안은 내가 독일에 가서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의식주와 동생들의 교육비는 해결할 수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내게 독일이라는 나라는 돈을 벌기 위한 신세계라기보다는 자유를 얻기 위한 신세계로 느껴졌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베를린에 도착하게 되었다. 독일 생활의 처음부터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된 한국 간호원 스물 세 명중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고향친구가 하나 있었다.
 
남자친구 첫 키스에 놀라 그만...
 
수억 만리 타향살이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척 위로가 되었다. 또한 병원 측의 배려로 우리 스물 세 명은 같은 층에서 살 수 있었다. 물론 병원 생활은 무척 고됐다. 문화의 차이로 인해 오해를 받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지만 누구나 외국에서는 애국자가 되듯이, 나도 한국이란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며 허리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는 밤마다 한국음식을 해먹고 독일 간호원들 흉도 실컷 보고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우리 민족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 중 노래가 빠질 수 있으랴. 한국에서의 말괄량이 시절이 헛되지 않은 기회였다. 내가 한국에 있을 당시에는 국악은 등한시하고 양악을 선호하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유행가 보다 김 세레나의 타령을 좋아했고 제법 부를 줄 알았다. 또 얼마간 국악원에 다닌 덕분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나는 기꺼이 고향의 춤과 노래를 그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내가 원하던 생활이던가! 정해진 틀에 나를 맞추면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으니.



<사진> 처음 독일에서 생활할 때엔 밤마다 한국 음식 해먹고 독일 간호원 흉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병원기숙사 부엌에서 저녁식사 뒤 동료들과 즐겁게 놀고 있는 장면.


68세대가 만든 보육원서 첫 교사생활
 
독일생활은 나에게 잘 맞았다. 그러나 병원 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나의 자유 분방한 기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보육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립 보육원에서 2년 6개월 간 근무한 후, 사립 보육원 교사로 채용되었다. 이 보육원은 1968년 학생운동 하던 사람들이 자녀들을 비권위주의적이며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육시키고자 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립적으로 설립, 운영하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독일은 그들이 역사에 남긴 중대한 과오 때문에 배타적인 민족의 나라로 낙인 찍혀 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고, 여전히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독일인 중에는 그 과오 때문에 타민족에 대하여 무조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있다. 타민족에 대한 이 두 가지 태도는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이고 이 극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독일의 숙제이겠지만, 문제의 여부를 일단 떠나서, 이 보육원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외국인 선생 일부러 채용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학부모들이 나를 채용한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그들이 나를 채용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손해를 볼 것이란 기분이 들 정도로 나의 행동이 꾸밈없고 당당하였다는 것이며, 둘째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른 문화를 의식적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없고 자연히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도 없앨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다.

학부모들은 교대로 그날그날 아이들과 교사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했고, 교사가 아프거나 다른 도움이 필요할 때는 교사를 도와 근무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청소 역시 학부모들이 돌아가며 했고, 교사들은 아이들 돌보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열두 명 있었는데, 근무를 시작하고 보니 이곳 아이들은 시립 보육원 아이들과는 정말 차이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옷을 입힐 때 예쁘고 깨끗한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아이들이 활동하기에 편한가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육원에 올 때는 맘 편히 놀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 역시 아이들의 옷이 더러워 질까봐 아이들의 행동에 제약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또 입을 옷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아이들의 흥미나 요구를 인정해 주는 데 놀랐다.

아이들 중에는 다니엘이라는 네 살 짜리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누나가 있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다니엘도 따라하기를 좋아했다. 다니엘은 누나를 따라서 머리도 묶고 치마를 입고 보육원에 왔기 때문에, 난 한참 동안 다니엘을 '여자 아이'라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다니엘과는 또 다른 우스꽝스러운 경험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가다가 아이들이 소변을 보겠다하면 서슴없이 길옆에서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독일에서는 개라면 길옆에서 똥, 오줌을 실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런 사회에서 조그마한 동양인 교사가 독일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다니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옆에서 아이들을 소변보도록 도와주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한 명이 "오줌 마려워" 하면 모두 같이 따라서 마렵다고 하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다니엘이다.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서 소변을 보고 있는 희한한 광경을 옆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술 더 뜨는 격으로 여자아이로 보이는 아이가 치마를 위로 번쩍 치켜올리고 고추를 내어놓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무에다 오줌을 누고 있으니 그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애들과 즐거운 아수라장...
 
보육원의 개방적인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했고, 그것은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는 비결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근무하는 날이면 어느 땐 즐거운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에버라는 독일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나와는 반대였다. 성격이 조용할 뿐 아니라
차분하고, 독일식의 자립적이고 개인적인 교육방법이 투철하여 가끔은 이기주의적이고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세 살 짜리 아이가 나무로 만든 놀이무대 위에 올라갔는데 올라갈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갔다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 높아 무서워 내려오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에버는 "너 혼자 올라갔으니 혼자서 내려올 수 있다"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번쩍 안아서 내려주고 싶었지만, 그때는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어느 교육 방법이 내 것인지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가슴은 아팠지만 그냥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진> 보육원서 얼굴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개구쟁이들.


'나눔 문화' 모르는 그들과 씨름...

그 이후 차차 나도 나의 교육방식을 찾았다. 나는 공동체를 강조하여 아이들이 서로 돕도록 했으며,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어린 아이들은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형처럼 따르게 했다.

그러다 보니 개인주의적인 에버와 자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성격, 자라온 문화 등 모든 것이 달랐다. 뿐만 아니라 에버가 그 때까지 개인적으로 교제한 외국인은 내가 처음이고 보니 나를 이해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그가 사표를 내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에버가 보육원을 그만둔 후로 나는 나의 교육방식을 계속 고수해 나갈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은 자기만 먹는다. "네 것 좀 먹어 보자" 하기 전에 "내 것 좀 먹어 봐"라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도 아침식사로 싸 가지고 온 빵 등을 각자 자기 것만 먹었다.
 
공동체주의 가르치느라 생고생...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먹기 좋게 잘라 한 접시에 담아 중간에 놓고 먹고 싶은 데로 먹도록 하였다. 서로가 나누어 먹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탕 하나만 가져 와도 열두 개로 잘라야 하는 것이 생소하여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누어 먹음의 즐거움을 배운 아이들은 일부러 매일같이 나누어 먹을 것을 가져 왔다. 그런가 하면, 나누는 것이 싫어 혼자 몰래 먹다가 들킨 아이들도 있었다.

한번은 세 살 짜리 꼬마가 없어져서 모두 찾느라 난리가 났다. 큰 아이들은 밖에 나가 그 아이 이름을 부르며 보육원 주의를 찾아다녔고, 나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놀랐지만 나머지 어린 아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마음을 가다듬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의 심정을 일각이 여삼추라 하던가?

잠시 후 뜻밖에 교실 안에서, "금희! 토마스 여기 있어요!"라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뛰어 들어갔다. 토마스가 문 뒤에 숨어서 자기가 가지고 온 사탕을 혼자서 몰래 먹다가 들킨 것이다.
그는 놀란 토끼 같은 동그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마지막 입 속에 남은 사탕을 오도독 오도독 빨리 깨물어 눈을 꼭 감고 꿀꺽 삼켜 버렸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무렵 아이들은 이미 형제처럼 서로 도와가며 지내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왜 말도 없이 숨어서 우리를 걱정하게 만드느냐고 야단법석이었다.

토마스의 일은 나에게 소리 없는 항의로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문제 때문에 학부모들에게 직접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식사를 함께 시작하였으면 모두가 끝날 때까지 아무리 지루하여도 기다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나는 먼저 식사가 끝난 아이는 일어나서 다른 교실에 가 놀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루한데도 예의 때문에 궁둥이를 뒤틀며 앉아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보기가 너무나 안쓰러워서였다.

서양 사람의 생활양식 중 눈에 띄게 우리와 다른 것은 입식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의자와 침대 생활을 하는 이곳의 문화 때문에 신을 신고 방에 들어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 역시 구두를 신었다가 벗었다가 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방에 들고 날 때마다 신을 신고 벗는 것을 아주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신고 벗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 되어 있기 때문에 힘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안에 신을 신고 들어온다는 것이 용납되질 않는다. 나는 이곳에 삼십 년 이상을 살았어도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신발을 벗고 들어오도록 한다.

보육원에서도 나는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물론 보육원에 신발장이 있어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실내화로 갈아 신기도 하지만 이것은 위생상의 이유보다 편리함을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아이들은 갈아 신기 귀찮으니까 어느 때는 그냥 하루 종일 신을 신은 채이다.
 
주장하려면 남 얘기 받아들여야
 
또 학부형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갈 때는 구두를 신은 채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학부형 회의에 안건으로 제시했고,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래도 학부형들은 습관이 되지 않아 구두 발로 들어오다가 나에게 들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무안해서 얼른 벗거나 날아가는 흉내를 내며 빨리 뛰어 나간다.

아마도 내가 없을 때는 모두들 구두 발로 마음 편하게 드나들었으리라!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었을까? 나는 학부형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갈 때마다 신발 신고 들어 올까봐 걱정이 되어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것을 통제하느라 아이들의 아침 첫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부모들과의 아침인사도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이미 이국의 생활습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당장 실천에 옮기도록 요구하였던 것이다.

에버의 일과 그 밖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나는 나를 주장하려면 타인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받아들일 자세가 되지 않은 주장은 고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집이라는 이 악마 같은 강한 집념은 타인과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오해를 하게 하며,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말꼬리를 잡고 엉뚱한 소리만 하게 하고, 오히려 상대방이 날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을 느끼게 할 뿐임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사진> 77년 같은 반 (보육 전문학교) 학생과 어린이 탐험놀이터에서 실습하며.


잉꼬부부의 비결

보육원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갖춰야 할 기본의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사회는 보육원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 더 작게는 부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의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애 삶에 대한 권리이다. 그러한 권리를 나에게 일깨워 준 것은 내 첫 남편이었다.

우리는 1976에 결혼하였는데 슬프게도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결혼 생활 내내 그는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며 정신적 안내자(Initiator)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나를 옥죄고 있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고,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내가 누려야 할 행복을 가르쳐 주었다. 또 그런 차원에서, 내가 여성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하도록 후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5개월 후, 나는 지금의 남편 랄프를 만났다. 사회의 관습은 사랑하는 남편이 떠나면 적어도 몇 년을 혼자서 살던가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첫 남편이 가르쳐 준대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 스스로 인정하는 데는 거의 2년이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무렵 랄프와 나는 똑같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것을 아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친한 친구들 세 명뿐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절대 비밀이었다. 어쩌다 사람들에게 들킬 때면 학교 친구인데 공부하기 위해 만난다고 속였다. 그러나 랄프는 나를 사귄 즉시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개시키고 어디든지 꼭 나를 데리고 다니려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혼자 다니려 할 때는 참을성 있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해주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도 내가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다.
 
독일의 한 유머에 어떤 결혼한 여성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가 남편에게 들킬 상황에서 같이 있던 남자를 농 속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나를 농 속에 숨겼었던 시절” 이라며 농담을 하곤 같이 웃는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잉꼬 부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또 어떻게 18년 이상을 항상 처음 사귄 사람들처럼 정답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랄프는 나보다 훨씬 연하인데다 전에 결혼한 경험도 없으므로 우리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넘겨짚는 경우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아동심리치료사 공부를 할 때, 우리 반 독일 학생들은 우리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우리가 무시하는 것 뿐 이라며 우리 부부의 문제를 찾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나를 분석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그 동안 우리에게 질문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인간의 욕망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또 주고받는다는 것을 사회적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의무와 권리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누구 한 사람이 계속 베풀지도, 계속 받지도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랄프는 18년 이상을 나와 같이 살면서도 지금까지 한번도 내 잘못을 탓하거나 비난한 적이 없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스스로 화가 나서 펄펄 뛰는데 그럴 때마다 나를 꼬옥 안아주면서 “당신이 이런 잘못을 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이런 잘못을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금희가 아니거든” 하며 위로 해 준다. 그러면 가슴이 뿌듯해지고 사랑과 정이 온 몸을 감싸주는 듯 하다. 또, 나는 살이 좀 찐 데다가 나이 오십이 넘으니 자꾸만 올라오는 뱃살은 조금만 신경을 안 쓰고 있으면 쑤욱 앞으로 나와 꼭 임신부 같다. 이래서 살을 빼야겠다고 신경을 쓰면 “야! 당신이 살이 찌니 당신이 더 많아져서 나는 더 행복한데.” 하며 나를 웃긴다.

그는 나의 불편하고 아픈 마음의 상처를 말 한 마디로 어루만져주고 치료하여 준다. 어려서부터 사내아이 같다고 꾸중듣고, 공부 안 한다고 꾸중듣고, 집에 못 붙어 있는 다고 꾸중듣던 나를, 남편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잘하는 것을 칭찬해 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해서 도대체 내가 무엇이 좋으냐고 물으면, 내가 앞 서 남편자랑 한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야말로 항상 나의 장점만을 찾아 칭찬해 주고, 내가 어떤 잘못을 하건 사랑으로 위로하며, 조그마한 것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 하니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쩌다 우리가 다툼을 할 때는, 상대방이 어떤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가 아니고 서로가 의견의 차이가 날 때인데, 이럴 때에도 서로가 가능하면 자기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려 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주면서 끝을 맺는다.

 이것이 우리를 지금까지 사랑으로 지켜준 중요한 비결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서로 마음의 노력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사랑도 계속해서 영양 공급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영양 부족으로 병을 앓게 되기 때문이다.


"이젠 편안한 고향 나들이 기대"...

오늘 나는 그 옛날 내가 원하던 바대로 훨훨 날아와서 날개를 쭉 펴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런데도 휘영청 달 밝은 밤의 첫 입맞춤, 논에 노랗게 익어있던 벼, 그 사이로 난 논두렁 길이 그립다.

나는 자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부엌에 선 채로 전날 먹다 남은 찬 눌은밥을 솥에서 긁어 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며칠동안 밥 구경 못한 사람이라야 나처럼 먹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좀 미련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도대체 배가 고프지도 않으면서 밥과 김치를 먹어대는 건 왜일까?

나는 풍요한 이 나라에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불만이나 시간의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 밥과 김치를 먹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보육원에서 일하던 시절, 하루는 어느 학부모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는데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금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지요!" 하고 내 대신 합창을 했다.
 
아직도 김치·밥에 집착하는 나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밥과 김치만은 아니다. 나는 독일 음식을 별로 즐겨 먹지는 않지만 더러는 맛있게 먹는 음식도 있다. 포솔포솔하게 삶은 감자, 싱싱하고 향기로운 아스파라거스, 향초가 섞인 쿼크 등은 뒷맛이 깨끗하고 먹은 후 속도 편해서 즐겨 먹는다. 스파게티, 피자 같은 이태리 음식도 좋아한다.

어느 때는 이런 음식들이 먹고 싶어 시장에서 잔뜩 재료를 사들고 오지만, 짐을 풀기 전에 어느새 또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있다. 심지어 때로 위가 아파서 자극이 강한 음식은 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김치를 상상하면 위통을 잊고 저절로 밥을 하게 된다.

며칠 전에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둔 감자, 아스파라거스, 쿼크 등이 '언제나 먹어주나'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나는 또 밥을 해서 김치와 먹고 있다. 이번 김치에는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더니 맛도 훨씬 좋을 뿐 아니라 씹는 소리까지 '사각사각'들려 천하 일미다.

나의 김치 씹는 소리를 들으면서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어느 날 서양음식으로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바닥에 철퍼덕 앉아 찬밥은 솥 채로, 김치는 통 채로 정신없이 먹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남편 한마디. "당신이 밥과 김치를 먹는 것을 보면, 밥과 김치 자체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향 한 조각을 먹는 듯 해."

남편의 말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내가 좋아서 떠나온 고향이었지만 아이러닉하게도 나는 그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밥과 김치를 먹고 있는 내 모습에 그 그리움이 베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는 "내가 한국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내 삶은 불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만약'을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은 없겠지만, 나는 내 지난 시절을 열등감에 휩싸여 살았던 불행한 시절로 그늘에 가려두지 않고 내 인생 전체에 있어서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감히 그런 우를 범하려 한다.

만일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도 난 내가 태어난 가정 외에도 사회경험을 했을 것이다.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또 취직을 했을 수도 있겠다. 난 거기서 누구나 그렇듯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이고, 또 내게 영향을 줄 많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테고 나름대로 만족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물론 구체적인 갈등의 정도나 만족스런 상태에 이르는 과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본 바에 의하면, 나에게 그 정도의 믿음은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 열등감' 털어놓으니 시원
 
둘째는 이 글이 내게 '고해성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또 그 종교제도가 가진 맹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악용된 예도 모르지는 않지만, 고해성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을 덜기 위해 고안된 훌륭한 장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동안 내 안에 고향 생각과 더불어 존재하면서 고향을 불편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 했던 나의 젊은 시절 열등감을 고백한 것이다.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자유로워지듯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열등감을 인정하고 동시에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음 번 고향 나들이를 기대해 본다. 내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은 이제 나의 모국, 그리운 고향의 의미로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사진> 내 결혼식에서 보육원 아이들이 꽃과 쌀을 던지며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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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

조국남(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보면 거의가 남자라 짐작을 해서 그런지 나는 가끔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 공관에서 보내오는 우편물의 수신인 난에는 아주머니(Frau) 대신 아저씨(Herr)란 호칭이 딸려 온다.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글이름자가 풍기는 울림이나 뜻에 서투른 독일사람들이야 어떠하랴.

이곳 독일 관청에서도 일반적으로 외국인의 이름에서 남녀의 성구별이 어려우면 우선은 남자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남성중심시대의 산물로, 아니면 현시대의 산 증거로 봐야 할까?

자녀들은 자라면서 대개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만큼 그 기대에 상응하는 자녀노릇을 하기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얼마만큼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독일에 와서 산 지 삼십여 년이 지났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독일에 온 것도 내 이름과 관련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방울처럼 울리는, 단정하고 가냘프고 우아한 여성적인 이름이 내게 지어졌다면 나는 혹시 다른 삶을 꾸려갔을까?

'날아오르는 원앙' 태몽 뒤 탄생
 
무엇 때문에 나에게 사내이름을 지어 주셨냐고 언젠가 한 번 여쭤보니 어머니는 내 이름을 지을 때의 기억마저 어두우셨다. 내 짐작으로 부모님은 남동생을 보라고 나와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일부러 남자의 이름까지 지어 주셨으나 내 아래로도 계속 딸을 보셨으니 내 이름은 그저 소원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 막내가 아들이어서 내 여동생 순남이와 나는 우리 이름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이름에 얽힌 일을 하나 더 말해보자면, 내가 어릴 적엔 라디오조차 귀했다. 여름날 저녁이면 이웃집에서 우리 동네에 하나 뿐인 라디오를 확성기에 연결시켜 길가에 내 놓아서 온 동네사람들이 들마루에 둘러앉아 일일연속극이나 중계방송을 귀담아 듣곤 했었다.

그 때 한국남 박사가(진짜 박사였다) 진행한 퀴즈방송이 한 동안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그 분 이름 덕분에 내가 종종 조국남 박사로 불리는 대우를 받았으니 남동생을 하나밖에 보지 못한 명분을 한 동안 그 '동명이인' 박사로 세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이다. 이야기 중에 "니는 남자로 태어나야 했었는데..." 하신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식 여럿을 낳아 키웠으나 태몽은 니 오래비 둘과 니를 뱄을 때 그렇게 꼭 세 번 꾸었다. 그래서 니가 사내아이로 태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었지. 니한테 태몽이야기 안 해 주었더나?"

"아니요, 처음 듣는데요."

"내가 저 넓은 들판에 나가서 연을 날리고 있었단다. 연줄 끝에는 원앙새 한 쌍이 달려 있었는데 얼레를 돌려가며 풀고 또 풀어도 연줄이 한없이 풀려나가 원앙새들이 하늘 꼭대기로 가마득히 날아오르는 꿈이었단다. 그래서 니 평생 니가 그렇게 비행기를 많이 타는 모양이다."

내가 비행기를 자주 타야한다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잠긴다. 나는 속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기차로도 갈 수 없는(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먼 독일에서 살고 있음에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다시 독일로 떠나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엄마, 나 독일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염려 마세요. 그리고 그 높이 올라가는 연줄을 잡고 있으면 힘드실 텐데 그만 놓으세요."

"야는, 뭐라카노. 내가 그 연줄을 놓은 지가 언젠데 그카노. 니가 태어났을 때 탯줄 끊으면서 벌써 손에서 다 놨다."

"아니 그렇다면 제가 아직도 그 연줄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예요? 그럼 이제 제가 연줄을 놓을게요." 모녀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름 탓에 툭하면 남자 취급
 
어머니가 내 이름을 지을 무렵의 기억이 어두우신 데는 까닭이 있다. 내 바로 위의 언니가 세 살이 되던 해에 홍역을 치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를 배어 만삭이던 어머니는 넋을 잃고 방안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 저녁 산기가 사르르 돌기 시작하여 밤을 샌 후 새벽녘에 몸을 풀었다고 하셨다.

"윗목에서는 니 형이 죽어나가고 아랫목에서는 니가 태어났으니 니한테 젖 물리면서 아이 잃은 설움 다 삭였더니라. 팔 남매 중에서도 어쩌면 니 때에 젖이 그토록 많았는지
모르겠다."

젖먹이 아기는 품에 안겨서 어머니의 젖을 꿀꺽꿀꺽 잘도 빨았으리라. 덕분에 자라면서 나는 늘 건강했다. 어머니가 삭이는 깊은 슬픔도, 소리를 죽인 통곡도 젖줄을 통해서 꿀떡꿀떡 삼켰으리라.

그래서일까?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어머니가 슬픔에 젖지 않고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젖먹이의 선서'라도 한 듯,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집안 일 도우면서 끊임없이 어머니를 배려하는 착한 딸로 자랐다.
 

'아들노릇' 하려고 독일로 오다...
 
내가 간호고등학교로 진학한 직접적인 동기는 직업을 배워서 직장을 얻게 되면 경제적으로 기울어진 집안을 속히 일으켜 세우는 데 애쓰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진로의 선택이 경제력의 확보 뿐 만 아니라 직업여성으로서, 자주적인 삶을 갈망하는 여성으로서 나의 활동범위를 독일사회로 넓히는데 결정적인 도약대가 되어 주었음은 독일에서 십 수년을 지낸 후에야 깨달았다.

그 길을 택하게된 동기가 자의였건 타의였건 그 때 직업학교로 향한 나의 선택은 내 인생의 한 갈림길에서 "인문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을 나와서 좋은 신랑감을 만나 부자 집으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복 많은 여자"의 길을 가지 않고 "직장 생활을 잘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자기 아내와 경쟁을 하지 않는 남편을 만나서 아들 딸 낳아 가정과 탁아소와 직장을 누비는 팔자가 센 여자"의 길을 가는 선택이었다.

유럽여행이 너무 하고파 지원
 
여기에는 내가 딸이지만 아들만큼 잘 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세워보려는 나의 의지가, 아니 아들보다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다는 경쟁의식이나 나의 욕망이, 또는 부모의 은근한 기대에 맞추어서 인정받고 싶어 '아들노릇'을 하려는 나의 무의식적인 적응, 이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믿는다. 그 길이 한국 땅을 넘어서 독일 땅까지 이어져 있으리라고 그 누가 알았으랴!

김천에서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몇 몇 동기들과 같이 모교병원에 남아서 수술실 책임간호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서울의 국립 중앙의료원에 가서 6개월 간 마취사교육을 수료한 후 마취사의 일까지 겸했다.

그 다음 미래를 대비해서 양호교사 자격증도 땄다. 우리 집의 고정수입은 내 월급뿐이었다. 김천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김천을 떠나고 싶었으나 집안을 도와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계속 머뭇거렸다.

병원 측에서도 이것을 눈치채고 나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나를 붙들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이미 독일로 취업간 선후배들의 소식이 병원으로 날아오곤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계약 3년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이 속속 귀국을 해서 독일 간호사 생활수준에 대해 들을 기회도 있었다.

독일 간호사들은 국제간호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낮은 수준이어서 간호원 경력에 쓸모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유럽으로 여행을 다닌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젊음을 담보로 한 용기가, 새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리고 삼년간이라는 한정된 기간에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유럽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나를 충동했다. 졸업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같이 일하던 후배와 함께 독일로 가자고 결정하고 서울의 해외개발공사를 찾아갔다.

드디어 1970년 10월에 독일로 오게 되었다. 낯선 나라에 와서 우선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지금까지의 나라는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농아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배우지도 않은 수화를 흉내내면서 학교에서 배운 영어실력으로 근무를 했다.

나에게 굳게 닫힌 이 사회의 문을 열려면, 그리고 독일에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고 결심한 후, 기숙사의 독방에서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혼자 외운 단어를 다음 날 병동에 나가서 열심히 사용해 보았다.

한국 사전의 번역과 독일현지의 말뜻이나 용례가 틀려서 서로 오해도 했고, 원망도 많이 했으며,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시간만 나면 같이 배정된 한국동료들끼리 모여 앉아 한국음식을 해먹으며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이질적인 생활문화를 몸에 익히며 소화시키느라 긴장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사이 사이로 '낯익은 모습', '귀에 익은 말', '습관 된 익숙함'으로 향한 그리움이 애타게 파고들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아! 이게 바로 그 향수병이라는 게로구나.

향수병을 극복하니 힘 절로 솟아
 
그러면서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렸다. 몇 날이 지났다. 몇 달을 채웠다. 그러다 어느 날 돌연히 깨달았다. 그렇게 낯설었던 분위기에 어느 새 내가 한결 익숙해져 있음을. 내 긴장감의 태엽도 다소 느슨해져 있음을.

독일말에 귀가 밝아오고 입도 점차로 트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해방된 자유를 맛보기 시작했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찾기 시작했다. 나의 길이 독일로 연결되어 있었는가 보다란 생각을 했고, 젊은 나에게는 독일을 발판으로 해서 온 세계가 나를 위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고,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젊은 독일 동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수영을 배우고,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또 자동차운전도 배웠다. 힘이 저절로
났다. 마치 날개가 돋친 것 같았다.


결국 '뿌리가 끊어진 병' 걸리고...
 
제비뽑기 식으로 배정되었던 성 마리아 병원에서 3년간의 의무고용계약이 끝나자마자, 1973년 말 나는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내가 선택한 대도시로, 내가 선택한 직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수녀들 밑에서 시키는 일만 하다가 베를린대학병원에 와서는 팀 안에서 공동작업을 했다. 노조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장벽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무한한 자유의 도시였다.

"언니야, 우리가 드디어 대학졸업하고 취직도 했으니 이제 언니가 공부할 차례야. 우리가 학비 도와줄게." 대학을 졸업한 여동생들이 제안을 해왔다. 마음이 뿌듯했다. 그 때까지 매달 집으로 보내던 송금을 중단했다. 근무시간을 줄인 후 베를린 콜렉(Berlin Kolleg, 대학수업을 위한 준비과정)의 야간부에 입학하여 낮에는 시간제로 근무하는 간호사로 저녁에는 학생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베를린콜렉'서 여성해방운동 심취
 
좌익 성향의 진보적인 교사들과 학교분위기, 수업방식에서 나는 3년 내내 자유로운 베를린 콜렉의 공기를 마셔가며 점차 자의식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익혔다. 유엔에서 '여성의 해'로 선포한 1975년을 전후로 곳곳에서 물결치던 '여성해방운동'은 여러 학과의 주제로 선택되어 우리는 수업시간이나 휴식시간이나 자나깨나 '여성운동의 이론과 현실', '제3세계 여성운동'을 토론하며 흥분했고, 변화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함께 휘말렸다.

지금까지 못 다한 일을 소급하여 단숨에 만회하려는 듯 그렇게 숨막히는 속도로, 그것도 모자라 몇 곱의 일과를 한꺼번에 해가면서 뱅뱅 도는 듯 살았다니! 여기서 이제 잠시 숨을 좀 돌려야 하겠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에게 현기증이 날 정도다.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더군다나 나는 만삭의 몸으로 졸업시험까지 치른 후 1977년 5월에 사내아이를 분만하였다. 어미가 그러했으니 하물며 뱃속의 태아는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아무튼 내가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는 아이가 태어난 후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뺑뺑이판에 화살이 꽂혔다. 모든 게 일단정지 된 비상상태에서 아기의 건강회복에만 전념하며 기다려야했다.

아기가 건강해지자 이제는 내가 앓기 시작했다. 갑상선기능 항진증이었다. 갑상선호르몬이 과잉 분비되어 신진대사의 속도가 몇 곱으로 올라가 생기는 증상이다. 약물치료가 효험이 없을 뿐더러 기능검사수치는 감당을 할 수 없게 올라갔다.

내 몸 속에서도 드디어 난리가 난 것이다. 내 몸의 진동수가 엄청나게 높아지니 몸과 마음의 울림이 서로 어긋나버려 각각 제 마음대로 다른 궤도에서 돌고 있었다. 유원지에서 '비엔나 왈츠'라는 놀이기구를 타 본적이 있는가?

주치의사가 어느 날 나를 불렀다. 더 이상의 약물치료는 아직 젊은 나이에 위험하니 수술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한국사람에게는 아주 드문 병인데다 검사수치마저 그렇게 날뛰고 있으니! 당황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의 병은 아무래도 '뿌리가 끊어진 병'(Entwurzelungskrankheit=실향민의 병)인 듯 합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 말은 불화살처럼 내 가슴에 와서 명중을 했다. 그랬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 하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여성들의 모임에 발을 디딘 곳도 역시 베를린인데, 1977년 가을에 '서로 돕는 여성회'에서 '국제결혼'을 주제로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부터이다. 그 곳에서 나는 오늘날까지 내 독일생활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는 절친한 한국여성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미나가 열리던 주말에는 남편에게 젖먹이를 맡기고 오랜만에 한국여성들끼리 한국말만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독일학교 친구들과 독일말로 토론한 내용을 한국여성들과 한국말로 토론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여성들과 한국적인 분위기에서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나에게 깊은 만족을 주었다. 내가 독일에서 낯선 세계와 친숙해지는 사이에, 낯익고 친숙한 한국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낯설어져가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상실감이 절망으로 나를 몰아갔다. 내가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속 내 고향은 어딜까?
 
이듬해에는 내가 근무하는 베를린대학병원 앞에서 열린 '한국 간호원 강제송환 반대'를 위해 서명을 받는 운동에 나도 참가했다. 그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78년 9월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조직체가 결성되었다. 그 참여과정에서 나는 이 독일사회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모임을 통해 나는 나와 공통된 경험과 문제를 안고 있는 여성 동지들이 만나는 곳,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무엇보다도 우선 나의 정서적인 갈증을 해소해주는 샘터를 찾은 셈이다.

조직생활을 통해 나는 자신의 위치를 한국과 독일의 구조 속에서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여성모임의 회원들과 뭉쳐서 여성의 지위향상과 권익옹호를 위해 뛰어 다니면서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양시키고 발전시켰다. 나는 여성모임에 기대기도 하고 비벼대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짜증도 냈다. 그러면서 나를 배워갔다. 나는 여성모임이란 평균대 위에서 연습을 하면서 독일생활에서의 평형을 찾아갔다.
 
"한국·독일 어디가 더 마음에 드나요?"
 
"한국하고 독일 둘 중에서 어디가 더 마음에 드나요?" 독일에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주 물어 온다. 간단하게 들리는 질문이지만 내가 독일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따라서, 내가 어느 길목쯤에 와 있는가에 따라서 대답하기가 복잡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

독일사회에서 한국계 이주민 여성인 나의 생활은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신적 씨름의 삶이기 때문이다. 비교하기 어려운 두 세계를 두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잣대로 저울질하다니! 그 얄팍함이 야속하게도 들린다.

그렇지만 독일에서 '친절하기로 알려진' 한국여성의 품위는 잃지 않는다. 내가 그럴 때를 위해서 대비한 '예의바르고 공손한' 한국여성의 대답중의 하나가 바로 "고향은 고향이지요"이다. 이렇게 답하면 물어 온 대부분이 표정과 몸짓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한다. 그리고 더 깊이 파고 묻지도 않는다. 내 대답을 이해한다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들의 고향이란 어떤 것일까 오히려 궁금해진다.

나에게는 무엇이 고향일까? 먼 지난 날 아버지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하고 나서면 그 고향은 일가 친척들이 모여 사는 '산골'이었다. 아버지는 기제사, 봉제사가 드는 날은 빠짐없이 완행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골로 걸어서 드나드셨다.

아버지의 다른 형제분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지내셨으나, 우리 아버지만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반세기가 넘게 객지에서 보내셨다. 내가 태어난 정든 고향 김천은 아버지에게 늘 타향이었으니 산골로 향한, 조상의 넋을 찾아가는 귀향 길에서 아버지도 나처럼 고향에 대한 생각을 하셨을까?

이제 그 분의 자녀 팔 남매 중에서 내가 혼자서 젊은 나이에 한국을 떠나와 삼십 년이 넘게 독일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가 고향 길 드나드시듯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한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김천?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나서면 우리 아이들은 내가 한국으로 갈 것이라 생각할까? 우리 아이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더구나 우리는 이사를 자주 다니지 않았는가?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베를린, 경상북도 김천, 칼스루에, 충청남도 예산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바트 메르켄트하임이다. 이제 아이들은 성장하여 집을 떠나 독립해 살고 있다. 여러 주거지 중에서 제일 오래 살은 이 소도시 동네가 그들의 정든 '고향'이다.

아이들이 고향이라고 찾아오는 이 동네에는 우리 집이 있고, 내가 주변의 지리에 익숙하고, 내 일터가 있고 또 우리가 잘 아는 이웃들이 있다. 그래도 독일 땅은 늘 소외감이 드는 타향이다.

그런데 내가 고향이라고 찾아가는 한국 땅은 또 왜 그렇게 낯이 설까?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변화에 의해 나는 고향 땅에서 서툴기 짝이 없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한국은 늘 소외감이 드는 고향이다.
 
"두 세계 모두 내 안에 있답니다"
 
독일의 우리 집 근처에는 넓은 들판이 있다. 이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면 자꾸 김천에 있던 옛날 집 근처의 들판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들판은 지금 주택지와 고속도로에 밀려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이곳 우리 집 앞의 들판을 질러 밀밭과 보리밭사이를 걷노라면 내가 어린 시절에 논둑과 밭둑사이로 뛰어다니던 바로 그 들판과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한 울림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 그 길을 걷고 있다.

모든 생물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이십여 년 간 자란 곳이 있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을 떠나와 삼십여 년 간 산 곳이 있다. 나는 이 두 세계에 다 속하면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 속한다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두 세계가 이미 모두 내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음의 분열이 없이 이 두 세계의 울림을 분간할 수 있을 듯하다. 이제 내가 진정한 자주적인 삶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고 있나 보다.


 <사진> 98년 여성모임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뒷쪽 오른쪽서 세번째가 필자.



손님 노동자'와 방문간호센터
 
복지국가인 독일의 사회복지제도를 살펴보면 다섯 분야에 해당하는 의무보험제도가 핵심이다. 즉 연금·의료·실업·산재 보험과 1995년부터 실시된 간병보험이 사회복지를 떠받드는 기둥들이다. 그 중 최근 실시된 간병보험은 노쇠, 질환, 정신박약 또는 신체장애에 의하여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데 도움이 필요하거나 혹은 전문적 간호나 조치가 필요할 경우에 지원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험제도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방문간호센터(Sozialstation)는 전문간호요원이 도움이 필요한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 출장간호와 자가치료를 해 주는 기관이다. 이런 기관이 있기 때문에 노약자들이나 홀로 사는 노인들이 노년에도 가능한 장기간 자택에서 지낼 수 있어 양로원의 생활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환자들은 병원치료를 피하거나 병원체류기간을 줄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방문간호센터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직원은 20여명이다. 이 지역의 사방 팔방에서 요청하는 약 1백40명의 노인과 환자들에게 신뢰성이 있고 전문적인 간호와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조직하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 방문간호센터의 일반사무관리와 직원관리 그리고 가정간호상담이 나의 주요과제이다.
 
'경영 간호'라... 장사꾼 되라고?
 

간병보험이 실시되면서 간호에 대한 인식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박애를 기반으로 전인간을 앞세웠던 간호의 개념이 경제성을 앞세운 경영학적 간호개념에 의해 밀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 독일의 의료정책은 '인간적이고 전문적이면서 현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경제적인 새로운 간호기술'을 모든 간호요원들에게 요구한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위기관리 연수에서는, 환자들이 이제는 환자이기 전에 기업의 수지결산을 좌우하는 고객임을 주입시킨다. 간호요원들더러 장사꾼이 되라는 소리다.

간호학교 교육과정에서 경영학을 배우지 않은 간호사들은 이것을 이해하거나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 요즈음은 이 직업을 등지는 간호전문요원이 점점 더 늘어난다. 또 하나의 악순환이다.

따라서 나는 직원들이 어떻게 하면 좌절하지 않고 이 상황에 적합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전문간호기술을 계속 연마하여 환자와 간호사가 동시에 만족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며 고심한다. 이 길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인간사회를 만드는 길이기에 나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난민(bootspeople)이세요?" 어느 날 내가 일하는 방문간호센터의 사무실을 찾아온 한 중년부인이 나를 보고 묻는다. 가정간호에 대한 상담을 하러 나를 찾아 온 사람이 자기의 용건보다 소장이라고 소개하는 한 아시아 여성의 정체가 더 궁금한 모양이다.

"아닙니다. 나는 간호전문직 여성으로 독일에 와서 일한 지 삼십 년이 넘습니다." 저 부인의 눈을 가리는 타민족에 대한 선입관은 어떻게 하면 한 겹이나마 벗겨질까? 일반 독일사람들은 60년대 중반과 70년대에 간호요원이 부족해서 독일의 많은 의료기관들이 폐업직전이던 위기상태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 당시 외국에서 불러들인 간호인력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그 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간호인력부족은 오늘날 독일의 간호의료계에 비상사태를 초래하고 있지 않는가?

독일이 경제정책의 필요에 따라 외국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인 것은 간호인력이 들어오기 훨씬 전이다. 1955년 독일은 이탈리아와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에서 집단적으로 노동력을 수입해 오기 시작, 스페인과 그리스(1960년), 터키(1961년), 모로코(1963년), 한국(1963년 광부, 1965년 간호사), 포르투갈(1964년), 튀니지(1965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1968년)에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다.
 
'독일 산업전선 노병'은 영원하다
 
그러면서 이전에 사용되던 '외국인노동자(Fremdarbeiter)'라는 말은 이 시기에 와서는 '손님노동자(Gastarbeiter)'로 바뀌었다. "당신들은 예전처럼 외국인 머슴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손님 같은 일꾼들이오"라는 일견 호의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그러나 당신들은 손님인 만큼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당신 나라로 돌아 가야한다"는 의미도 부여하고 있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젊든 일꾼들은 이제 고령의 이주민이 되었다. 그들, '독일 산업전선의 노병들'이 없었더라면 '라인강의 기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일사회는 "노동자를 불렀더니 사람이 왔네!"라는 정책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주민들의 정착이나 노후에 관한 무관심은 1995년에 실시된 간병보험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간병보험의 자료통계수치나 방문간호제도의 기본정책에서 노령화에 따른 인구수의 변화를 측정할 때, 독일국적이 아닌 상당수에 해당하는 타민족의 노인 숫자가 현실에 맞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러 문화권에서 온 이주민 노인환자들의 복합적이며 다각적인 현 생활조건도 간과되게 마련이다.

나는 한 의료기관의 책임자로서 일상에서 이주민들이 타당한 의료지원과 혜택을 받도록 특별히 유의한다. 이것은 내가 이주민 여성으로서 독일에 살고있는 이주민들의 지위향상과 권익옹호를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지난 7월 독일 의료정책에 대한 반대시위에 나선 방문간호센터 직원들과 나 (왼쪽에서 두번째, 키 큰 남자 구경꾼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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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독일에서 나의 삶은 올해 33년째가 된다. 그리고 독일국적을 취득한 지도 22년이 되어, 독일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나는 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한국인이 되고, 또 독일인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보면, 매우 복잡하며 애매한데, 문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의 행동양식을 은연중에 요구한 것에도 큰 몫이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문화로의 적응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동양 여성의 수동적 이미지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이 모순된 요구는 이중문화권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마주하는 공통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 자신과의 갈등을 자주 겪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을 말하기보다는 항상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독일인들도 내가 거주하는 곳을 묻기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먼저 묻는다. 그래서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독일에서 살아도 나는 이방인이다.

예방접종에 덜덜 떨었던 여중생
 
인간은 누구에게나 정체성 즉,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의식하고 산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5살이었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전쟁의 큰 피해를 경험하지 않았으나, 밤에 총소리가 크게 들려와 두려움에 움츠리고 잔 기억과, 낮에는 동네 아이들과 미군부대 주변을 돌아다니며 초콜릿이나 코코아가루를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심술궂은 미군들이 납작한 튜브를 던져 주었는데, 우리는 집으로 가져가서 낱낱이 뜯어 싹싹 핥아먹었다. 박하 맛과 약간 달콤한 맛이었는데 훗날 그것이 치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의 일을 나는 첫 아이 출산 후 체중이 늘어 몇 년 동안 다이어트로 고생을 하고 있었을 때 종종 회상하곤 했다.

6.25 전쟁 때 나는 단백질 부족으로 물이 차서 앞으로 툭 튀어나온 배로 기우뚱거리며 집 대문 문턱을 겨우 넘어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아버님이 매일 마을앞 개울에 나가셔서 개구리를 잡아 구어 주셔 맛있게 먹었던 일도 회상하곤 했다. 아버님은 내가 어린 딸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갑자기 뚱보가 된 나를 보시고 매우 흐뭇해 하셨다고 한다.

나의 아버님은 1898년, 이조말엽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진사를 지내셨고, 밀양산외면 지역에 넓은 땅을 가지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서당에서 아버지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고 계실 때 한일합방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평생 한문만 읽고 쓰시다가 세상을 떠난 분이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외웠다. 아버님은 매일 저녁 동네 청년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고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기 때문에, 사랑방에는 언제나 서당학생들로 가득했다.

초등학생이 된 이후에도 나는 그 자리에 끼일 수가 없었다. 아버님은 유교사상이 몸에 배이신 분이라, "남녀칠세부동석"이라시며 동네 청년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반대로 어머님은 막내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라셨는데, 시집오신 후 시부모님과 남편을 모셔야만 했고,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문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한번도 다리를 쭉 펴고 주무신 일이 없었다 하신다.

어머님은 집에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었으나, 일꾼 삯과 우리의 교육비를 지불하고 나면, 보리가 익기 전에 쌀독바닥이 훤히 보였던 해도 있었다.

나는 도보로 8km 떨어진 밀양여자중학교를 다녔는데, 종종 학교에서 보리밥 도시락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점심을 굶을 때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양지쪽에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교실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때 찔끔찔끔 눈물을 흘린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니 보리밥과 열무김치는 일류 메뉴였는데도 말이다.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은 친구들은 부산이나 대구의 일류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과외를 받고 있었지만, 우리 집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많이 울었던 일이다.

"간호부 안 맞으니 시집이나 가라"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도움의 말씀을 주셨다. "네가 진학을 못하고 집에 있는 것은 네 머리가 아까우니 학비가 없는 간호고등학교에 원서를 한번 내 보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교생이 예방 접종을 받았던 날의 기억이 났다. 나는 뒷줄에 서서 겁이나 덜덜 떨었고, 내 차례가 왔을 때는 가슴이 덜컹했던 기억이 나자, 간호사직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그 날 저녁 아버님 방으로 내려가 간호학교를 지원할 의사를 말씀드렸더니, 아버님은 당장 "간호부 직업은 너에게 적합하지 않으니, 집에서 가사일이나 돕고 글공부(한문)나 배우고 있다가 좋은데 출가나 하라"고 하셨다.

나는 윗방으로 올라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간호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가끔 중학교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때 담임이셨던 신준성 선생님이 떠오르고 한번 뵙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사진> 독일에 가기 전 간호학교 학생시절 찍은 사진. 사진 오른쪽이 필자.


"미스 안 이러지 말고 외국으로 떠나요"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밀양보건소에서 일을 하고 있던 66년 2월, 동료들 사이에 '파독간호원 모집'이란 신문광고가 가장 큰 화제였다.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엄 간호사는 30대 후반의 서울출신인 기혼녀였는데 상당히 멋진 분이셨다.

그날부터 그분의 아침인사는 "미스 안 이런 곳에 있지 말고 외국으로 떠나요. 당신같이 젊은 나이에 무엇이 걸려서 못 떠나요?" 이었다. 그녀는 가정에 매여 있지 않은 나의 젊음을 항상 부러워했다. 내가 독일행을 결정하고 서울에 다녀오니, 그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나는 영결식에 참여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고국을 떠난 오랜 날까지 나의 가슴에 맺혀 잊혀지지 않았다.

66년 10월 15일, 나는 독일에 도착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하노버에서 80km떨어진 베르덴이란 조그만 시였는데, 그곳으로 한국간호사 4명이 함께 왔다. 그 날 오후 6시 하노버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베르덴 시립병원 간호원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동료 간호사 권장에 독일행
 
독일 북쪽인 이곳은 산이 없고 큰 숲들이 많은 지역이다. 그 날 저녁, 차가 끝없이 어두운 숲 속을 달리고 있을 때, 나에게는 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숲 속 아니면 촌구석으로 데려가 어떤 일을 시키려 하는가 하는 공포심과 좌절감마저 들었다.

이런 우리들을 한번씩 뒤돌아보며 던져 주던 간호원장의 미소도 나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있는 병원은 병동마다 수녀들이 수간원직을 맡고 있었는데, 간호사들에게 권위적인 태도가 심했다.

내가 해도 좋은 일에 한계를 지웠고, 언어소통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 투약도 허락하지 않았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한국간호사들은 한방에 모여 서로의 체험담을 나누었는데, 낮선 이곳 사람들의 흉내도 내고, 한계가 있는 우리의 업무에 대해 불평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처음 내가 배치된 병동은 외과의 남자병동이었다. 나의 일은, 거동할 수 없거나 거동이 금지된 환자들을 씻기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자 환자들의 웃옷을 벗기고 몸을 닦는 일은 당시 나에게 무척 쑥스러운 일이라, 가능하면 다른 일을 맡아서 했다.

어느 날 아침, 교통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한 새 환자가 입원했는데, 키가 너무 커서 발쪽 침대칸막이를 떼어 내고 두 다리를 밖으로 쑥 내놓고 있었다. 세수를 시키려고 물을 떠놓고 침대 옆에 서서 한참 그 환자를 살피다가 용기를 내어 도대체 키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은 키가 몇 km나 되나요?" 환자는 싱긋 웃으며 나를 한참 보더니, "자동차로 가면 한 5분쯤 걸립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병실의 모든 환자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 환자의 엉뚱한 대답에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당황하여 병실을 나와 수간호원 방으로 달려가, 남자병동에서 일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니 여자 병동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래서 내과 여자병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나는 언어소통이 어려워 언제나 긴장된 생활이었고, 혹시 한국간호사 이미지를 손상시킬까 하는 지나친 걱정도 많이 했었다. 병실에는 비만증으로 인한 신장병, 당뇨, 뇌졸중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은 60년대 경제의 부흥기를 만나, 먹는 것에서 큰 즐거움을 찾았다. 시내에 쇼핑 나가서 뚱보 독일인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작은 도시에 동양인이 없었음으로, 독일인들도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들은 서로 사람구경을 한 셈이다. 체격이 크고 비대한 환자들을 침상에서 씻기는 일은 너무나 힘이 들었고, 여자 환자들은 전신목욕을 시켜야 했었다. 가끔 환자 다리를 내 왼쪽 어깨에 얹고 닦기도 했는데, 이런 나를 보고 독일 간호사들은 배를 쥐고 웃었다.

그래서 아침 침상정리까지 끝내고 나면 왼쪽 어깨는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한국간호사들은 환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독일간호사들과 종종 갈등을 겪어야 했다. 독일 간호사의 일반교육수준은 한국에 비해 훨씬 낮았다.

내가 있었던 시립병원에는 중학교를 졸업한 간호사가 드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직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고, 매우 성실했다. 처음에 나는 천천히 걷고 병실 일을 빨리 처리 못한다고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일이 너무 힘들 때는 직원화장실에서 잠깐 앉아 쉬거나, 집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울기도 했다. 화장실은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힘들 땐 화장실서 쉬거나 울어
 
파독 2주일째의 휴일이었다. 아침 일찍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안 간호사 빨리 병동으로 좀 내려와요." 독일인들은 이빨이 좋지 않아 젊은 나이에 틀니를 한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단 음식을 많이 먹고 생식을 거의 하지 않는 데서 온다. 틀니는 잠자기 전에 빼서 물에 담아 두는데, 중환자의 경우 간호사들이 그 일을 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틀니를 본적도 만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이일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는 일보다 더 내 비위에 거슬렸다. 나는 빨리 병실 일을 끝내기 위해, 4명의 환자들의 틀니를 큰 통에 넣어 배설물 처리실에 갖다 놓았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당번이 이것을 발견하고 소동이 난 것이었다.

근무를 나온 간호사들 중에는 내게 화를 내는 이도 있었고, 눈짓을 해가며 뒤에서 킬킬대며 웃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잘못했다는 말만하고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환자들이 자기 틀니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일은 뒷날까지도 웃음을 자아내는 화제가 되었다.



<사진> 필자가 근무하는 레이저과 수술실


여성의 지위·권리에 눈뜨고 보니...
 
어느 날 오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를린에 여성모임이 있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는데 함께 한번 가보자는 권유였다. 친구의 말로는 여성모임은 커피나 마시면서 잡담하는 곳이 아니며, 정치운동,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로 아무나 쉽게 가입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와 한번 가서 눈치를 보자는 약속을 했다. 첫날 느낀 분위기가 나의 취향에 맞아 지금까지 회원으로서 몸담고 있다. 내가 여성모임에 가입했을 때, 구성원은 거의
간호사였고, 조직의 기반이 단단하였으며 그 기능이 활발했다.

한국의 70년대는 공업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여성노동자의 권리가 형편없이 탄압되고 있었다. 재독한국여성모임은 한국여성노동자의 작업시간 및 작업시설 개선과 임금인상 그리고 노동조합 합법화를 위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운동에 연대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뒤이어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재독한국여성모임은 국내, 해외 민주화운동단체와 연대하여 시위운동, 공개행사, 서명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을 통하여 독일사회에 이 문제를 알렸고, 또 한국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독일정부기관에게 협력을 요구하며 우리의 작은 투쟁을 벌려 왔다.
 
재독한국여성모임서 '역사 안목' 가져
 
나는 여성모임에서 정기적인 세미나를 통해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제3세계 여성들의 운동, 2세 교육문제 등 함께 배우고 토론할 많은 기회를 가졌다.

나에게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위치에 대한 의식이 단단히 다져진 해는 86년이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기생관광' 실태조사 보고서와 여성의 전화에서 발표한 공개토론 보고서 '인신매매와 매춘여성'을 내 손에 들은 때다.

박정희 정권이 조국 근대화와 외화획득을 위해 관광산업을 국가의 3차 산업으로 정했을 때,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특혜로 매춘관광이 등장하게 되었고, 관광사업은 주로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79년 관광수입이 3억2천6백만 불이나 되었다.

그 당시 독일신문에서도 이것에 관한 기사를 읽을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귀한 딸들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은 여성을 모독하는, 아니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때 나에게 주어진 첫 과제가 여성권익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 베를린 지역모임은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기생관광'을 테마로 세미나를 가졌다. 뒤를 이어 88년, 일본 여류 미술가 타에코 토미야마(Taeko Tomiyama) 여사가 베를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 그림전시회와 슬라이드를 일본여성회와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것을 계기로 우리는 일본 여성회와 10년 동안 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고, 도쿄 '2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과 2001년 덴마크에서 열린 국제법정에도 참석을 했다.

나는 지난 3월 8일 '세계의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하면서 독일에 있는 여러 여성단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이란에서 망명을 온 여성들이 모인 단체였다. 79년 국왕 팔레비 정책에 반대운동을 하던 남편이 감옥에 있거나 또 가족을 등지고 이곳으로 온 여성들이다. 이곳 독일에 온 후 남편이 사형을 받은 여성도 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 못한 정권아래 여성들은 이중적으로 탄압되는가 하면, 여성들의 활동이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다처 가부장제도가 인정되고 있는 나라에서 여성권익 주장을 하다 몰매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그들과의 만남에서 들었을 때, 또 다른 사회구조 속에서 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

나는 비민주적인 한국 정권과 유교사상 아래 끝없이 억압당하다가 외화획득을 위한 인력으로 이곳에 왔다. 그 당시 독일에서는 간호사 부족으로 병원경영에 위협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과제인 독일인의 건강을 위해 성실히 직무를 수행한, 당당한 이 사회의 일원이다.

기생관광·위안부 문제 팔걷어 붙여
 
통독 13년을 맞이한 지금, 독일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 시대의 부정적인 사회 흐름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볼 수 있었다.

독일에는 정치적 극우파들이 늘어났고, 지방의회 중에는 극우파 당원들이 의원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곳의 소수민족, 즉 이주민과 피난민 그리고 망명자들은 직간접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에 당면해 있는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이 사회에서 우리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또한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민주주의 국가인 독일에서 살았고, 또 이곳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자세에 대한 것도 내 몸에 담게 되었다.

또한 내가 독일문화권에 살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점은, 내가 설 수 있는 자리, 즉 나의 삶은 나의 인생관에 맞게 꾸려 나갈 수 있는 사회라는 것, '나'란 개인의 영역이 분명하고 침해를 받지 않는 것 등이다.

내가 어떤 옷차림으로 다니던, 혼자 영화관이나 전시회를, 산보나 또는 여행을 가던, 언제나 마음이 자유로운 것이 이 사회의 기본 성격이다. 그래서 독일에서 문학가나 음악가가 많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다.

어느 사회에서나 이주민에게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사회의 일원으로 나의 몫을 하면서 살았고 또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한국인 혹은 독일인이라는 개념을 떠나 한 우주인으로 살면서, 독일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한 사회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 사회 속에서 나는 무엇에 기여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가지게 된다.



<사진> '공장의 불빛' 연극 공연중인 베를린 지역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들


피눈물나는 삶, 인연·용기...
 
【독일】나는 독일에 온 1966년부터 계속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한국 유학생과 인연을 맺어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고,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에 임신 중에도 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아빠가 대학과정을 끝낸 후 우리는 헤어졌고, 당시 큰애가 8살, 작은애가 겨우 첫돌을 지났다. 몇 년 동안 홀로 어린 남매를 키우며 보낸 생활은 피눈물이 얽힌 나의 삶이었다.

새벽부터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맡기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서 직장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많이도 울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지워 버리질 못해 가슴에 항상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지금 나와 함께 삶을 나누고 있는 독일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분은 나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한 여성으로서, 이주민으로서 이 사회에서 권리를 찾는 의식화에 많은 힘을 보태 주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독일에 와 동생들의 학비를 부쳐 주어야 했고,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으니, 젊은 시절 나는 자신을 망각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이 조언에 '아비투어' 입학
 
나는 종종 그에게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때 배움의 한을 더 늦기 전에 풀도록 하라는 그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나는 야간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비투어(대입자격)과정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큰애가 17살 작은애가 10살 되던 해로, 내 나이 이미 45세였다. 그 동안의 아이들 뒷바라지는 그이가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나의 근무시간을 한 달에 열흘로 줄였다. 며칠 후 그이와 함께 학교를 찾아가 입학절차를 밟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던 긴장감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졌다. 이것은 남녀사이의 애정을 뛰어넘는 깊은 이해와 믿음에서 우러난 껴안음이었다.

이곳 야간학교의 아비투어과정은 예능과목이 없을 뿐 주간학교와 같다. 내가 10학년으로 들어갔을 때 6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통독이후 동독에서 고등학교과정 12년을 거친 학생들이 중간에 많이 들어와 1백여명의 학생이 함께 졸업하였다.

야간고등학교의 입학조건은 중학교(10년)과정 후, 최소한 3년 간 직업경력이나 직업학교(3년)를 나온 자에 해당된다. 즉 양노, 건강, 실업 보험 등, 독일의 의무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고등학교 졸업 2년 전, 그러니까 11학년 때 아비투어 시험응시과목을 선정해야 했다.

나는 수학, 화학, 영어와 정치역사를 선택했다. 수학, 화학 반에는 2/3이 남학생들이었으나, 대부분 학생들은 나를 제 또래 학교 친구마냥 수업시간에 이해 못한 점들을 언제나 성의껏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앞쪽에 앉은 19살 남학생이, 어머니 생일이 모레인데 무슨 선물을 하면 좋겠느냐고 급한 맘으로 물어 왔다. 내가 그의 어머니 나이를 물으니, 많이 늙은 여성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어머니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나의 아들이 4, 5살 때 하는 말이, 엄마하고 꼭 결혼을 하고 싶지만 너무 나이가 많아서 싫다는 이야기를 하던 것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나의 학교친구들은 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그저 편하고 믿음직한 친구로 나를 대했다. 가끔은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일들도 함께 해야 했지만, 내 나이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4년 동안 젊은 세대의 학생들과 어울려 카페와 맥주집,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함께
했다. 다음날 근무 때문에 수업이 끝난 뒤 곧장 집으로 가려하는 나를 친구들은 종종 커피숍으로 끌고 갔다.

뒤늦은 학업, 시련과 기쁨
 
테마는 주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었지만,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직장생활을 경험했기에 성숙한 인간관계를 원했고, 함께 수업을 받는다는 공동의식이 있었다.

나는 과목중 독일어의 문학 분야를 좋아했다. 독일어 선생님은 언제나 나의 시험 답안지는 전체적인 내용은 좋으나, 문장구성에서 틀린 점들이 많아 점수를 잘 줄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항상 서술시험지는 반으로 접어 왼쪽엔 답안을 적고, 오른쪽은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틀린 곳을 수정해 주었다. 나의 답안지는 늘 빨간색이었다.

하지만 수업중의 발표 등을 고려하는 구술점수는 좋았다. 그래서 독일어는 겨우 낙제를 면한 셈이다. 학교 졸업 2년 후 우연히 지하철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를 껴안고 반가워했다. 독일어 선생님은 내가 인격적으로 존경한 분이었다. 우리들은 삶 속에서 인연을 맺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재회의 기쁨은 언제나 특별하다.

독일의 여러 단체의 모임에 참석해 보면, 조직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 즉 조직원으로서 의무와 권리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교육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자기의사를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는 학습을 철저히 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시험이 거의 다 주관식이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가 오래고, 모국에도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을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지만, 나는 나의 삶을 사는데, 아니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데, 독일에서 받은 4년의 학교과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도전, 시련 뒤에 느끼는 기쁨이기도 하다.

그 후 나는 2년 동안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현대문학, 그리고 훔볼트 대학에서 한국학을 공부했지만, 직장생활을 계속하던 나에게 시간적 여유가 없어져 일단 중단했다. 퇴직 후 하던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다.



<사진> 풀에 덮힌 이 주택은 베를린 노이쾰른 지역에 있는 필자의 집


된장찌개 좋아하는 그와의 20년
 
내가 하인츠 맥클러씨를 만난 때는 83년 정형외과 수술실 마취과에서 일하고 있을 때이다. 수술실에는 나와 또 한분의 한국인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이는 유달리 우리들에게 관심과 친절을 베풀었다.

당시 나는 애 아빠와 헤어지고 혼자 있을 때로, 내 생활에서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종종 그이에게 문의하거나 도움을 청했다. 예를 들면 추운 겨울날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 도움을 받은 일, 또 그 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혼자서 키우는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얻는 기회를 여러 번 가졌다. 나는 그이와의 대화 중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식과 또 내 마음을 열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어느 날 그이는 나에게 음악 카세트 몇 개를  선물했다. 카세트 음악은 1968년 독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록그룹 '톤 슈타인 쉐르벤'(Ton Steine Scherben)이 불렀던 노래들이다. 그 당시 독일자본주의를 비평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와 독일의 보수적인 가정문제, 보수적인 학교교육 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과격하게 지적하는 노래의 가사는 아주  무정부주의(arnachism)적이었다.

'68세대' 하인츠 맥클러씨 만나고...
 
67년 팔레비 국왕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미국을 지지하는 당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정책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 한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그 후 학생운동은 더 과격하고 넓게 전개되었다.

이 운동이 독일사회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녹색당원들은 '68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날 책을 빌리기 위해 그이 집에 들렀을 때, 그의 방 벽의 반을 차지하는 큰 모택동 사진을 보고 나는 놀랐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과 그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는데. 그는 그냥 싱긋이 웃고만 있었고, 나 역시 그 사진에 대하여 더 묻지도 않았고 몇 권의 책을 빌려 집으로 왔다.

뒷날 '68학생운동' 때 이곳 사람들에게 모택동은 중국혁명을 한 영웅으로 상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모택동은 인간역사에 남은 영웅이라 생각을 한다.

그 후 일 년 동안 나는 그이와 밖에서 만남을 가지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함께 이사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나무와 잡초에 덮여있다. 풀이던 꽃이던 절대로 뽑지 못하게 하는 그이의 의견에 처음 얼마동안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이젠 풀에 덮여있는 우리 집이 퍽 평화롭게만 느껴진다.

집과 정원을 가꾸지 않는다고 참견하던 이웃집 사람들도 이젠 더 간섭을 하지를 않는다. 많은 독일사람들은 정원에 잡풀 한 포기 없도록 매일 가꾼다. 그래서 우리 집을 찾기란 퍽 쉬운 것이 우리 동네에서 나무와 풀에 얽혀있는 집만 찾으면 된다.

내가 사랑하는 그이는 '68학생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베를린 자유대학의 의과대학 학생이었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아 절반은 운동비에 쓰고 돈이 모자라서 대학식당에서 제일 싼 음식을 사먹거나, 쌀을 사다가 우유를 넣어 끊여먹는 것으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대학 강의도 빠진 날이 많아, 겨우 학점을 얻어 졸업을 했다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응급수술실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집에서의 어느 날, 그이는 모택동 사진을 꼭꼭 접어서 궤짝에 넣어버리고, '톤 슈타인 쉐르벤'음악을 듣고 앉아있었는데, 그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함께 가자던 동지들도 뿔뿔이 헤어진 지 오래고, 그때 정부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젠 출세의 길에 올라 그 주먹을 국민을 향해 내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모택동 사진' 치우고 울던 그...
 
나는 그때 아무 말 없이 그를 내 가슴에 꼭 안았다. 이렇게 그이와 삶을 나눈 지가 20년을 맞이한다. 주위의 친구들은 왜 결혼을 안하느냐고 종종 물어온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아니 이사회가 만들어 놓은 계율에 나는 묶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떠날 수가 있어 자유롭다.

나는 생선이나 고기류를 전혀 먹지 않는 그이와 함께 먹기 위해 종종 된장찌개를 한다. 이곳의 잘 익은 치즈냄새는 된장과 비슷하다. 단백질이 많은 음식이라면서 그이는 언제나 즐겨먹는다.

그는 종종 "미국에서 수확되는 콩과 곡식들을 소를 먹이지 않고 사람들이 나눠먹는다면 이 지구상에는 굶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이가 고기를 안 먹는 이유 중 하나다.

아이들이 자기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났고, 그들의 방도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이젠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의 텅 빈 방을 다시 사랑으로, 믿음으로 꼭 꼭 채워야겠다.



<사진> 2000년 고국방문했을 때 하인츠 맥클러(맨 오른쪽)씨와 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필자는 오른쪽에서 두번째)


베를린지역 병원개혁과 나...
 
독일에 온 후 처음엔 서독에 있는 작은 시립병원에서 3년을 일하다가, 결혼 후 아이들의 아빠 대학등록 문제로 나는 첫아이를 데리고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계속 간호사직에 종사하면서 여러 분야의 간호지식을 얻기 위해 외과, 내과, 부인과 병동을 거쳐 마취과, 정형외과 수술실에서 20년을 일했고, 지금은 레이저과 수간호원으로 있다.

레이저 치료기술의 발달에 따라 독일에서도 5년 전부터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립병원에도 레이저 전문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이렇게 완전한 시설과 전문의들이 있는 곳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이 병원으로 유럽 내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의사들을 위한 레이저교육을 매년 4회 실시하고 있다.

나는 환자간호를 위한 일 외에, 레이저과의 심포지엄에 딸린 기획을 해야하는 등 언제나 일과가 분주하다. 내가 수간호사자격을 얻기 위해 일년 동안 교육을 받고 있었을 때, 내 나이가 55살이었고, 아비투어과정 때처럼 또 젊은 사람들 속에 끼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간호사직은 생활을 위한 직장이었고, 분주하게 열심히 활동한 분야는 직장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나는 독일의 간호사 관련법규나 현 독일 간호사에 대해서도 너무나 몰라, 어떤 때는 정말 민망할 때도 있었다.

사회운동 하느라 늦은 수간호사 진급...
 
대부분의 사람은 직업을 가지면 그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넓히고, 또 진급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그동안 간호지식은 많이 쌓았지만, 나의 맡은 임무에만 충실했지, 직장에서의 나의 위치라든지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말하자면 여성모임의 활동 같은 사회운동에 참여하는데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투자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나의 직업의식에서 부족한 부분을 부지런히 보충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새삼스럽게 내 직업에 대한 자의식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나의 직책에 대한 흐뭇함을 느낄 때가 많다.

세계화의 여파와 그것에 따른 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요구로 독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병원의 개혁이 대폭적으로 진행 중이다. 베를린에서는 98년부터 시립병원마다 간호사취업의 길이 막혔다. 지금 내가 있는 병원에도 매년 20명의 간호학생들을 배출하지만, 한 명도 고용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대부분이 베를린을 떠나 서독지역이나 스위스 등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일하는 간호사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베를린의 간호사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베를린 시의 악화된 재정관계로 병원을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 1월에는 10개의 베를린 내 시립병원들이 하나의 합자회사로 통합되었고, 시의 병원 수를 줄이는 동시에 내부적인 개혁이 크게 진행 중이다. 병원 당국에서는 퇴직연령에 가까운 간호사들에게 명예퇴직을 권하는 등 간호사 수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공립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의 강제퇴직은 현재의 법규로는 불가능하여, 그래서 이 법을 2006년까지만 유효하게 하는 새 법안이 마련되었다. 현재 독일간호사들이 직장을 못 구하고 있고, 2003년까지 지금 간호사수의 20%를 줄이지 않고는 병원의 운영이 불가능하다니 앞으로 과격한 인사이동과 내부개혁이 있을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간호원들의 과제는 점점 늘어난다. 병원의 내부 움직임을 파악하고 밑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잘 이끌어야만 하는 중요한 과제가 언제나 뒤따른다. 매달 직원회를 열어야 하는 것은 병원방침에 의한 의무이며, 나는 언제나 기꺼이 이 일을 진행한다.

직원회의는 투명한 업무를 꾸리기 위한 것이다. 레이저과 내에서 매주 열리는 회의에서 모든 정보를 전함으로써 병원의 새로운 시스템에 모든 직원들이 발맞추어 함께 변화, 발전하도록 해야한다.

바쁜 나날에도 문득 고국생각에 눈물

 
수간호원들마다 직원을 이끌어 나가는 자신 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있다. 언제나 내가 강조하는 점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며, 그들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서로가 협력하는 공동작업의식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목적이요 의무라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간호사 정신, 즉 나이팅게일 정신은 이곳 유럽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환자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갔을 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재활간호에 목적을 두고 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독일간호사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야 한다는 많은 논란이 있었고, 미국, 유럽 등에서 발표된 간호사들의 연구논문이 독일에 있는 간호사들에게도 많이 읽혀지고 있다. 수술실, 마취과, 중환자병동과 위생과 등 전문과정을 수료한 간호사수가 늘어나고 간호사를 위한 경영교육의 시스템이 많이 설치되고 있다. 곧 독일간호협회가 설립될 것이며 그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도 설치될 예정이다.

현재 독일의 여성 정년퇴직은 63세, 남성은 65세이다. 정년퇴직을 아직 몇 해를 앞두고, 내가 맡은 직책에 어려움 없이 엮어 가는 일은, 그때까지 나의 에너지를 어떻게 나누는가에 달려 있다.

젊은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좀더 인간다운,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분주한 일과를 보내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며 푸른 하늘과 맑은 계곡이 있는 고국을 눈앞에 그리니,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것은 시련을 넘은 뒤에 오는 외로움이고 기쁨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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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어려운출국

김순임




1966년 4월 28일 김포공항은 독일 라인마인 지역으로 취업차 출국하는 128명의 간호사들과 그들을 전송 나온 가족, 친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 선배언니와 나를 제외한 모든 간호사들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있어서 힘든 노동의 대가로 외화획득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보다는 어떤 친선문화사절단이 대거 출국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의 마음은 그러한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그냥 빨리 탑승을 했으면 하는 초조한 기분 속에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의 뒷덜미를 잡고 너는 못가 하고 끌어 낼 것 같은 불안한 심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1962년 봄 광주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연령 미달로 6 개월을 기다린 후 양호교사로 재직 중 일간지에서 해외개발공사 광고를 보고 파독 간호사 선발에 응시했으나 제 일차 파독 간호사 모집에서 떨어졌다. 일차 파독 간호사들이 출국하기도 전에 제 2차 선발광고가 있어 다시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 때 소문에 일차 간호원들은 국회의원 한 사람이 간호사 한 사람 씩 밀어주어 갔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2차 선발에 끼게 되어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해외개발공사에서 실시한 독일어 강습에 다니면서 외무부에 여권신청 후 출국만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5일 전에 2차 파독 간호사들은 모두 여권발급이 되었는데 나는 제외되어 있었다. 해외개발공사 담당직원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니 외무부 여권과에 문의하라고 하였다. 나는 시골사람이라 서울지리에 밝지가 않아 여기저기 물어 외무부 여권과에 가서 문의했더니 어떤 설명도 없이 여권발급이 안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가 팍 죽어 가지고 그럼 언제 나오는 가고 물었더니 “몰라요” 했다. 나는 이제 주눅이 들어 더 이상 말을 부쳐보지도 못하고 외무부를 나왔다. “왜 안나왔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고 물어보지 못한 나 자신도 저주스러웠지만 불친절하고 교만해 보이던 외무부직원의 태도에서 내가 한국을 떠나고 싶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생긴 것을 느끼고 있었다.

초라한 모습으로 외무부를 나와 길을 걷는 나에게 “누나!”하고 고향친구의 동생이 서울 한복판에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누나 이번에 독일 못 가실 거라 하던데 안 됐어요”
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김 순경이 그러던 데, 누나가 신원조회에서 걸렸다던 데요.” “뭐라고?!” 그는 다시 “누나 외삼촌이 6. 25 때 활동했다면서요” 했다. 나는 급히 친구동생과 헤어진 후 큰 형부에게 가서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형부는 아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있는데 큰 힘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번 만나보라고 전화번호를 주셨다. 나는 그 분을 만나 출국준비용으로 갖고 있었던 약간의 돈을 봉투에 넣어 내 여권발급에 힘써 주시라고 하면서 드렸다. 그 다음날 외무부에 가서 여권을 받았다. 문제가 되었던 외삼촌은 6. 25 때 좌익활동에 연루되어 6. 25 이후 희생당하셨고, 나에게는 사탕 잘 사주시고 친절한 미남 삼촌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능하고 무식한 권력층이 권력을 도구로 가난한 서민을 깔아뭉개고 온갖 부조리와 부패가 만연되었던 그 시대에 조국을 떠났다. 시골농부의 딸로 태어난 나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독일에 도착한 2일 후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1967년 동베를린사건이 터졌다. 독일과 한국 당국에서는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지만, 당시 독일어를 제대로 읽을 능력이 없었고 한국신문을 읽을 기회도 없는 처지여서 그냥 들리는 소문만으로 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 중에는 정보부에 끌려간 사람 중에 간호사도 있다는 말도 들렸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무섭고 떨리는 소식들이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4년을 근무한 후 서베를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고국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 소식을 접하신 부모님들로부터 3번이나 서베를린으로 가지 말고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국제전화를 쉽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참으로 난감하였다. 나는 왜 그렇게 부모님이 강경하게 나오시는 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동베를린사건 이후 서베를린은 간첩활동무대로 한국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베를린으로 이사를 갔다.  


힘든 시작
 
독일 도착 이틀 후에 근무를 시작하여 서베를린으로 옮길 때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근무한 4년 동안의 생활은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생스러웠다고 기억된다.

습한 기후 때문에 항상 머리가 천근의 돌을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고, 음식이 너무 생소해서 고된 병원근무에 필요한 열량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체중이 자꾸 줄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은 언어불통의 문제였다. 병원 측에서는 한국간호사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2시간씩 독일어 강습을 실시했다. 근무 도중에 모여서 받은 독일어 수업은 처음 2-3 개월 동안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수다스러웠던 독일 여선생님은 왕방울 같은 두 눈을 굴리고 다양한 표정을 써가면서 열심히 강의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처음에는 변화무쌍한 그녀의 표정과 제스처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열심히 말부터 배우려고 노력했다.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4월에 도착하여 대학병원의 정원에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게 장미가 만발한 8월쯤 되니 귀가 약간 트이고 서투르나마 의사표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쯤에는 주위환경도 눈 여겨 바라보면서 독일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거리, 하나처럼 똑같은 식으로 장식된 주택가의 커튼들, 발코니에 심어 놓은 똑같은 꽃들이 너무나 획일적으로 보였고, 부드러운 갈색머리와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에 어울리지 않게 경직됐거나 약간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한 독일인들에게서 너무 큰 이질감을 느꼈다. 이런 부정적인 느낌들 때문이었는지 나의 독일생활 시작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는 한국간호사들을 2주일 동안 입원시켜 구충제를 복용하게 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물론 언어불통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사전에 본인의 동의는커녕 어떤 설명도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은 의료법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나도 입원이 되어 회충약을 복용했다. 그런데 약복용 이틀째 되는 날, 얼굴이 뒤틀리고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소동을 30분 간격으로 두 번이나 치르게 되어 당장에 약 복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병원생활에 적응이 되어 가던 9월 상순, 나는 전염성 간염으로 6개월의 긴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격리병동에 입원이 되자마자 전신에 황달이 퍼지고, 구토와 구역질에
시달렸다. 체중은 32Kg까지 내려갔다. 내가 정보부 직원까지 매수하여 오지 못할 곳을 왔기 때문에, 이제는 병들어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럽고 외로운 마음에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에 밤이면 죽음의 사자가 나를 유혹하는 꿈이 무서워 밤새 몸을 뒤척거리면서 뜬눈으로 세웠고, 그래서 간호사과 의사들이 병실을 오락가락 하는 낮에 잤다. 정성스러운 주치의와 간호사들의 보살핌으로 12월에는 회복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12월 중순 어느 날 아침, 나는 새벽에 깨어 해가 떠오르는 동쪽 유리창을 향해 서 있었다. 병원은 조용하고 밖의 찬 공기를 병실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이른 새벽이었다. 동쪽 하늘에 엄청나게 큰 불덩이 같은 태양이 떠올랐다. 장엄하면서도 찬란한 햇볕이 온통 나에게로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두 어깨를 활짝 펴고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받아들이고 싶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함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지치고 힘들어 일어나기 어려운 순간에 부닥칠 때마다 그날의 아침해를 기억하면서 기운을 얻어 다시 박차고 일어나게 된다.

나는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고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에 감사한 마음으로 퇴원했다. 6개월 동안 일을 못했으니 월급을 받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구좌에 상당금액이 저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어도, 일정기간은 직장에서 월급이 지급되며, 그 기간이 지나면 의료보험에서 생활비가 지급되는 의료보험제도의 혜택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나는 그 병이 직업을 통해 얻은 직업병이라고 인정이 되어 3년 동안 매달 식이요법을 위한 보조금도 받았다.


독일 정착의 결정과 첫 고국방문
 
한국간호사들은 대부분 3년 고용계약으로 독일에 취업을 해왔었다. 3년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한 병원에 같이 근무하던 동문의 선배가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망설였다. 유난히 어렵게 시작했던 독일생활이었다. 다시 다른 나라에 가서, 새 말을 배우고, 사람들과 기후 그리고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독일에 머물기도 결정을 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한 곳에 정착해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타향살이는 15살부터 시작되었다.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양호교사로의 취직을 위해 이력서를 낼 때도 부모님께서는 혼기가 차가는 딸이 고향에서 취업을 했으면 하셨지만, 전라도의 최남단 장흥 사람이 먼 경상도로 갔다. 그것은 부모형제를 떠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흔히들 말하는 역마살 때문인 것 같다.

독일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일년에 한 번씩 휴가를 받으면, 유럽의 여기저기 가보고 싶었던 곳을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고대 희랍신화의 발생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 델피, 미케네, 크노소스 등이다. 많지 않은 간호사의 월급이지만 다른 동요들은 착실히 저축하여 고향에다 논도 사고 집도 샀다는데, 나는 여행을 많이 다녀 별로 저축을 할 수 없었다. 고국에 대한 향수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더 지배적이어서 나는 10년 동안이나 고국 방문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76년 8월, 드디어 10년만의 고국방문은 참으로 감격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부모형제들의 정겨움과 따뜻한 마음은 10년 동안 겪은 나의 외로움을 일시에 녹여주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가는 길에 내 시야를 스치는 아름다운 고국산천에 대문짝 만한 큰 글씨로 세워진 반공표어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버스가 시골 어느 초등학교를 지날 때, 교문에 세워진 표어는 나를 경악하게 했다. 오른쪽에 “나라 사랑, 국어 사랑”, 그리고 왼쪽에 “쳐죽이자 김일성” 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닌가! 국어 사랑은 아름답고 바른 말을 가르치고 사용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쳐죽이자”는 말은 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휘였다. 거리의 전봇대, 공용버스 안과 밖, 심지어 시골 구멍가게의 유리문에도 반공표어 일색이었다. 그리고 “옆집에 오신 손님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라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시골에 머물고 있을 때 시골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가버렸지만, 나의 불쾌감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충격이나 불쾌감은 잠시였고, 나는 오랜만에 고향의 흙 냄새와 따뜻한 정에 도취되어 작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고향의 모든 것을 내 몸 전체에 넣어 가려고 했다. 심지어 뒷간에 들어가 매캐한 암모니아 냄새도 들이 마셨다. 그렇게 하고 독일에 돌아오니 몇 개월 동안은 이상하게도 등이 따뜻하고 든든해서 하루하루의 생활이 그 전과 다름을 느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나의 독일 생활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하셨다. 나는 그냥 잘 살고 있다고만 말씀을 드렸다. 엄청나게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께서 혼란을 겪으실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 독일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라, 어머니께서 오시더라도 기후나 음식 등, 모든 것이 불편하실 것이에요. 제가 독일로 모실 여비를 보내드릴 테니, 약도 잡수시고 친구들과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유람 다니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그람! 그런 델 뭘 할라고 가야”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가 다시 고향을 떠나는 날, 읍내 버스정류장에 나오신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는 나를 붙잡고, “나는 그래도 니가 사는 것, 꼭 한 번 봤으면 쓰것다”, 하시는 게 아닌가. 아, 어머니의 마음!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와 자식은 이렇게 다르구나.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딸이 외국에서 어떻게 사는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10년 동안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을까! 그러한 어머니를 뒤로하고 다시 떠나는 몰인정한 나. 갑자기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지더니 광주에 도착할 때까지 그칠 수가 없었다. 옆자리 승객이 “인자 그만 우시오, 아줌씨!” 라고 했을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예 소리를 내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방문과 아이들 언어 문제


몇 년 후 드디어 나는 어머니를 독일로 초청했다. 어머니는 장시간의 비행이었음에도 하얀 치마저고리를 막 다려 입으신 것처럼 단정하게 입고 예쁜 낭자머리에 버선고무신을 신고 의젓하신 모습으로 출구로 나오고 계셨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국 여성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나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탄하여 하마터면 인사드리는 것조차 잊을
뻔했다. 잠시 후에 어머니는 “어서 앞장서라” 하셨다. 변함없는 어머니의 단호한 음성과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불편해 하셨다. 당장 따뜻한 온돌 아랫목을 그리워하셨고, 기후 때문에 내가 처음의 나처럼 자꾸 머리가 무겁다고 하셨다. 나는 정갈스럽고 맛 좋은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아는지라,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진짓상에 올려야 할 지 안절부절했다.

어머니는 해드리는 대로만 드시고 칭찬도 평가도 없으셨다. 어머니가 계시는 동안 내가 통감했던 것이, 국제결혼은 큰 불효라는 점이었다. 사위의 예의범절은 접어 두고라도, 한 마디도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어머니께 참으로 죄송스러웠다. 어머니께서는 도착하신 지 2주일 째부터 집으로 가고자 하셨지만, 비행기표 관계로 4주만에 귀국하셨다.

이제는 국제통화료도 염가라서 이따금 전화를 드리면, 제일 먼저 사위의 안부를 물으신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특별히 사위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위의 안부 여하에 따라 시집 간 딸의 행과 불행이 좌우된다고 믿는 조선의 여성관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어머니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나의 남편은 영국사람이다. 남편이 아이를 갖고 싶어했을 때 나는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남편 역시 독일에서는 외국인이라 배타적인 독일에서의 자녀 교육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남편은 일 초도 주저하지 않고 코즈모폴리턴으로 기르면 된다고 했다. 그것이 가능한 지 모를 일이지만, 좋은 생각이라 판단하고 동의했다. 이왕이면 아이를 서넛은 낳고 싶었지만, 서른 여섯에 첫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연년생으로 딸 하나, 아들 하나만 낳았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자연분만을 할 수 없어서 제왕절개수술을 했었기 때문에, 만약 둘째 아이도 그래야 된다면 동시에 난관수술까지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분만이 가까워오자 남편과 나는 주치의와 의논했다. 주치의는 제왕절개수술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자연 분만의 경우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에게 물어보지 않고, 기왕에 내가 입원해 있을 테니 3-4일 후에 수술을 받겠다고 했다. 그러자 주치의는 화를 버럭 내면서, 왜 남편이 수술을 받지 않고 당신이 받겠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난관수술에 비해 정관수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해 병원에 입원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남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의사는 우리에게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고 오라고 했다. 남편은 정관수술은 남성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한다고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여러 문헌을 읽고 난 후에 자기가 하겠다고 결정했다. 둘째 아이는 자연분만을 하게 되었고, 분만 일 주일 후에 남편은 정관수술을 받았다.

남편은 모유가 전혀 없어 우유를 먹여야 하는 신생아 시절부터 아이들 양육에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우유며, 일회용 기저귀를 부지런히 사다 나르고, 밤에도 아이들이 울면 벌떡 일어나 우유를 만들어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참으로 열심이었다.

그러한 일을 하면서 남편은 갓 태어난 아이들과 늘 대화를 했다. 생 후 일 주일 밖에 안된 아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련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우리 아이들은 세 살이 되어 어린이 동산(유치원)에 다니게 될 때까지 영어와 한국어밖에 하지 않아서 독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점차 어린이 동산을 통해 독일어에 익숙해지자, 집에 오면 우리와 독일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시종일관 영어로만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독일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한국 친구들도 아이들을 보면 한결같이 독일어로 말했다. 남편은 나에게 몇 번이고 주의를 하라고 충고했다.


아이들 키우기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어 학교에 들어가자 영어와 독일어는 잘 하는데, 한국말을 못하게 되자 남편은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혼자서도 아이들에게 거뜬히 영어를 가르치는데, 베를린에 한국 사람이 수 천명 산다면서 왜 한국말을 못 가르치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남편은 영국인이나 영어를 쓰는 사람과 거의 친교가 없는 반면, 나는 한국 교포단체에서 모임이 있으면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남편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어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비난이 심해지자 나는 나의 무능력을 스스로 변호하고 나섰다. “나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므로 여자는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우선 나부터 남 앞에서 똑바로 말 할 수 있도록 배워야할 처지다” 라고. 남편은 어이가 없어 했고, 드디어 큰 아이가 초등학교 일 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 짐을 싸서 두 아이들과 나를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에 가서 말을 가르쳐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광주 성모유아원에 5개월을 다녔다. 아이들은 말도 빨리 배우고 유아원 생활도 즐겼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에 다시 독일로 와서 아이들은 영어와 독일어 이중 언어 학교인 케네디 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 약 일년 동안은 아이들이 한국말을 하였으나 점차 독일어와 영어만 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그리 쉽게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아이들 교육에 대한 원칙은 갖고 있었다. 나는 대다수의 인간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그 가능성을 점점 상실하면서 자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 하면 안돼요”, “그런 짓 하지 말아요” 등,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인 말보다 많이 듣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유아기에 조심했다. 또 아이들에게는 꼭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당한 일을 위해서는 항상 아이들 뒤에 우리가 있다는 든든한 믿음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정당하게 성적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때는 학교에 시정을 요구하고, 그것이 관찰되지 않을 때는 학교를 바꾸기도 했다.

우리는 작은아이가 5학년을 마칠 때까지 텔레비전 없이 살았다. 동시에 학교에서 숙제도 많지 않고, 과외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무료한 시간을 갖지 않도록 힘썼다. 아들은 육상경기와 보트반에 들어갔고, 클라리넷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혼자서 색소폰을 연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국제 고등학생 모의 유엔총회에 해마다 참석할 수 있도록 성원을 해주었더니,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딸아이는 여섯 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가무에 능한 여성모임 회원인 송금희씨로부터 한국 춤을 배우기 시작해서 아직도 한국 춤을 배우고 연구하고 있으며, 열 한 살 때부터 김덕수씨에게 장구를 배우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때에는 또래의 친구들과 “천둥소리”라는 사물놀이패를 만들어 여러 곳에서 초청공연을 흥겹게 하고 다녔다. 서양악기로는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7년 동안 받았다.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면서 해마다 한 번은 런던, 제네바,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열리는 국제 고등학교 친선음악제에 참가하여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어울려 숙식과 연습을 함께 한 후 공연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국경을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면서 건강한 휴머니스트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이들에게 나의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나는 실패했다. 그러나 수학을 전공하는 아들은 아침식사에도 빵보다는 두부 된장찌개와 밥을 선호하고, 기회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벼르고 있다. 한국학과 아시아 민속음악을 전공하는 딸은 작년 일년 동안 고려대학에서 한글을 배워 겨우 문맹을 면한 상태이나, 앞으로 적극적으로 한국 예술을 유럽에 소개하겠다고 포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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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

유정숙 재독 한인 여성회 회원




1985년 4월, 나는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독일에 왔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삶을 다 물리치고 다섯 살 된 딸아이와 독일의 탄광도시인 보쿰에 도착하였다. 남편도 같이 왔다.

처음 일년간 박사과정의 이수에 필요한 어학코스를 할 동안 나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 하나는, 내 주변의 "독일적" 상황이 내가 다 "물리치고" 온 한국 생활을 정신적으로 정리하고, 현재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더 없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여성으로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아 갈등을 느끼며 왜 이래야만 할까라는 질문을 자주 하면서, 그래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조롱이 담긴 "저 잘난 맛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나의 주변은 그런 질문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신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많은 여성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일년 후에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도 대학근처에 얻고, 딸아이는 학교가 끝난 후 어린이집으로 가서 오후 5시까지 사회, 공동생활을 하게 되니, 나에게 학교에 가서 조용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나는 독일에 와서야 한국인들이 이미 60년대부터 간호사, 광산근로자로 독일에 취업이민을 왔다는 사실을 소상히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한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한국에서 정치학 석사까지 공부를 하고, 더욱 학생운동의 물결 속에서 뭔가를 한답시고 어려운 시절도 겪었다는 내가 그 당시 한국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조차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보쿰 대학의 수업내용에는 현실 정치와 관련된 강의들이 아주 많았다.
 
이것도 또한 한국과 다르구나 하면서 속으로 "통쾌함"을 느끼면서 강의내용들을 보니 그 중에 유럽에서의 외국인정책이라는 것이 눈에 띠었다. "아! 이거다 이게 내가 할 일이다" 하는 생각이 그 순간에 들었고, 그 후 지금까지도 나는 그 문제와 맞붙어 싸우고 생각하고 있으며, 내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 어느 날 한국식품점이 개업을 했다. 나는 너무 좋아 빨리 달려가서 뭐가 있나 하고 살펴보았으나 가난한 학생신분으로 이것저것 많이 살 형편은 안되었다. 식품점 주인은 한국 남성이었는데 대화를 좋아하는 분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나에게,  "독일에 재독한국여성모임이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그런 모임에 참여할 마음은 없냐, 회원들은 주로 간호사로 온 사람들이지만 과거에는 유학생들도 꽤 참여를 했다.
 
그러나 독일의 한인사회에서는 이 모임이 "빨갱이" 여성모임이라고 낙인 찍혀있다는 것은 우선 알고 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이 정보가 꿈 같이 다가왔다. 그 큰 한국사회에서도 여성들끼리의 모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여기에 그런 모임이 있다니! "빨갱이" 여성들이 모인다니! '분명히 뜻도 있고 생각도 있을 것이니 당연히 멋진 여성들일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저에게 빨간색 옷이 잘 어울려 자주 입어요"라고 말하면서 그 여성들을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독일에 와서 내가 그런 한국여성들의 모임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보았고, 그 놈의 "빨갱이"란 말은 한국에서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어 오히려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찍혀 있으면 호기심을 유발하는 개념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지역모임의 회원들을 사귀게 되었고, 1987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전체 여성모임이 열릴 때 총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상당히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세미나에서 우리 지역이 시사를 담당하게 되어 내가 그 시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열심히 신문을 읽고 준비를 해 갔는데, 다른 토론들이 너무 많아 시사가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한 회원이, "그래도 새 회원이 열심히 준비를 해 왔으니 다만 10분이라도 듣자"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에 맞추어 따발총처럼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러니 꼭 선보이러 간 느낌이었다고 할까? 회원들과 공통된 경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그래도 뭔가 공통된 경험이 있나 하고 찾던 중, 한 회원이 바로 얼마 전에 예산의 구억말에서 3년 간 일하며 살다 왔다고 하는 바람에 얼마나 좋았는지! 그 구억말에서 살고 있는 한 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공통된 경험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다.


회상과 자기치료
   
여성모임의 총회나 세미나에서는 공식 프로그램이 끝나면 저녁부터는 자유시간을 갖는다. 회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밥솥, 김치 등을 들고 와 토요일 저녁에는 꼭 한국음식을 만들어 둘러앉아 먹는다. 내 기억으로는 아직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이것을 해 온 것 같다. 사실 한국음식을 하려면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 몇 번 이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꼭 이래야만 우리들의 만남이 즐거운 것인가 하고 몇 시간을 토론한 후에, “다음에는 하지 말자!”고 결정해도 결국 실천이 안 된다. 언제부터인지 이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오히려 일년에 두 번, 전체회원이 모이는 때에는 누가 회갑이 되었나를 살펴보고 우리 나름대로 성대한 회갑잔치를 연다.

최근 50대에 이르는 회원들의 걱정은, ‘우리가 회갑이 되면 다른 회원들은 더 나이가 들어 힘이 없을 텐데 과연 우리 회갑잔치를 누가 차려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러니까 우리가 회갑이 될 때까지 다른 연장의 회원들이 건강하게 살도록 우리가 “열심히 모시는 수밖에” 없음이다.

밤이 깊도록 몇 명씩 어울려 두런두런 이야기하다보면 회원들은 자주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나도 요사이는 나의 어린 시절 등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게 되었으나, 한동안은 나의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하기가 어려웠다. 회원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별 어려웠던,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허다하다보니, 평탄하기만 했던 내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 우선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었던 이야기도 또 듣고 하면서 가만히 보니 이야기를 하는 회원들이 그러한 회상을 통해 자기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순간, ‘나도 스스로를 치료해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왜 또 남들을 배려하느라 입도 못 열고 가만히 있나’하고 나의 문제를 본 순간, 이게 아니다 싶어 말을 시작했다. “저는요, 그 당시에 큰 도시에 살다보니 유치원도 다녔구요, 국민학교 때 피아노로 배우러 다니구요, 중학교 시절에는 동대문 스케이트장에 하루가 멀다하고 스케이트도 타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그것만이 저의 어린 시절은 아니지요” 대충 이렇게 말을 시작한 것 같다. 하여간 이렇게 입을 열고 보니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나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쌓아 놓았던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몇 년 전 한국방문 때 동창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한 동창이 자기 아이가 대학을 별로 시원치 않은데 들어가 속이 상해하는 것을 듣다가 내가 하는 말이, “얘! 우리도 말이지, 그 당시에 한국의 경제사정이 좋아 모든 여학생들이 똑 같이 경쟁해서 대학입학시험을 보았다면 어쩌면 우린 다 떨어졌을지도 몰라. 너, 그러니 너무 속상해 하지마” 하는 말을 던진 적이 있다. 독일에 와서 소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수 없었던 한국여성들의 뛰어난 능력을 경험하다 보니 이 말이 나온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회원들 사이에서 누가 대학을 나왔고 안나왔고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 여성모임에 나갔을 때는-그러니 벌써 17년이 지나버렸는데- 한국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이런 통상적 척도가 상당히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서로 공통된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도 있었지만, 유학생으로서 온 동기와 간호사로서 온 동기가 “서로 다르다”라는 기준으로 작용되었던 것 같다.

여성모임의 초창기에는 유학생들이 참여를 하였다가 하나 둘씩 물러나 버리게 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작용을 했던 것 같다. 그저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살았을 뿐 인 것을 가지고, 누가 잘 낫고 누가 못 낫고 하는 식으로 따지다 보면, 서로의 열등의식만 만들어줄 뿐이며, 인생사를 이리저리 따져보면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의 질을 계속 망쳐갈 뿐이리라. 이런 도토리 키재기가 민족간에는 결국 인종차별주의로 확대되는 것이 아닐까?
 
한 가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은, 한국에서 70년대 중반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나는 한동안 소위 운동권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여성문제를 다루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저 여성이론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실제는 자신의 사회적 성공만이 관심사였지, 정말 그 당시 각 개인이 당면하고 있는 차별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스스로를 “슈퍼우먼”으로만 만들어 가는 장소여서 나는 때려치우고 말았다. 그런 것에 비하면 재독한국여성모임에서 “서로 다르다”고 느끼는 긴장감 정도는 그 성격이 아주 달랐다는 말도 여기서 하고싶다. 


나의 학창시절

나는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서 성격이 아주 강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다. 내가 5살 정도 되었을 때 어떤 화가(?)가 나의 초상화를 그려 놓은 것이 있는데, 한복을 입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눈매가 매섭고 무엇인가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 어딘지 유관순 여사를 연상하게 한다는 느낌이다.
 
지금도 내가 누군가에 대해 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고, 간혹 상처까지 받는 것 같다. 그래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마디 더 해보자면, 바로 그것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학생시절에 어디서 반장을 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위기적 상황이 생기면 모두 나를 찾았다. 선생님도 그렇고 동창이나 친구 그리고 가족들마저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선생님은 "너는 안경을 끼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좀 부드러워 보이니까", 아니면 "너는 아프리카에 가서도 추장을 할 놈이야"하는 식으로 대조적이다. 독일에 와서도 박사지도 교수가 어떤 추천서에 "이 사람은 자신의 목표가 확고하다"는 등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이다. 어떻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이 공평하지 못한 것, 그에 따라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들이 너무나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나는 꼭 한마디를 했어야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찍힐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을 배려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늘 전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나의 전제나 노력은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목표가 뚜렷하고 잘 따지고 하는데, 그것이 남을 배려한 한 행동이라는 것을 누가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더욱 타인에 대한 배려와 할말을 해야하는 경향 사이에서 나 또한 내가 왔다갔다한다고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독일에 온 것은 나의 청년시절의 꿈과는 상관이 없다. 대학원이 끝난 후 미국의 버클리 대학을 가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어려서부터 사회활동을 습관적으로 하다보니, 대학시절까지 신문을 팔거나 아니면 카드를 만들어 팔아 추운데서 고생하는 국군장병아저씨들에게 선물, 감옥소 위문공연조직, 그 당시 버스 차장들을 상대로 그들이 여건상 못 배운 것을 소위 "가르켜" 주는 활동 등, 그런 일을 많이 하고 살았다.
 
대학 말기에 '이제는 내 길을 가겠다'고 생각을 하고 버클리의 꿈을 그리면서 있다가 상황이 묘하게 되어 학생회의 조그마한 역할을 맡게 되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그 이후의 나의 삶에 대한 결정적 계기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로 인하여 지금도 머리 속에 그림처럼 남아있는 것은, "기생관광반대데모"를 김포공항에서 할 때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 겨울 잠바 속에 집어넣고 공항에 갔더니 이미 정보부 요원들이 줄서있는 바람에 도망쳐야 했던 모습, 대학 채플 때 김민기 씨를 초대하여 헌금을 모아 운동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조직했을 때 사회를 보게된 나와 대학담당형사와의 긴장감, 그 다음날 신문기사에 김민기 씨가 갑자기 군복무를 떠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의 참담한 심정, 대학강당에서 철야데모를 하다가 결국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취조를 당하고 엄마까지 불려와 도장찍고 나를 데려가던 일, 이런 모든 일들 때문에 나와 가까이 있었던 교수들과 가족들의 수모, 그 이후 형사 한 명이 매일 나를 찾아와 괴롭히던 일-나는 학교도 못 가고 소위 가택에 갇혀 있었다-,
 
그래도 여러 명의 교수들의 협조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던 일,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대학 담당경찰부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묘한 감정, 유신헌법이후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감옥행을 해야 할 때의 절망감, 대학원에 들어 간 후, 감옥에서 나온 학생들과 소위 스터디그룹이 만들어져 운동하던 시절, 냉철한 이성만을 가지고 찾던 사랑의 우여곡절, 지명 수배된 친구들을 챙겨야 하는 비밀, 전화통화에 대한 불안감, 함께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지금 한 장의 사진도 없는 것, 열심히 청계천 헌책방들을 돌아다니며 모아 두었던 사상계 등을 가택수사를 당할 것 같아 몽땅 불태워 버릴 때의 슬픔, 버클리의 꿈이 부르주아의 꿈이라고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던 날, 남산정보부에 끌려가 취조 당하던 시간, 가택수색을 당할 때 너무나 당당하던 엄마의 모습, 그러다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여러 가지 사생활이 얽히다가, 그러면 나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던 중에 결국 독일로 오게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아직도 내 눈에는 선하다. 


독일 '여성의 집 (Frauenhaus)' 1

나는 현재 '여성의 집'에 근무하고 있다. 한 독일여성이 한국을 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만나면 "남편이 있느냐, 직업은 뭐냐, 자식은 몇이냐, 아들이 있느냐, 마지막으로야 너는 뭐하냐"를 당연지사로 묻는 바람에 질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 웃었던 적이 있다. 이 사회에서는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닌 이상,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이름만 이야기하고 상관되는 일만 함께 하지 개인사를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오래 전부터 사민당의 회원이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시민의 집'의 회장단에 속해있다. 이 일을 오래 하다보니, 때로는 회의가 끝나고 사적인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면 간혹 친구가 "너 뭐하니"하곤 묻는다. 내가 "여성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대답하면, 그 반응이 남녀를 불문하고, 대체로 '심각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여성들의 경우는 당장 "그 일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느냐?"고 묻거나, 남성들의 경우는 얼굴이 좀 굳어지면서 그때부터 나를 아주 '진지하게' 대하든가, 아니면 "여자들이 남자들을 때리게 만들지!"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들르면, 나는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다"며 말을 끊어 버리고, 더 이상의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전쟁, 전쟁 속의 성폭력('정신대'), 가정폭력, 성폭력 등등-에 대해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항상 이유를 달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여성의 집'은 25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일에는 여성의 집을 운영하는 여러 단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집은 '자율(autonom) 여성의 집'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말은, 독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많은 여성의 집들은 제 각기 자신들의 여성에 관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그것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구호는 "여성이 여성을 돕는다,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재독한국여성모임도 올 가을에 25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975년 여성문제가 전세계적으로 의식화되어, 유엔이 '세계 여성의 날'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세계사조가 여성문제를 더 이상 도외시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독일에서 성격이 상이한 여러 여성단체들이 최근 대부분 25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런 사회적 환경은 여성들에 의해 쟁취되어진 것이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님도 사회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여성의 집'은 월급 뿐 만이 아니라 운영비까지 주 정부가 지원하고 있지만, 운영의 모든 면에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율적 기구이다. 독일에서는 여성의 집이 사회적 장치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전 한국 남성친구가 "거기도 아직 남성들이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해요?"라는 비양조의 말을 했을 때, 그러면 가정폭력이 아직도 '명태는 두들기면 부드러워진다'라는 말처럼 당연시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란 물음을 갖게 되었다.
 
1989년 서울에 처음 여성의 집이 만들어 질 때, 재독한국여성모임의 한 회원이 적극적으로 독일 녹색당재단이었던 '여성재단'을 통하여 이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며 창립을 도왔고, 그 이후 몇몇 도시에 여성의 집이 만들어 진 것은 알고 있다.

일년 전쯤 독일의 어떤 도시에 '남성의 집'이 개관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남성들도 '폭력'(여성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그 '남성의 집'과 비슷한 것이 있다. 이 집의 별명이 '앵무새들의 집'인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모르나 좀 우스꽝스러운 이름이긴 하다.
 
이 집을 드나드는 남성들은 소위 '집 없는 남자 천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배경을 보면, 사회구조에 적응을 못하다가 술에 빠지고, 가족들과의 불화로 헤어지고 난 후, 실직에 경제적 무능력 등이 겹쳐 '집도, 가족도 없는 천사'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국가가 운영하는 '집 없는 사람'들의 무숙자 보호시설에 들어가 그 구조에 속박되는 것이 싫어 거리를 전전하다가, 그래도 며칠간 기거할 곳이 필요해지면 이 '앵무새집'에 들어와 지내곤 한다. 이들도 '사회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독일에 몇 천 개의 여성의 집이 있는 반면, 남성의 집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은, 현 독일이 여전히 남성 폭력의 사회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일 '여성의 집(Frauenhaus)' II

여성의 집을 찾아오는 여성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란 것과 '가정폭력'의 희생자라는 것뿐이다. 이 여성들이 겪게 되는 문제들은 각자가 천차만별이며, 법적 신원도 다양하다. 독일여성, 이주민여성, 불법체류 여성 등등. 특히 혼인으로 온 이주민 여성의 경우는 최소 2년 이상 남편과 동거했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악법'적 외국인법에 의하여, 폭력을 당하더라도 그 시기를 견뎌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집에서 도망쳐 올 경우, 종종 자녀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여성의 집은 아동의 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는 아동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아동시기에 각 자의 인성과 성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남편폭력'과 동일시하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자식, 특히 아들이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우, 부모가 딸에게 가하는 폭력, 남자친구가 가하는 폭력 등, 그러니까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도 있어, 그것의 희생자인 여성들 중에는 심리질환을 일으켜 정신병원을 드나드는 경우도 상당수가 된다. 소위 중산층 이상 그리고 지식인 집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흔히 지식이나 경제적 수준이 높은 가정에서는 폭력이 없거나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이다. 대체로 그들은 수치감 때문에 공개적인 행동을 피할 뿐이며, 여건상 다른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의 집에 오지 않을 뿐이다.

여성의 집은 전화번호부에 연락할 번호가 적혀 있으나, 그곳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주소는 적혀 있지 않다. 남자들 중에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위치를 찾아내어 그 근처에 와서 서성거리든지, 심지어 경찰이 곧 나타날 것을 알면서도 보호소 안으로 침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의 총기규제법은 미국과는 달리 매우 엄격한 데도 간혹 총을 들고 설치는 남자들까지 있다.
 
여성의 집이 2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택시기사들이 주소를 알고 급할 때는 여성과 아이들을 직접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고 하니, 결국 이 주소에 대한 '비밀'이 깨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도움이 된다. 일을 하러 가다가 직장근처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너 어디 가니"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 나 지금 볼일이 있어 어디로 좀..."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나는 어릴 때 판사나 사립탐정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 두 직업이 특히 정의를 판별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 여자사립탐정일 경우 가죽잠바, 가죽바지를 입고, 색안경을 쓰고는 뭔가를 밝혀낸다는 멋과 이미지에 반했던 것 같다. 물론 탐정은 되지 못했으나, '여성의 집' 일이 어느 정도 그와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매일 가죽옷을 입고 색안경을 쓸 일은 전혀 없지만, 상대하는 기관이 경찰서, 법원, 변호사, 외국인청, 사회업무국, 청소년보호청, 의사, 주거청 등등, 수많은 기관과 사람일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이들과 협력하고, 어떤 때는 따지고 싸우기도 해야 한다. 보호를 받는 여성들이 각자마다 다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인성 자체가 또한 다르니, 그들을 간파(!)하기 위하여서는 재빠르게 두뇌를 회전하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다음 어떤 여성들은 다시 적절한 다른 곳으로도 보내야 하고, 여성의 집을 잘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금기사항들'이 몸에 배도록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을 보면 사립탐정 비슷하지 않은가!

여성의 집으로는 수많은 전화가 걸려오는데, 소위 '가출', 행방불명된 여성을 찾는 사람들의 전화일 경우, 우리들의 직업상(개인비밀노출금지의무), 그리고 일 자체의 성격상 "이 전화번호를 통해서는 어떤 여성에 대한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고 대답하게 된다. 그 말을 할 때는 모든 동료들의 목소리가 딱딱해 질 수밖에 없다. 만일 경찰이라고 하면, 일단은 저쪽의 전화번호를 받아 우리가 다시 전화로 확인한 다음 질문에 답을 한다.
 
간혹 나와 동료들의 친구나 가족이 일이 생겨 전화를 하고 싶어도 정말 급하지 않으면 전화를 하지 않는다. 목소리의 그런 딱딱한 느낌이 전달되어서 그런지 전화하기가 섬뜩하단다!

일을 하면서, 여성의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가 드디어 자기 길을 찾아가는 여성들을 보면 내 머리카락이 그로 인해 희어져도 기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흔하여 슬프지만,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본인의 결정과 책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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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가정 기울며 대학 중퇴하고...

손행자(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학교 다닐 적에 제일 어려웠던 과목이 국어였다. 그런데 신문에 내 글을 싣는다니 망설여지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난 때문에 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나의 경험담을 써서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될까하여 용기를 내게 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무난하게 세상물정 모르고 학교공부만 충실해왔다. 그러나 아버님이 4·19 뒤 군수, 경찰서장 등 일괄 처리에 몰려 본인의 잘 잘못과 무관하게 직장을 물러나시게 되었다.

그 후 아버님은 장사 중에 그래도 고상한 것이 서점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항상 읽고 공부하시는 자신의 성격에 맞아서 택하셨는지 광주 계림동에 서점을 여셨다.

그 때가 내가 조선대 약대에 입학하던 해였다. 어버님은 경험 없이 시작하신 일이 잘 되지 않아서 집안은 생활이 어려워졌다. 아들이었으면 집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마련해 주셨겠으나 나는 딸자식이기에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 실직으로 학업 중단
 
그러나 내 마음은 어떻게 하면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나 하는 길만 찾고 있었다. 집에서 한글타자학원에 다니라고 하셔서 가기는 했지만, 시간만 채우고 정신은 딴 곳에 있어서 3개월을 다녔으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결국 타자학원 선생님도 불만스러워하기만 했고, 일자리를 열심히 구해보아야 미인이나 되면 비서로 오라는 곳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키도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니 허송세월만 하면서 집안 일만 하였으나 그것은 너무 지루할 뿐이었다.

그러다 원불교 수녀나 되어 세상사람을 끌어안으며 사는 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한데 상의도 없이 옷을 챙겨 싸 가지고 원불교 교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 전에 원불교 정녀님을 만나 미리 알아보았더니, 전남여고 나왔으니 원광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고, 또 천주교 수녀가 되려면 그 과정이 오래 걸리고 어려워서 엄두도 낼 수가 없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원불교가 초창기이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가 열심히 배우면 외국에도 파견을 한다고 하셨다.

그 교당의 생활이란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내 또래의 다른 한 처녀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밭일하고 모든 잡일을 성의껏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리에 있는 본당의 세미나에 다녀오라고 해서 일주일을 다녀온 뒤 내 고민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원광대학의 학비는 면제되지만 생활비는 각자의 집에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돈이 있으면 약대 학비를 내고도 남을 돈이니 그것도 그림의 떡이었다.

실망 속에 궁리를 해보아야 별 방도가 없어 그만 병이나, 먹으면 토하고, 3일을 누워 있으니 미안해서 다시 집으로 가겠다고 하니 승낙을 했다.
 
상심 끝에 무작정 원불교당으로
 
그때 실망스러웠던 것은, 수녀들은 천사 같은 사람들로만 알았던 어린 마음에 돈 많은 신자들에게는 수녀들이 더욱더 친절하고, 가난해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점이었다.

세상의 삶이나 수녀들의 세계가 별다른 것이 없으며, 기왕 뼈빠지게 이곳에서 일할 바에야 불쌍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이 더 바람직하다 느껴 광주행복원고아원의 보조로 들어갔다.

한달 월급이 5천원. 그 당시 구두 한 켤레가 6천원이였으니 비교해보면 얼마나 적은 돈인지 상상할 수가 있다.

그나마 돈을 벌려고 간 것이 아니기에, 6살짜리 20명을 맡아서 한방에서 자고 먹고 같이 데리고 놀이하고, 그 많은 손빨래를 해야되었으나, 마침 여름철이라 옷들이 빨기가 쉽고 저녁에는 아이들을 시냇가에 데리고 가서 씻기면서 3개월 동안은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나 날씨가 차츰 추워지니 오줌을 싸면 담요를 빨아야되고, 잘 마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힘이 드는 것 외에도, 일의 내용을 다 알고 나니 또 새로운 일을 찾느라 마음이 안정이 안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치사량의 2배 독약을 먹었지만...
 
그 동안 아버지는 책방을 닫으시고, 서울에 형사전문학교가 설치되어 강사로 계시면서 큰 남동생의 중학교 졸업이 얼마 안 남으셨다고 어머님도 서울로 이사를 하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도대체 내가 서울에 함께 가서 전라도 사투리나 쓰면서 비좁은 곳에 살 생각을 하니 답답해서 고모집으로 가겠다고 결정을 했다. 이미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학교는 광주에서 다녀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님이 장성, 보성, 영암, 순천 ,여수 등지도 전근을 가실 때마다 나와 언니를 광주의 고모님 댁에 남겨놓았기 때문에 고모님은 어머님이나 다름없었으며, 고모부님은 직업이 선생님이라 우리 마음도 잘 알아 주셔서 아버지보다 다정하고 어렵지도 않으신 분이셨다.
 
가족과 헤어져 고단한 방랑
 
게다가 고모님이 문방구를 운영하셔서 나는 물건도 팔고 집안 일도 도와드리고 도매상에 가서 물건도 사오면서 몇 개월을 재미있게 지냈다. 그런데 그 일을 다 알고 나니 또
지루해져, 친했던 친구 영숙의 어머님 일을 도와드리게 되었다.

영숙의 어머니는 목욕탕을 운영하셨는데 4남매를 혼자서 키우시면서 다과점도 해보시고 여러 가지 장사를 하신 분이었다. 영숙이네 집은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 집에 가면 자유롭고 또 따뜻하게 대해주어 그곳에서 몇 개월 일을 하다가 일을 다 배우고 나니 다시 새로운 일이 하고 싶어졌다.

그 동안 세월이 지나 약학대학에 함께 들어갔던 친구들은 벌써 졸업을 하고 이곳저곳에 약국을 차렸고, 그 중에 전남의과대학병원에 근무를 하면서 약국도 하는 친구가, 자기의 약방에 와서 일을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연락을 해와, 나는 너무 기뻐하면서 낮에는 약도 팔고 제조까지 하는 약사노릇을 한 동안 했다.

겁없이 마이신도 하나씩 넣는 약을 제조했으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당시 매상도 적지 않게 올랐다는 기억이 나는데, 얼마동안 약국에서 일을 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그러나 그 친구가 병원의 약제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별다른 일자리는 없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 보았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시집오라는 사람도 없었지만, 시집갈 마음도 없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살고 계시니 내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하루는 약학사전을 뒤져 약국에 있는 독약 세 가지를 골라, 사람이 복용하면 죽을 수 있는 양이 1g이면 2g, 2g이면 4g, 하는 식으로 양을 배로 하여 10g을 제조해놓았다.
친구한테 미안하니 폐를 조금이라도 덜끼치려고 약국 쉬는 날을 기다렸다가 그 전날 밤 22시에 문을 닫고 복용을 했다. 죽는 사람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유서는 쓰지 않고 침묵으로 세상을 뜨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독약을 먹었는데도 9일 후에 다시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님이 와 계시고, 의사들이 왔다갔다하며 무슨 약을 먹었는가 궁금해하기에 말해주었더니, 아마 세 가지 약물이 중화작용을 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약국 일하며 조제기능 배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기차를 타고 가다가 내렸는데, 그 세상이 다 흰색으로, 꽃도
흰색, 모든 물건들이 하얗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아파서 군인들이 많이 서있는 광장에 있는 병원에를 찾아갔더니, 당신은 이곳에서 치료를 못하니까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이제는 서울로 함께 가서 지내야한다고 하셔 서울로 온 뒤 좁은 집에서 한달 정도 있는 동안, 영숙이가 자신의 형부가 춘천에서 군의관으로 있으면서 저녁에는 오승룡 내과병원에서 일을 하는데 간호원을 찾으니 가서 일을 하라고 알선을 해주었다.

내목숨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불가항력을 느끼며 다시 용기를 내 열심히 일을 배우면서 약제사가 없으면 약국일, 검사실에 선생님이 안 계시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배워다.  x-Ray촬영만 빼고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런 나를 원장님 내외분이 아껴주셔서 그곳에서 9개월을 충실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파독 간호요원 모집 신문광고가 여의치 않았던지 시험응모자가 없다며 각 병원으로 전화연락이 왔다. 나는 즉각 그 다음날 가서 시험을 보았고, 한달 동안 해외개발공사에서 강습을 받은 뒤 독일에 오게 되었다.


독일에 간호보조원으로 오다...
 
10월 독일에 도착해 보니, 날씨는 항상 비만 오니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아침&점심은 그런 데로 맛있게 먹었지만, 저녁에 빵을 먹기는 아주 고역스러웠다. 날씨가 우중충해 뜨뜻한 국에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데, 새까만 보리빵에다 치즈를 얹어 먹어야 하니 한숨만 나왔다. 배가 고프니까 먹기는 하지만, 먹고 나도 속이 허전해 퇴근을 하자마자 매번 국수를 해먹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 잘 수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하노버에는 60명 정도의 간호보조원이 오기로 되어 있고 간호원들은 몇 명 되지 않아 한국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은 없었다. 우리 병원은 소아과여서 말 배우는 것에 창피함이 없었다. 병원에 보호자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밥 먹이고, 치료하고, 한 방에 6명 정도를 하루 종일 볼 보아야 했다.

10명의 젊은 여성들이(21-25살) 근무 끝나면 모여 앉아 병동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누며 못 알아들었던 단어들을 독일 간호원들로부터 설명 받았다. 도착해서 일주일 동안밖에 독일어를 배우지 못하고 바로 근무를 시작했으니, 그 당시 독일간호원들은 우리가 못 알아듣는 말을 일일이 설명을 해주어야 했고, 그들은 호기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말도 못 알아 듣는데 근무하려니...
 
처음에 우리는 그저 눈치로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루 빨리 독일어를 습득해야 제대로 알아듣고 실수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저녁마다 10명이 모여서 독일어공부를 했고, 매주 한 번씩 'Volkshochschule'(국민대학)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말을 잘못하니 바보취급을 받지 않을까 생각되어 그럴 때마다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당시의 노동계약조건은 5년. 노동 3년 후에는 간호학교 2학년으로 입학자격을 주었고, 학생월급을 받지 않고 매달 30마르크씩 각자가 내서 제비를 뽑은 다음 녹음기, 카메라 등 살림장만을 했다.

한국에서 떠나올 적에 한국에 있는 은행하고 저축예약을 하고 왔기 때문에 매달 송금을 하면 아버님한테서 얼마를 찾았노라고 연락을 주셨다. 쉬는 날에는 친구들한테 편지를 쓰느라고 항공우표와 편지지에 드는 돈이 용돈에서 꽤 비중을 차지했다.

1년 후 하노버의 각 병원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른 병원의 월급이나 대우가 더 좋은 것 같았고, 한 병원 안에서도 다른 병동이 편한 것 같아 서로 바꾸는 일을 의논하고, 여러 가지 경험담을 주고받은 뒤 헤어질 때는 섭섭해서 눈물들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 병원의 경우는 다 만족해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끼리 병동을 바꾸어 보아야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다른 곳으로 옮기면 새로 다시 일을 배워야 되는데, 이제는 능숙해져서 학생들이 오면 일을 가르쳐 주는 위치에 왔기에 나는 한 병원, 한 병동에서 3년 동안 옮기지 않고 일했다.

3년 후 간호학교를 들어가니 몇 주, 혹은 몇 달만에 이 병동 저 병동을 돌아다녀야 되고, 옮길 때마다 밑에서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되고, 공부도 해야 되고, 소아과라 아이들에게 주의해서 약도 먹여야 했다.

야근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 2주일 계속 혼자서 일을 할 때는 전화받는 일이 힘이
들었는데, 일단 "예예" 해놓고 이것인가 저것인가 한참 생각을 해야 되었으니, 환자들이 어린아이들이라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돌보아준 수녀님은 간호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눈이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고 우리들이 장차 학교를 들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분이 담당을 한 것 같은데, 3년 후 다들 느낀 것은 자기 병동 수간호원의 생김새나 성격들이 우리들하고 비슷한 사람들을 그 짧은 시간(1주일만)에 느끼고 병동배치를 하셨구나 하는 느낌을 하게 되었다.

수녀님들이 다정스러운 분들이라 생각되지만 그 분은 어찌나 총명한지 대하기가 어려웠고, 너희들이 간호학교 2학년부터 들어갈 자격이 있지만 공부하기가 어려울 테니 1학년부터 시작하되 쉬는 날에서 다음 학교 가는 시간을 제외해야 되는데 찬성하는가 물으셨다.
 
근무, 공부... 힘들여 간호사자격
 
다행히도 1학년부터 시작을 했으나, 처음 반 년 동안은 무슨 강의를 하는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하고 골치가 아팠다. 내용은 독일학생의 노트를 빌려서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었고, 1년쯤 지나니 강의하는 것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으나, 우리들 나이가 25-28세 사이라, 독일학생들보다 2-3배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또 휴일이 되어도 편히 쉬지 못하고, 공부생각을 하게 되지만, 공부를 하자하면 곧 머리가 아파 쉬어야 되는 등, 학교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흔해빠진 간호원 자격을 따려고 이 고생을 할 바에야 다른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중단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니 '오퍼레이터'(Operator)라는 컴퓨터 관련 직업이 해볼만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가 1970년. 하노버에는 그것을 배울 데가 없고,  뒤쎌도르프에서 학교를 6개월간 다녀야 하며 자비로 배워야 되는데, 그 동안 계속 송금을 해버려서 모아놓은 돈도 몇 푼 안되어 그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년을 쉰 다음 다시 간호학교를 계속했고, 72년 4월에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광부로 독일 온 남편과 만남...
 
그 동안 한국의 가족은 아버님이 수사범죄서류작성법이란 책으로 성공을 하셔, 형편이 나아져 조그만 집도 장만하게 되었고, 나는 그 걸 계기로 더 이상 집으로 송금을 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간호학교 졸업 후, 이제는 직장도 옮기고 싶고, 내 나이가 30살이 되었으니 결혼을 해야하나, 아니면 SOS 어린이마을에서 보모로 일을 하나 생각중이였다.

독일에서 한국 분들을 서로 알게되는 계기는 1년에 여름철과, 크리스마스 때로 2번이
있는데, 그때 안면이 있는 양재범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나서, 오고 가는 중에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서로 고생한 이야기, 독일에 오게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가 하노버에 방학이 되면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온 것으로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그는 한양대를 다니다가 학비조달을 못해서 광부로 독일에 왔으며, 노동 3년 계약을 마치고 독일의 대학에 입학했다.
 
우연히 만나 고생얘기 하다보니...
 
그러나 나이가 많아 독일 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지원해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 방학 때면 돈을 벌면서 힘들게 공부를 했다. 나는 그가 공부하는 산중도시 클라우스탈-첼러펠트 (Clausthal-Zellerfeld)에 직장을 구해놓고 이사를 한 다음에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렸더니, 속으로는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되니까 정이 들어 73년에 결혼을 하고 77년에 첫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곳은 원래 광산학과가 시초였고, 그 후 공과대학으로 확대된 곳이라, 숲하고 호수밖에 없는 산중이며, 겨울에는 4개월 이상 눈이 쌓여있는 독일에서는 추운 지방에 속한다.

눈이 오래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남편은 유아차 바퀴에 스키를 만들어 가지고 못 가는 곳 없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산보를 다녔으며 그것으로 특허까지 냈었다, 그 산 속의 생활은 남편이 충청도 심신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봄이면 씀바귀로 나물과, 쑥국 등을 먹고, 고사리를 따서 말리고, 여름철에는 산딸기를 따서 잼과 주스를 만들어 놓고, 가을에는 마로넨이라는 우리 나라의 표고버섯하고 비슷하게 생긴, 향기로운 독일 버섯으로 별미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 괴팅엔에 모임이 있을 때는 이 버섯을 따가지고 가서 함께 요리를 해 먹기도 하였고, 근처 호수에는 가재가 많아 삶아서 먹기도 하고 간장에 넣어 가재장을 담아 밑반찬을 만들기도 하였다.

남편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괴팅엔 시에서 열리던 토론회에 열심히 참석했고, 나는 인석(아들)이가 어려서 직장생활하랴, 늦게서 낳은 애를 남한테 맡겨놓고 어디를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정치문제는 남자들만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살았다.

그러나 5·18 광주 항거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게 되고, 이것을 독일 텔레비전에서 직접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 내 고향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남한테 미루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19가 났을 적에 남학생들이 전남여중과 여고 앞길에서 소리를 지르며 "너희들도 나와라" 부르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은 하지 못하고 남편을 통하여 토론내용을 관심있게 듣곤 했다.

그후 김대중씨 구명운동 때에 처음으로 내 이름을 정정당당하게 서명할 수가 있었다. 그 성명서는 당시 독일의 총재였던 빌리 브란트에게 보내어졌다. 서명은 6천명(?) 이상이 했으면 독일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회답을 받고, 독일 각처에서 서명운동을 했으며, 독일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만장일치로 성명서에 찬성을 했다.
 
5·18 소식 듣고 내 고향 광주 생각
 
빌리 브란트 총리의 관심과 성명서는 현 김대중 대통령이 생을 보전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모르고 있는지, 2년 전 대통령으로서 독일을 방문했을 때 빌리 브란트의 묘라도 한 번 찾아보지 않고 돌아가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남편은 흥분하기도 했다. 우리가 독일국회 자료실에 그때의 회의내용 자료를 요청했더니 몇 시간만에 회의진행 토론결과와 우리가 보낸 성명서까지 모든 서류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기계과를 졸업하고 우리는 에쉬보른 이라는 시로 이사를 했는데,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에 자주 모였고, 인근도시에 있는 한국사람들과 왕래가 잦았다.

그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한국여성들은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대게 2주일 한 번 쉬는 날이면 집안 일도 해야하고, 아이들도 키워야했으며, 풍족하지 못하는 경제 속에서 피곤한 몸으로 직장에 나가는 여성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가정 일만 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더 자주 오게 되었다.

괴팅엔, 뮌헨 그리고 베를린과 독일 각처에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김치와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나서 토론도 할 수 있다 하여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여자들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데도 생색은 남자들이 다 내곤 했다.


독일에 심은 한국음식의 맛...

올해 10월이면 나는 36년간 독일에 산 셈인데, 먹고 싶은 독일음식이 없으며 우리 음식, 더욱 김치는 2일만 안 먹으면 속이 허전하고, 느글느글해서 밥을 안 먹은 것만 같다.

겨울에 김장을 하기 위해 벌써 4-5월에는 생멸치를 사다가 멸치젓을 담는다. 청국장도 자주 해먹는데 콩을 삶아 스팀 위에 담요를 씌워 놓아두면 5-6일 후면 실이 나와 먹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을 아들 방에다 놓아두었더니 아들은 냄새가 난다고 제 방에서 안자고 우리 침대에 오곤 했는데 서로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방에서 냄새가 나서 통풍을 오래 해야했다.

그래서 지금은 상자를 짜서 25촉 짜리 전구를 켜고, 시간조절기로 시간을 조정해 온도를 25도로 해놓으면, 3일이면 실이 나온다. 그러니 빨리 숙성이 되어서 좋고, 밖에 내놓고 할 수 있어 냄새가 안나니, 일종의 발전을 한 셈이다.
 
청국장·김치 식도락 즐겁기만...
 
겨울동안 김장김치 썰어놓고, 돼지고기 조금에 두부를 넣어 청국장찌개를 끓이고 깍두기와 먹으면 한 겨울 건강에도 좋고 맛이 있어 식사하는 시간이 즐겁기 그지없다.

74년에는 아직 아이가 없어서 텐트를 가지고 스페인 여행을 갔다가, 바르셀로나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에브로 강과 지중해가 합쳐지는 곳에 '리오마(Riomar)'라는 곳에 들르게 되었다.

물이 출렁출렁 잠겨있는 넓은 논에는 벼가 파랗게 심겨있고, 밭에는 참외, 수박, 가지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어 한국의 시골풍경 바로 그대로였다, 시골사람들이라 인심도 좋아 밭에서 직접 참외를 사면 우수를 집어주는 곳이다.

그곳은 햇볕이 쨍쨍 내리쪼이고 채소과일이 푸짐할 뿐 아니라, 마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해물은 어렸을 적에 고향에서 먹었던 갈치, 꽁치, 조개, 맛, 바다고동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처음 갔을 때는 집도 몇 채 없고, 바닷가에 조개잡는 어부 외에는 사람을 볼 수도 없었다. 우리는 매년 휴가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들렸다가 얼마나 발전됐나 보곤 하는데, 84년도에 들렸을 때는 집들을 많이 짓기 시작했고 조그마한 도시가 되어 길도 나고 가로수도 심는 중이었고, 벌써 이주해와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져 바로 계약을 하고 집을 샀다.

겨울 휴가철에 우리 집이 된 곳이다. 남편이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오면 소금간을 쳐서 햇볕에 말려 가지고 온다. 또 그곳에서 한 시간쯤 차를 타고 큰 항구로 가면 오후에는 들어오는 고기잡이배들이 다양한 생선종류를 싣고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밤에는 전지를 가지고 가서 바닷게를 잡아서 그것으로 게장을 담아온다.

겨울철에는 오렌지가 제일 맛있는 때라 50Kg씩 사 가지고 독일에 돌아와 친지들과 나누어 먹고 쨈을 만들면 아주 향기로운 별미가 된다. 그곳은 쌀이 나는 곳이니, 방앗간에 들려 우리가 먹는 쌀 비슷한 쌀을 사겠다고 하면 그때 바로 정미를 해준다.

여름철 3주, 크리스마스 2주의 휴가는 짧은 기간이라 우리는 늘 아쉬운 마음으로 독일로 돌아오게 된다. 겨울철에는 에브로(Ebro)강 상류로 강낚시를 가는데 독일에서 휴가 온 독일 사람들은 매기, 흑도미를 잡아오면 빵가루를 묻혀서 기름에 튀기는 요리 외에는 할 줄을 몰라 몇 마리씩 우리에게 선사를 하면 흑도미는 살이 쫄깃쫄깃해서 회로 먹으면 아주 맛이 있다.
 
한국 채소·버섯 현지인도 좋아해
 
스페인 생활에 반해서 스페인어를 배우러 학교에 다니고, 말이 통하니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86년부터는 뒤셀도르프 근처인 크레펠트로 남편이 직장을 옮겨 경제적 형편도 풀리고 집도 독채를 빌려 살았는데, 정원이 아주 넓어서 온갖 한국의 채소씨를 부쳐와 여름철 내내 채소를 사지 않고 한국의 채소를 주위 친구들과도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상추, 오이, 쑥갓, 파, 부추, 깻잎, 배추 그리고 싸리버섯도 재배하고, 독일에서 표고버섯이 좋다고 하여 씨를 사다가 통나무에 뿌려 놓으면 7년 동안 3번 수확을 할 수 있었다. 닭까지 키워 계란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계란을 사겠다고 일부로 오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에서 나는 채소는 별로 먹고 싶은 것이 없다. 병원근무는 매달 3-4일만 대기근무를 했기 때문에 시간여유가 있어서 밭농사 짓는 것이 아주 즐거운 취미의 하나이다.


김치·된장국으로 여생 보내는 게 소원...
 
우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이요법 상담소에 1년 반을 근무하다가 독일 경기가 나빠지자 후계자를 찾기에, 나는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에 질병에 대한 지식도 있고 해서 94년 9월에 상담소를 인계받았다.

내가 하는 일은 체중이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다이어트를 통해 체중을 감소시키는 식단을 짜주고 상담을 하면서 체중을 조절하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독일식의 체중감소의 영역을 넓혀 감자, 과일, 채소를 자주 먹는 것에 중점을 두고, 고기를 적게 먹는 방법으로 고쳤다.

독일의 의료보험제도는 보험료가 비싼 대신 혜택이 넓고 많은 장점이 있으나, 치료를 받을 때 개인이 따로 부담하는 경비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건강을 소홀히 하는 단점도 있다.
 
독일식 식습관 비만 위험커
 
독일은 빵이 주식이라 빵에 버터나 마가린을 바른 다음 치즈나 소시지를 얹어먹고, 채소요리를 할 때도 기름을 넣어서 요리를 하기 때문에 고기 외에도 지방을 많이 먹게 되며, 독일 사람들이 즐겨먹는 케이크에는 기름뿐만 아니라, 설탕까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체중이 늘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식물에 요오드가 적게 들어있어 신진대사가 잘 안되어 갑상선 기능부진이 많기 때문에 단지 다이어트를 해서 체중을 줄이기는 어렵다.

우리 연구소의 특징은 유사요법을 기반으로 하는 약제를 주사하여 신진대사를 돕도록 하는 방법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8년 동안의 경험이 말해 주는 것은, 당뇨병 환자들이 이 요법을 받을 경우, 음식을 적게 먹어도 혈당을 정상으로 유지할 수 있어서 쉽게 체중을 줄일 수 있고, 적게 먹으니까 인슐린을 적게 맞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이 주사약에는 9홉 가지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Ca, K, 등이 들어 있어 갑상선 부진 환자들에게 효과가 아주 좋다. 그러나 주사의 효과는 다이어트 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지 단지 주사 만 가지고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지만 독일 사람들은 자기 건강을 위해 개인적인 지불을 하는 습관이 없는 데다, 이것이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병치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5년 동안은 수익이 적어 현상유지하기에도 아주 어려웠다.

힘든 육체 노동은 아니지만 고객들이 아무 때나 시간이 있을 때 찾아 올 수 있도록 연구소를 열어 놓고 있어야 하니 나의 자유시간이 주말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이 고령이셔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어도 1-2주일은 남에게 맡겨 놓을 수가 있지만, 이왕 한국에 간다면 2-3개월은 있고 싶어 적당한 시간을 찾으며 자꾸 미루는 바람에 벌써 한국에 다녀 온지가 18년이나 되어 버렸다.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두부요리 학원을 다이어트 연구소와 함께 경영하는 것이다. 이곳 독일에도 이제는 콩으로 만든 요리가 건강에 좋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고, 더욱이 갱년기 여성들에게 필요한 식물성 호르몬이 들어 있어 두부 요리책도 나오고 있고, 사람들도 두부를 많이 먹으려고 노력을 해서 두부공장도 많아 졌다.
 
한국음식 활용 식이요법 개발 꿈
 
그러나 한국식 된장이나 다양한 두부요리방법 같은 것은 아직 미미한 편이라 나는 생선요리와 함께 이런 것을 직접 가르쳐 줄 수 있는 요리학원도 함께 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당뇨병 환자에게 몸무게와 인슐린 투약의 양을 줄이게 하는 우리의 유사요법 혼합약제의 효능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연구소의 방법으로 체중을 줄인 환자들의 보고서를 모아 당뇨병 전문연구 치료기관에 알려 다른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의 바람은 독일에 살고있는 친구들과 함께 나이 들어 혼자의 힘으로는 생활할 수 없을 때 김치, 된장국, 밥을 먹고서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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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암담했던 '서울의 봄' 뒤로하고

강여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내가 독일에 온 것은 80년 3월, 박정희가 암살된 후 불확실한 희망이 존재하던,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최루탄 가스와 휴교령이 반복되던 대학시절을 등뒤로 나는 조금은 도망가는 심정으로 유학을 택했다.

박정희 정권의 병영화한 사회에서,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구호와 함께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 그것을 위해 노동자의 인권이 참혹하게 짓밟히고, 모든 비판적 목소리가 빨갱이로 도장 찍히는 숨막히는 사회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단속을 피해야 하고,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에 불안해하면서, 남자친구들이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군대에 끌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비굴을 강요당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가난하고 초라했던 우리들의 야학이 폐쇄되는 것을 겪으면서 나는 무기력과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숨막히는 억압 피해 무작정 유학길
 
한국어를 한 마디로 못하던 서양 신부가 교정을 배회하며 민들레를 유해한 잡초라고 뽑아대던 미국식 대학의 영문과에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갓 돌아왔다는 선생이 수업시작 전에 창 밖을 내다보며 "What a beautiful day!"를 남발하고, 일년도 안 되어 제자에게 대리번역을 시키는가 하면, 인상깊은 강의를 하던 한 교수가 갑자기 청와대를 드나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대학을 잘못 택한 것인지, 대학이 모두 그런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졸업 후, 취직하여 사회에 편입되는 것에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학문에 대단한 정열이 있던 것도 아니면서, 우리의 소박했던 70년대 민주화의 요구를 남겨두고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일단 한국을 떠난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나는 문학이라는 재미 외에는 별 애착이 없던 영어를 버리고 독일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택했다. 영어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리라는 어찌 보면 황당한 고집과, 철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한국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유럽의 한 나라, 독일을 택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본 것만이 아닌 다른 것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희망과 함께, 개인의 독자적 삶을 포기하고, 사고와 행동의 틀을 규격 속에 집어넣으라고 강요하는 국가적 횡포와 사회적 강요를 거부하고 떠나는 것은 정당하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 변명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떠나는 자의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던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떠남이 그저 단순한 선택일 수만은 없던 배반의 느낌이 거기에는 있었다.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그 중에는 누구보다도 정신과 몸의 외유가 필요한, 보다 성숙한 사회적 참여를 위해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외국을 드나드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고, 유학생들조차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값싼 방학휴가 정도로 인식되는 요즈음에는 이런 심리적 콤플렉스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채 여행의 자유도 없고, 여권 하나 받는 일이 몇 달 씩 걸리고, 유학시험이라는 것이 있던 70년 대 말에는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특권의 획득이란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가방하나 들고...
  
그런 단순하지 않은 심정으로 나는 JAL기를 타고 일본, 알래스카를 돌아 하루 이상이 걸린 긴 비행 끝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와 줄 사람 하나 없던 나는 무거운 짐을 끌고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 도착해 나를 독일의 남쪽 끝 푸라이부르크로 실어다 줄 기차를 기다리며, 냉한 습기에 얼어 있었다.

먹이를 쪼는 살찐 비둘기들, 공기 속을 떠다니는 금속성 섞인 낯 선 기름냄새와 볶은 양파의 냄새. 지붕 덮인 선로를 들어오고 나가는 육중한 기차의 움직임.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서툰 독일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중년의 독일 여자. 그녀의 낡은 긴 부츠와 지푸라기 같이 윤기 없는 짧은 머리카락, 그리고 알코올 중독기미가 보이는 부석거리는 얼굴과 거칠고 붉은 손. 그러나 아주 따뜻한 느낌의 미소. 그녀는 야근을 한 뒤 아버지 장례식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너는 어디서 왔냐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조금 전 도착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오랜 노동과 거친 삶의 흔적이, 그러면서도 당당해 보이던 모습에 적잖이 감동되어 있었고, 아주 좋은 출발이란 느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잖은 행운 속에 공부시작...
 
내가 철학공부를 시작한 프라이부르크시는 아름답고 전원적인 도시 중의 하나다. 독일 환경운동의 진원지로 중요한 환경연구소가 있고, 흑림지대(Schwarzwald) 속의 문화중심지로 음악, 법학, 환경학·신학(가톨릭) 등이 명성을 누리고 있다. 또 프랑스와 스위스에 인접한 국경도시여서 주말을 이용, 여행하기도 좋다.

아무튼 그 시에서 시작한 독일 생활은, 자기암시인지 모르나, 처음 말을 나눈 독일 여성이 빌어준 행운이 적잖이 따라와 주었다는 느낌이다. 번잡한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도, 대학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곳에 값싸고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었던 것. 방의 전 임대자가 쓸만한 가구들을 많이 물려주고 가 시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오로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었다. 첫 일년은 모든 것 제치고 모자라는 독일어만 배우기로 했기 때문에 전공에 대한 압박도 없었다.


첫 일년 '시선의 지평' 열리고...
 
그런데 독일어는 어떻게 배운다? 문법이나 독해력은 혼자서 책을 읽으며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어학과정은 나처럼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언어준비를 하는, 세계 도처에서 온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어, 잘하고 못하는 것이 도토리 키재기 정도였기 때문에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독일의 첫 해에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대학이라는 특수한 영역말고도 독일 어디에서나 흔히 보게 되는 수많은 외국인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일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외국인의 경험이래야 미군과 일본관광객 정도가 거의 전부였던 70년대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독일이 가진 풍요함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의 경험에서 차단되어 있었던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나라와 인종이 있는가, 그것을 한 나라 안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제한적일 지라도 얼마나 시선의 지평을 열어주는가,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느낀 자유로움이나 풍요로움은, 한국을 떠나있다는 단순한 사실과 독일에 대한 문화적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그 첫 일년은 나에게 유년을 제외하고는 가장 빛나던 시간이었다.

오전에만 있던 수업이 끝나면, 책 읽고 산책하고, 친구들 만나 놀고, 주말에는 한국학생들과 한국음식 비슷한 것도 해먹곤 했다. 그리고 야외로 나가 주변의 농가와 포도밭 사이를 달려보려고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다.

일년 생활비 외에 준비된 게 없던 나에게는 상당한 거금이었으므로, 저녁에 대형 슈퍼마켓을 청소하여 보충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 동안 등에 땀이 흐르도록 빠른 동작으로 큰 매장을 청소하고 난 뒤 자전거로 어둠을 타고 집으로 향할 때의 행복감과 외로움.

낯 선 나라의 낯섦은 많은 점에서 나에게 정신의 활력소가 되었다. 낯 선 것이 언어뿐이었던가! 사람의 얼굴, 옷매무새, 몸 동작, 생활습관, 그리고 심지어 집의 모양과 길거리의 구조, 건물의 배치형태 등에서 나에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전혀 의미로 전환되지 않음을 경험하는 경이로움.


기존관념 괄호에 넣고 공존터득
 
보고 듣는 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어린애가 된 것 같고, 의미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자꾸 헛걸음질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답답함이기도 했으나, 기존의 것들을 일단 괄호 속에 넣고, 모든 것을 다시 질문하는 자세로 대응하게 하는, 어쩌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다.

그 기회를 내가 생산적으로 이용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나에게 삶의 지침을 하나 형성시켰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자신의 입장을 상대적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과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의 주장은 항상 의심해볼 것, 인간과 인간 사이, 세계의 상이한 문화들 사이에는 이해의 한계가 있음을 기억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할 것. 이것은 언뜻 소극적인 자세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모든 면에서 내 것을 버리지 않고도 타인과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닐까?



'자율 교육'의 나라에서 아이 키우기...
 
전공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학과정 중에 알게 된 독일학생과 결혼을 했다. 교사지망생이었던 그가 교사 연수과정을 끝내고 하이델베르크 인접도시의 고등학교로 부임을 하게 되자 우리는 프라이부르크를 떠나는 것이 섭섭했지만,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생활은 그저 학생의 신분이었을 때와는 달리, 가정을 갖고 아이를 기르는 일도 함께 해야하는 분주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교육은 거의 실험에 가까웠다.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그 외의 상급학교를 거쳐가며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사전 지식이나 경험 없이 이곳 교육제도의 장단점을 경험해야 했다.      

만 6세부터 다니기 시작하는 초등학교에서, 특히 1~2학년 때에는 모든 교육과정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국어(독일어)를 대충 읽고 쓰는데 2년이 걸렸다. 우리나라처럼 영아교육이니 뭐니 해서 취학 전 아동에게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외 성적순 없고 논술훈련 중심
 
한국식의 극성 조기교육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이곳은 아이들의 문자교육 시기를 너무 늦추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그 외에도 교사가 아파 결근을 했다며,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숙제도 20~30분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적은 양에 불과했다.

나는 도대체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를 안하고도 되는 것인지를 의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해, 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과 관련, 시험을 보고 성적을 매기기 시작했다.

우리의 교육과 아주 달랐던 것은, 맞춤법도 제대로 다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 글짓기로 국어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수업참가태도를 제외한 시험은 모든 과목에서 논술형으로 진행되었고, 사지선다형의 답안 고르기 형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후 모든 상급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대학입학자격시험도 논술과 구두시험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교육제도와 교육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상이한 한국과 독일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며, 오해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많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가 쉽지 않은 교육의 내용과 효율성의 문제는 제외하고, 몇 가지 일반적인 교육환경의 차이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곳 학생들이 학교수업과 집에서 숙제 등으로 소비하는 시간은 대략 한국의 1/3 정도이다. 방학은 즐겁게 노는 것이며, 방학숙제는 없다. 여기도 과외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낙제의 위기에 처한 소수의 아이들을 위한 비상책이다.

아이들에게 $너 학교에서 몇 등이지?^ 라는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이곳도 가정환경에 따라(예를 들어 부모 교육수준의 높낮이) 학생들의 성적이 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교육의 기회균등이 이루어져 있어, 돈 없어 공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생들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또 학생들은 나이와 함께 제 권리를 알아 주장하게 되므로 아이들의 진로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인 기대나 강요는 거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교사는 절대로 학생들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이것은 간단히 신체손상에 대한 형사소송감이 된다.


약물중독 극우폭력 휩쓸릴까 우려
 
학생들 사이에 학년에 따른 선후배의 관념이 없고, 학교에 따라서는 고학년 학생에게 저학년 학생의 보호 및 상담자의 역할을 맡게 하는 제도를 두기도 한다. 아이들은 일찍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배우며, 따라서 나의 권리와 남의 권리를 인정할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천국이 없듯이 이곳의 문제점도 많이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마약과 알코올 중독문제, 가출청소년들의 문제, 방향감각을 상실한 청소년들 중에 극우조직이나 신나치조직 같은 것에 들어가 외국인 및 장애자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독일 전체 인구의 약 9%에 해당하는 외국인, 그들의 자녀 중에는 독일어가 불충분하고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열의 부족으로 상급학교 진출이 부진하여 노동시장에서의 질적 경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이런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눈을 감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독일은 광범위한 교육개혁의 필요를 인식하고, 그 방향과 방책을 논의하고 있다.


15년째 아이 데리고 한글학교 가며...
 
하이델베르크 한글학교는 이 지역에 사는 한국교민들이 2세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16년 전에 창립을 하였다. 나는 창립의 소식을 듣고, 그 다음 해 다섯 살짜리 큰 아이를 데리고 한글학교를 찾았고, 그 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매 주 토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한글학교에 나가고 있다. 나는 두 아이가 아버지 나라인 독일 외에, 어머니 나라의 한국과 한국문화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며 성장하게 해 주고 싶었다.

이제 20살인 큰 아이는 3년 전에 한글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둘째만 다니고 있으나, 나는 6년 째 한글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어, 소위 근무를 하고 있다. 교장이라고 해서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의 학생수도 지금은 30명 정도의(학생들이 많을 때는 60명까지도 되었었다) 작은 주말학교에 불과하여 교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긴 하지만, 나에게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곳이다.
 


고국선 '영어 공용어' 논란이라는데...
 
그 투자의 결과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한글학교를 통해 자라는 아이들이(나의 아이들도) 한국어를 할 줄 알며, 한국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한글학교는 자발적이며 비영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립교육기관이라고 그 성격을 말할 수 있다. 독일 전역에는 현재 36개의 한글학교가 있고, 그 규모는 학생수가 600명에서 10명까지 천차만별이지만, 한국교포, 유학생 그리고 한독가정이 중심이 되어 자녀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전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한국에서조차 자신의 언어를 홀대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니, 한자교육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이곳 한글학교의 학부모와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문화적 자아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년 전 독일인 두 부부가 각각 딸과 아들을 데리고 한글학교를 찾아 왔었다. 이 두 부부는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서 길렀다며, 한글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게나마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미 열 여섯, 열 일곱의 다 큰 청소년들이었지만, 2년 정도 한글학교를 다녔고,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아보려는 노력도 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큰 도움은 줄 수 없었으나,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덜어 주지는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입양아로 와서 성장한 한국계 독일인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찾아오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학교는 학부모가 내는 소액의 수업료로는 유지가 될 수 없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하이델베르크 시에서 열리는 거리축제나 외국인 축제에 참가하여 한국음식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 행사에는 학부모와 교사가 모두 참가하게 되는데, 하루 종일 서서 음식을 팔다보면 온 몸이 뻣뻣해질 정도로 힘이 든다. 그러나 이것에서 나오는 수익이 적지 않고, 김밥, 잡채, 튀김 그리고 김치 등, 한국음식의 맛보이기 뿐 아니라, 이곳에 한글학교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연중행사의 하나가 되어 있다.
 


'문화적 자아'·'문화적 다리' 고민
 
대체로 외국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각 지역에 사는 한인들과 그 자녀들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유지하는 하나의 길이지만, 한국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세계화란 말을 세계시장의 점령이란 투쟁적 의미가 아니라, 네 것과 내 것을 함께 인정하는 공존으로 이해한다면,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그 거주지 문화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 것을 전파하는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리란 오고 가기 위해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흐름은 가능하지 않다.

나의 희망은 우리의 자녀, 자녀의 자녀들이 세계 곳곳에 살면서도 자신의 한 뿌리인 한국을 잊지 않고, 그들이 몸담고 살고 있는 곳곳에서 반성적이며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우리의 후세들이 세계 다양성의 담보자로서, 상이한 문화의 중개자로서 전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이방인이며 소수민족의 일원인 나
 
나는 현재 하이델베르크시 '외국인 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5년 전부터 의원으로 일해 오다가, 올 6월에 의장직을 맡게 되었다. 외국인 의회는 외국인 거주자들(시 전 주민의 13%)에 의해 직접 선출된 16명의 외국인 의원과 7명의 시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정치적 협의체로서 시의 자문기관이다.

이곳엔 독립된 작은 건물과 자체 예산을 가지고 있고, 의장의 사무를 보좌하는 비서 한 사람이 있다. 의원들은 시의회 의원과 마찬가지로 명예직으로 일하며 약간의 활동비를 받게 된다. 예산의 대부분은 외국인을 위한 정치활동 및 행사에 지출이 된다.

우리 외국인 의회의 과제는 외국인들의 의사소통기구로서, 시민단체 및 외국인단체들과 협력하면서, 시의 행정부와 시의회를 통해 외국인이 받는 부당한 대우나, 외국인 적대 행위 및 정책 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이 자신의 뿌리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공간과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외국인의회 의장하며 차별 실감
 
우리의 기본 입장은, 독일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란 독일의 국체를 존중하면서, 우리가 소수자로서 이 사회의 동등한 일원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의 권익을 침해당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전체 인구의 약 9%나 되는 외국인이 살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이주해온 구 소련 및 동유럽에 살던 독일계 이주민과 그 동안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이주민들까지 합치면 10%가 훨씬 넘는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외국인은 독일 국적이 아닌 외국국적을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데, 이들 중에는 이미 20~30년을 독일에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는 이들이 외국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한 이 사회에 정치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전혀 없다는 데에 있다.

연방의회는 물론, 주의회나 시의회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모두 없다. 그러나 이런 외국인들은 독일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세금을 내며,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인 모든 형태의 보험료를 다 지불하고 있다.

시민(시티즌)이란 말이 애초에 "세금을 내는 자"라는 규정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한다면, 병역의무 외에 모든 면에서 의무를 다 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연방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의 참정권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나, 지금까지 그것이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로 독일에 온 이주민들은 살기에 바빠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별로 없기도 했으나, 독일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언젠가는 돌아갈 잠정적인 체류인 정도로 생각하면서, 독일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융화정책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이주민들의 2~3세가 성장하고 있고, 여러 지역에서 일종의 게토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중 상당수의 이주민 자녀들은 독일어가 짧아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지 못하며, 그 결과로 노동시장에서는 저임금 노동이나 실직자로 밀려난다.

독일에선 4년 전에야 보수적 기독교민주당의 16년 장기집권이 끝났다. 사회민주-녹색당 연합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자신이 이민국임을 인정하고 외국인에 대한 적극적인 이민 정책을 계획하고 있으나, 노동 1세대, 2세대의 문제들은 여전히 누적된 채로 남아 있다.


"신뢰보다 감시가 더 좋은 것"
 
나는 독일에 살면서 비교적 잘 운영이 되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없이는 종이 위에 쓰여져 있는 것에 불과하다. 독일의 격언 중에, "신뢰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감시는 더 좋은 것이다"란 표현이 있다. 감시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운영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관여하고 간섭하는 일이다.

내가 외국인으로 이곳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권리란 스스로 찾고 보존하지 않을 때는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이 비록 작은 지역 사회이지만, 외국인을 대표하는 일이라는 것이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그래서 가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앞으로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란 회의가 일기도 하는데,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스스로에게 주는 기회라고도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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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독일 적응하자 찾아온 '향수병'

한정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재독 한국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국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으로 시작됐다. 80년도 중반에는 한국 및 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관광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세미나 등에 참가했고, 한국의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운동이 계기가 되어 90년부터 정식회원이 되어 지금까지 여러 활동에 참여해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50년 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정신대" 문제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는 사실이 독일 매스컴에 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 "정신대" 문제를 알게 되었다. 사태를 이해하자 잔혹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그 후 나는 정신대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정대협과 협력하며 독일 내 여론 형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우리 여성모임들의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재독 한국여성모임, 베를린 일본 여성회, 독일의 여성단체 및 인권단체들과 종교단체, 개인 및 타 단체 등과 더불어 일본 정부에 <편지 보내기 운동>, 일본의 상임 이사국 가입반대 서명운동, 베를린 정신대 국제행사, 할머니 증언집의 독일어 출간, 베를린 영화제에 "정신대 영화" 상영과 토론을 주최했다.

2000년은 정신대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의 최고봉이었던 도쿄의 <국제여성법정>을 위한 준비와 행사의 참여로 분주한 한해였다. 2000년 법정지지 서명운동(14,000명 서명), 김학순 할머니의 포스터에 지문찍기(4000여명)-그 포스터는 2000년 도쿄법정 때 회의장 출입구에 걸렸다-, 2000년 도쿄 법정 참가 후에는 독일에서 "보고강연회"가 있었다.
 
그 밖에도 작고 큰 여러 행사를 회원들과 함께 개최하고, 정대협과 연대하면서 근 10년 동안 정신대 할머니들의 존엄과 명예를 되찾는 운동을 해왔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재독 한국여성모임>의 한 분과로 정신대 문제해결을 위한 "국제연대소위원회"의 대표직을 맡을 정도로 관심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그 동안의 우리 노력으로 인해 독일인들의 관심과 도움을 끌어 낼 수 있었으며, 지금은 정신대 할머니의 비참한 운명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독일인들 중에는 일본 사람들이 정직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시 보아야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2001년 헤이그 법정이 내린 최종판결 후에도, 온 세계인이 일본의 양심을 지켜보고 있는 순간에도, 파렴치한 일본은 손해배상은커녕 정신대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증인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염원하며 이를 위해 계속 운동을 해야 할 터인데, 지금의 분위기는 이제 '끝났다'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독일에서 산  35년.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다. 아들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 활동을 꿈꾸고 있고, 약하던 딸도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다. 딸은 통일 직후 동독의 무용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몸이(160cm, 45kg인데도) 뚱뚱하다고, 고전무용의 성적까지 좋게 받지 못했다. 동독출신 선생들과의 의견 차이는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할 얘기가 많다.
 
인종차별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하게 말할 물증이 없었다. 우리 딸은 지금은 고전무용보다 모던 무용가로서 활동하려 하고 있다. 아이들은 둘 다 예술분야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택했고, 자기들 나름대로 열정과 욕망,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부모로서는 자식들이 안전한 직업을 갖고 무난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미래가 불확실한 예술분야를 추구하는 아이들 때문에 가끔은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아이들은 제 삶을 살아갈 것이고, 남는 것은 나와 남편뿐일 것이다. 이제는 남편을 보면 종종 내가 독일인하고 산다는 느낌이 없다. 그것은 고난과 고통을 나누는 함께 나눈 인간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이 글을 끝내려니, 독일에 있는 남편의 가족들과 자주 만나 따뜻한 정과 사랑을 교환하지 못했던 부족함이 나를 아쉽게 한다. 그리고 이미 이 세상을 별세하신 한국의 부모님과 오빠와도 서로 주고받지 못한 정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2000년에 돌아가신 오빠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쇠약한 딸 때문이나, 경제적 이유로 부모님의 병가 때나 장례식에 참석 못한 것도 후회 막심하다. 해소되지 않는, 습관적 그리움에 젖어 있는 타국에서의 인생, 이것이 이방인의 삶인 것일까?

병원에서의 근무는 그야말로 작은 투쟁이었다. 병실동료인 막달레나 보조간호원은 나에 비해 덩치가 5배나 되고, 키도 두 배인 뚱보로, 우레 같은 큰 목소리로 긴 복도 중간에서
‘정로’가 아니라 ‘쌍노오’라고 나를 불렀다. 나의 부족한 독일어를 무기로 그녀는 정식간호사인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환자가 벨을 눌러 변기나 가래통을 치워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내가 예의 있게 선심을 써서 갔더니, 그녀는 그 뒤 갈 생각을 않고 벨이 눌러지면 나를 찾았다. 그러면 나는 가끔 큰 목소리의 그녀를 무시하면서 화장실에 앉아 그녀가 갈 때까지 기다린 후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점차 나는 분통이 터져 어느 날 나도 모르게, “Du gehen(너 가라)!”라고 병실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쳤더니, 사람 앞에서는 얌전하게, 뒤돌아서 소곤소곤 욕하는 것이 습관화된 독일 간호사인 그녀는, 정면으로 소리치는 것에 당황해 눈이 휘둥그레져서 병실을 나갔다. 그 후 환자들이 나만 보면 스스로 변기를 비우고 싱글 벙글거리며 보스가 온다고 농담까지 했다. 이때부터 참을성이 없어지면서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분통 터뜨렸다 ‘보스’ 별명


어느 날 말이 적은 병실과장이 함께 환자 진찰을 끝낸 뒤 나에게 “내가 배가 아플 때 당신은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왜 지가 배가 아프면 배가 아프지 내 골치가 아파?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말을 들은 간호사들이 킥킥거리며 웃어대어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키가 2m나 되는 과장 배에 당신 머리가 닿으니까, 과장이 배가 아플 때 당신은 골치가 아프다”라고 설명을 해줬다. 평소에 정중한 과장의 농담이라 화를 내기도 어려워 좀 시무룩했더니 간호사들은 내 눈치를 보며 그날은 나를 기숙사로 일찍 보내주었다.

1년이 지나자 힘들었던 독일인의 얼굴 구별, 언어, 간호사들과의 이해가 나아지면서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3년 고용계약이 아니었고, 송금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일을 다 뿌리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을 만큼 넘기기 힘든 고비였다.

근무를 한지 일년 후부터 병원 측은 해마다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 되면, 병원직원 및 한국 간호사(한복차림)들과 함께 서베를린시의 노동자 단체들과 노동조합, 정치가와 언론인,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시가 행진을 했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르는 장벽 앞, 비어있는 옛 국회의사당(Reichstag) 앞에서 5월의 데모연설을 벌였다.
 
동서장벽 무너진 날 감격

노동자 및 노동조합에서는 근무시간의 축소와 임금인상, 병가 때의 임금지불을 요구했으며, 베를린 시장은 장벽을 비판하며 장벽을 넘어서 서베를린에 오는 동베를린 시민에게 사격을 하지 말라고 동독에 호소했다.

1949년 이차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리되었다. 동독과 동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50년 중반에는 베를린 장벽화(Berlin-Blockade)를 선언하면서 서독에서 동독을 거쳐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던 식량공급까지 막았다.

미군은 서베를린 시민들의 굶주림을 막기 위해 비행기로 서베를린 시민에게 식료품을 수송했다. 그 후 소련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왕래를 금지할 것이란 소문이 돌자 많은 동독, 동베를린 시민들은 몇 개월을 계획해 비밀리에 여행자 비슷하게 위장해 조그만 가방으로 수 차례 이사 짐을 옮기면서 동독보다 부유한 서베를린으로 정착을 했다. 이들 중에는 71년에 결혼한 내 남편과 그의 가족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58년에 서베를린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 후 1961년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세웠고, 89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 까지 장벽을 넘어가는 동독의 시민들을 무차별 사격했었다. 89년은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지는 감격적인 해였다. 나는 베를린에 살면서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고, 그때 많은 한국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빨리 통일이 될 수 있기를 염원했다. 동서독의 통일은 갑자기 우리에게도 남과 북의 통일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했었고, 통일에 대한 관심을 확대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 병원에서의 3년 후, 늙은 간호사들이 많은 결핵병원을 떠나 대학병원으로 옮겨오니 기대한 젊은 사람들은 없고 무뚝뚝하고 말이 적은 동료들만 있었으나, 근무일은 한국과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다. 2차 대전 후 노인들의 도시로 유명했던 서베를린은 서독 내의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베를린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그래도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할머니들이 수두룩했다.  

71년 가을 나는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독일인은 외국인들에게 호기심이 많았다. 쇼핑할 때나 버스에서나 말도 잘 걸었고, 내가 무엇을 질문할 경우 친절히 대답도 잘 했다. 그러나 겨울철은 항상 어둡고 침울하여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해도 적적하고 지루한 생활은 계속되었었다.
 
67년 말, 송년 파티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은 당시 공과 대학생이었다. 향수병으로 시달리며, 절과 같은 결핵요양소에서의 근무는 사람을 너무 외롭게 만들어, 비록 그에게 첫 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나면서 적적함을 달래곤 했었다.

나는 당시 3년 계약이 끝난 상태였으나, 한국의 집안형편 때문에 송금은 계속되어야 했고, 돌아갈 조건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혼하겠다고 내가 한국에 남편의 사진을 보내자, 그것을 보신 아버님은 독일이나 한국이나 좋은 사람은 어디고 똑같다는 말만 하셨고, 어머님은 그저 침묵만 하셨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멀리 시집을 갈 사람이라고 무당이 말을 했다고 했다). 남편 쪽도 우리의 결혼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일찍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고 있었고, 아들에게는 시아버님의 직업을 따라 의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공대 기술계통을 택해 서운한 입장이었는데, 거기에 "외국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반갑지 않은 듯했다. 그저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형식적인 친절로 승낙을 한 것 같았고, 독일은 이혼을 자주 하니 두고보자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우리는 한국의 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독일식으로 결혼의 과정을 밟았다.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처음 호적관청에서 공고가 있었다. 결혼식 전에 신랑신부의 이름과 주소, 결혼식 날짜 등이 호적관청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실렸다. 이유는 신랑신부의 결혼에 이의나 문제제기를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즉 비밀로 이미 결혼을 했거나, 이혼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중으로 결혼하는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관청에서의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랑증인과 신부증인 등 소수의 참석으로 공무원이 주례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관청에서의 결혼 후에 다시 교회에서 성대한 혼인예배를 보게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했고, 나는 그것을 위해 세례까지 받았다.

신혼여행은 경제상의 이유로 서로가 포기했다. 그 즈음 남편은 공과대학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이 지금 31년째가 되었다. 독일 친구들로부터 가끔 "너도 징그럽다. 어떻게 똑같은 남자랑 아직도 사나?" 하는 진담 반 농담 반 어린 소리도 듣는다.

가정에 충실한 남편은 보통은 퇴근 후 집으로 들어와 시간을 보내며, 오히려 내가 여성단체나 여성모임 등을 위해 오후나 저녁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한국에서처럼 퇴근 후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정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웃에 대한 예의도 대단하다. 그는 아무리 급해도 주말이나 새벽에 인적이 드믄 조용한 동네 길을 걸을 때에는 자는 사람 깨운다고 조심하거나, 아예 좀 돌아가더라도 차라리 큰길을 택하기도 한다. 오래 살면서 느끼는 이 사회의 좋은 점은, 시민들이 개인의 존중에 따른 상호 기본예의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8년을 간호사로 근무한 뒤 직장을 그만 두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혼자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73년 큰아들이, 80년 둘째딸이 탄생했다. 독일 어머니들과 같이 놀이터에 앉아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3년 반 동안 잡담을 했다. 그러나 아들이 세 살 반 때 나는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대학 진학을 위해 그 준비과정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2년 반이 지난 후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받아, "베를린 자유대학 의대"에 입학신청서류를 제출했다.

그러나 입학 허가 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모든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어렵게 받은 "의대 입학허가서"를 미룰 수는 없었다. 정신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내버스인 이층 버스에서 빵 두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고, 허겁지겁 강의실, 실습실을 쫓아다녔고, 탁아소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집안일 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해야하니 종종 아이들을 귀양 보내고 책상 앞에 앉기도 했으나, 점차 남편의 생각이 달라져 의견의 충돌이 생기고, 휴가도 같이 못 가고 이리저리 힘만 들어 "사람다운 삶"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질질 결정을 끌다가 결국 "중퇴"로 끝장을 내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했지만, 무엇보다 둘째딸의 건강이 문제였다. 그 애는 쇠약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3주에 한 번 정도는 감기를 비롯해 자주 아팠다. 그러니 아이가 학교에서 밀려버린 과제도 많아져, 마치 내가 학교를 대신 다니는 것처럼 그 애를 도와주어야 했다.

독일 학교에서는 학업과 함께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며, 명랑하고 즐겁게 놀 기회를 마련해 주고, 미래와 예의보다는 "현재" 삶의 중요성과 독립적 인간을 만드는데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따뜻한 정으로 키우는 한국의 교육도 나쁘지 않다. 이곳은 보편적으로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한국의 순한 아이들에 비해 충동적이고 우악스럽다는 느낌인데, 권위주의적이 아닌 교육의 영향 때문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는 아들 학급의 학부모대표 일도 해 보았다. 3개월마다 담임선생 및 부모들과의 "학부모 저녁모임"이 있었고, 학교 전체의 학부모 모임에도 부지런히 참석했다. 대부분 학부모 모임에서는 미국이나 소련과의 "교환학생 문제", 재정문제, 교과서 선택, 실습문제, 학교 수준비평, 선생들의 교환, 마약문제, 낙제문제, 여행비 등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토론을 좋아하는 독일인들은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해대곤 했다. 그래서 밤 10시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결론을 내야할 일이 있을 때는 말들을 빨리 해버려 이해하기 힘든 적도 적잖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가정을 돌보는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이 너무 단조로운 것 같아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을 이용해 시청에서 관리하는 자원봉사자 팀의 일원이 되어 독일 할머니 한 분을 위로 방문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의 나의 부모님들이 편찮으셨을 때 돌보지 못한 죄의식이 이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양로원에 사는 그 노인은 장애자인데다가 가족이 없이 가난하며 외롭게 살고 있었다. 게다가 외과 의사의 척추수술 실수로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쓰라림과 증오에 시달리는 노인이었다. 나치 사상에 젖은 아버지를 두었던 할머니는, 물론 자신은 아버지의 사상을 반대한다고 했지만, 자기가 외국인 여자한테 위로를 받아야 할 운명이 될 줄이라고 과연 생각했을까?
 
첫 방문 때, 노인은 침묵하며 턱과 냉정한 눈짓으로 앉을 자리를 가리키고, 침대와 침구를 구김 없이 정리하라는 신호를 하고, 찻잔과 수건들을 제자리에 놓게 한 후에야 나에게 입을 떼었다. 이런 냉랭한 시작이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할머니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몸의 상태가 나빠져 병원으로 옮길 때는 자신이 아끼던 고향산천 그림까지 나에게 주었다. 가끔 할머니가 혼자 지하실에 내려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그 노인이 줏대와 자부심이 강한 독신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일의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3년이 지나자 오히려 내 자신이 정신적으로 피곤해 지기 시작했다. 인생을 포기한 시각으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오로지 죽음 만 기다리는 할머니의 입장과, 그렇지 않다고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하는 일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매번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나의 삶에도 항상 즐거운 시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점차 그게 고역으로 다가왔고, 내가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이 될 때도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를 진정으로 위로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3년 동안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중단했다. 그러고 나서 1년 후 할머니의 별세통지를 받았다. 장례식에는 목사, 시청공무원들 그리고 나 모두 4 사람뿐이었다.


66년 가을 “똥고집” 독일에 오다

1966년 낙엽이 뒹구는 가을, 청춘의 20대에 내가 간호사로 한국을 떠나와 독일에 왔으니, 이곳에서 산 삶이 이제 35년이 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흘러가는 일상생활에 맞춰 독일의 풍습, 문화, 사회질서 지키며 얌전하게 적응해 왔다. 독일인이 다 됐나? 하는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곳의 “극우파”로 인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금 내가 "외국인“이란 생각을 하게된다.

이 긴 시간을 살면서, 이곳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들이 나를 “가짜” 독일인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독일 남편과 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새 나의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나의 운명이 이곳에서의 정착인가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된다.

갑자기 35년이 넘은 세월이 이제야 현실감을 가지고 다가온다. 한국을 떠날 때는 내가 내 고향을 등지고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곳에 살기로의 결정은 저절로 내려진 것이다. 되돌아보면 독일에서의 처음 10년은 독일 사회의 무 경험자로서의 탐험가, 개척자로서, 10년은 꿈과 소망을 이루는 노력자로서, 10년은 현실에 적응한 당당한 독일의 사회일원으로서 내 의무와 권리를 발휘했고, 5년째인 지금은 내 정서에 충실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누리는 단계에 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앞에 나열한 것들이 나와는 거리가 멀고도 가까운 나그네의 느낌, 퍼즐이 맞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1966년 가을, 외국 가기 힘들었던 간호사 시절, 간호사 모집에 호기심이 발동해 몰래 신청서를 낸 것이 원인이 되어 남 따라 시장 간다고 “대구역”에서 부모님과 이별하였다. 그 당시 보편적으로 가난한 한국이었음으로 찬성, 불찬성 할 것도 없이 아쉬운 부모님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서울행에 올랐다. 설렘과 기쁨과 불안으로 마음이 들뜨고 혼란한 상태였다.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독일로 떠났다. 어렸을 때부터 똥 고집에 기분파로 하고싶은 일도 잘 했고, 싸우기도 자주하고, 뱃속에서 나오는 심정으로 한 행동도 많았다. 일찍 부모 곁을 떠나 돈이 안 드는 간호고등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을 한 것이 나에게 독립심을 길러주었고, “독일행”이란 결심까지 하게 해 준 것 같다.

나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어두운 베를린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에 옮겨 타고 달리기 시작하니, 집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숲을 낀 외로운 길이 나타나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차를 모는 뚱뚱한 중년의 운전수에게 말 못하는 “아다다”처럼 손짓 발짓으로 통화시늉을 했다. 그는 우리를 유괴해 가는 것이 아니고 병원 근무처로 간다고 이해를 시켰지만, 빽빽한 나무들과 베를린의 실망스런 첫인상이 나의 불안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 숲에 쌓인 병원의 정문을 통과한 후 으슥한 곳에 도착하니, 그곳이 바로 기숙사였다. 앞으로 이 곳에서 일을 해야 되나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결핵요양병원이었다. 활짝 웃는 뚱뚱한 간호사들이 친절하게 대접했지만 계속 먹어야 하는 느끼한 덩어리 고기, 콩 수프, 우유밥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언어도 고생이지만 식사도 고생이었다. 그때부터 오랫동안 계속 잘 먹지 못해 나는 늘 노란 탱자 얼굴이었는데, 30년 후 누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흰 사람인데, 그때는 왜 노란 탱자였느냐고 물었다. 못 먹어서 그랬었다고 말하며 한바탕 웃었다. 마시면 설사하는 우유는 적응하는데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오죽했을까. 그에 비해 치즈, 소시지를 끝도 없이 먹어대는 독일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숨까지 어렵게 쉴 정도로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다.
“독일은 무엇이 다르냐?” 하고 질문했을 때, “독일에는 당신같이 뚱뚱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이 특별히 친절하다” 라고 대답해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뚱뚱이들은 뚱뚱해도 날씬하다는 말을 듣기 좋아하고, 80이 넘은 할머니도 결혼하지 않았을 경우 Frau(부인)가 아닌 Fräulein(아가씨) 라는 명칭을 듣길 원한다는 것들이 초보 외국인들이 모르는 독일의 관습이라는 것도 늦게 서야 알았다. 그러나 그 사이 이곳도 풍속이 바뀌어 지금은 모두 "Frau"라고 부른다.

아무튼 나는 잘 먹지도 못하면서, 근무를 위해 어두운 하늘의 새벽 별을 보고 숲길을 한참 지나서 병동에 도착했고, 어두운 저녁별을 보면서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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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

김정숙(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파독 간호사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접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당시의 눈물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고 기쁨의 눈물도 없지 않았다.

내가 이곳으로 올 작정을 한 것은 먼저 왔던 친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보고 난 뒤였다. 이 편지는 나를 황홀의 경지로 몰았다. 이 친구가 사는 집에는 수영장이 있어 근무가 끝나면 언제나 수영을 할 수가 있고,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테레오 전축도 2개월 일한 월급으로 구입할 수가 있고, 헤르만 헤세의 추종자들인 히피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며, 카라얀의 지휘아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토벤을 들을 수 있고, 시내 중간 중간에 있는 공원잔디에 누워서 괴테의 책을 읽고는 저녁에는 연극 구경을 하는 등 정말 아름답게 행복하게 매일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서온 친구편지에 반해 독일행
 
나는 당장 파독간호사 모집에 응했다. 그리고 70년 10월 커다란 희망을 안고 마치 천국으로 가는 양 들뜬 기분으로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도 별 관심조차 갖지 않은 채 비행기에 올라다.

그러나 비행기가 뜨기 시작하고, 전송 나와 계시는 저 밑 땅위의 어머니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는 순간, 내가 앉은 이 비행기가 떠오른 하늘과 땅의 거리를 문뜩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드디어 이별의 아픔을 깨달았다. 황당하게도 난 그 때부터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후회가 온몸을 저려 왔다. 72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질 때면 그 때의 그 후회스럽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 순간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드디어 비행기는 베를린공항에 도착했다. 울음으로 지친 나는 많은 파독 간호사의 틈에 끼어 날 데려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숙'이라 적힌 내 이름표를 들고 손을 드니, 나이든 독일간호원이 맞는다. 나와 같은 몇몇 다른 간호사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국사람들은 세끼 따뜻한 밥과 음식을 먹는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는지 정성껏 만든 볶음밥으로 우리를 대접했다. 그 순간 세세하고 잔잔한 정을 나누는 독일인들의 마음가짐이 이곳이 낯설기만 한 한 이방인에게 감동을 줬다.

독일 병원에서 내가 처음 해야 했던 일은 환자들의 공동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한 일주일 화장실 청소를 꾹 참으며 하고 나니, 다음 임무는 환자 침대를 닦고 바꾸는 일로 바뀌었다. 그 다음은 휴게실에서 간호사들의 아침상 차리는 일이었다.

어느 날 조용히 간호사들의 아침상을 차리느라 군데군데 쟁반을 식탁 위에 놓던 나는 그만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다. 식탁 위에 놓아야 할 아침식사 쟁반 대여섯개를 병실 중간에 있는 복도로 하나, 둘. 셋, 넷 차례차례 던져버렸다. 쟁반 깨어지는 소리가 와장창 나니 간호사고 환자들이고 모두 방에서 나와 복도를 쳐다봤다. 그 곳에서 나는 "나도 독일간호사와 꼭 같은 인정받은 대학을 나온 정식 간호사인데 왜 내가 독일 간호사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하느냐"고 한국말로 외치고(독일 말로 구사할 수가 없어) 병동을 떠나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난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 더 이상은 이곳 독일 땅에서 간호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귀천 안 가리는 가치관차이 실감
 
얼마 후 수간호원이 기숙사로 날 찾아왔다. 무슨 일이 날 그렇게 화나게 했는지 얘기 좀 하자고 해 마음속 말을 모두 털어놨다. "우리 한국에서는 간호사들이 이런 천한 일들은 하지 않는데, 여기 독일 간호원들은 하지 않는 이런 일을 왜 내가 맡아서 해야하는가? 난 이런 일을 하려고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을 그만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그러자 그 수간호원이 "그럼 내일부터는 주사하고 약을 나누어주는 일을 맡길 테니 이곳에 있어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일의 귀천을 별로 따지지 않고, 영역별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 사람들에게 나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독일에서 처음에 우리가 제 능력에 따른 처우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 그 수간호원과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독일 말로 내 생각도 전달 할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당시의 얘기를 하곤 함께 웃으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얘기하곤 했다.


2년 구애편지 보냈던 남편
 
이 일이 있은 뒤 점차로 지위가 올라 수간호원의 대리를 맡기도 하고, 몇 년이 지난 다음엔 간호원장과 수간호원의 인정을 받아 일년 동안은 월급을 받으면서 병원의 재정보조로 수간호원을 위한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수간호원으로 몇 년 동안 열심히 재미를 느끼며 근무를 했다. 간호사의 직업이 내 성격엔 정말 잘 맞는 것 같다. 대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변을 가능하게 한 뒤의 그 후련한 마음은 환자나 간호사만이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독일에서 우리 한국 간호사들을 보고 천사와 같은 간호사들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지금도 어디서나 간호사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일해온 재독 한국여성간호사들에게 고마움이 가득하다.
 
쟁반시위 지켜봤던 학생 관심...

 
내가 병실에서 쟁반을 깨트리며 자존심을 내세워 시위하던 그 일이 있던 후에, 우리 병실에서 일을 하던 수줍음이 많던 젊은 독일 남자 대학생은 나를 볼 때면 빙긋이 웃으면서 친절히 대해주었다. 아마도 그때 내 심정을 이해하면서 위로를 하고 싶었던가 보다.

그는 우리 병동에서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 그가 일년 후쯤 어디선가 여행길에서 내게 편지와 목걸이를 보내왔다. 이곳 독일에서는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는 Du(너)를 쓰고 이외 사람과는 Sie(당신)를 사용한다.

그런데 몇 번 편지가 온 이후 Sie로 시작했던 존칭이 Du로 변해갔다. 처음의 "존경하는 김간호사님"이 "사랑하는 김간호사님"으로 바뀌더니,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나만 보면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난 그래도 아무 눈치도 없었는데 우리 병동 수간호원이 날 보고 저 대학생이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 한국엘 가지말고 저 대학생과 결혼해서 이곳에서 살면 자기와도 친구로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어떻겠느냐고 졸라댔다.

그런데 고국에 있는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용은, 독일에 있던 한국간호사들이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어려우니 누나는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독일에 있는 간호원들이 고국으로 더 많은 돈을 송금하기 위해 오전 병원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파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헛소문이 어떻게 방영이 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30년을 살면서도 아직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고 나서 나는 독일의 계약기간 3년 근무를 마치고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본심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독일에 있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스위스에 갔다온 것처럼 행동해서 좋은 곳으로 시집가야겠다는 계산이었다.

얼마나 어리석고 주체 없는 나의 모습이었는가. 그래서 이 젊은 독일 대학생의 접촉을 본 척도 않고 취리히에서 2년 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 젊은 대학생은 내게 매일 편지 한 통씩 보냈다. 그렇게 편지를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젊은 독일 대학생의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여성이 누구인가를 들었다며 "만약 내 아들을 좋아해 베를린으로 돌아온다면, 진심으로 환영하며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라고 적고 있었다. 결국 이 독일 대학생과 결혼했다. 작년에는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내 고향 한국에서 6주 동안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얘야 집안일은 나눠 해야 한다"
 
우리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님은 아직 직장 여성이었고, 남녀평등을 직접 실천하신 분이기도 했다. 시어머니 직장이 우리 집에서 머지 않아 자주 들리곤 하셨는데, 시어머님께서 오시는 날엔 꼭 남편이 음식 준비를 해야했다.

시어머님은 아들에게 "얘야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란다"고 하시며 "집안일 경험이 없는 남자가 나중에 혼자되면 생활이 아주 어려워질 수 있으니 부부생활을 할 때 집안 일을 나누어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오시는 날 만이라도 아들에게 집안 일을 시켰다.

한국에서 자란 여성으로서 나는 이럴 때마다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게 불편하기만 했지만, 어려서부터 그런 일에 익숙한 남편은 항상 집안 일을 잘 도와주었다.


직장과 가정 그리고 아이들
 
결혼을 하고 이 사회에 들어가 살아보니 나는 점차 이곳에서 필요한 일반 상식의 부족함을 느낌과 동시에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학업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한국과는 학제가 틀려, 대학입학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야간고등학교를 더 다녀야 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오후 3시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오후 5시부터 10까지는 야간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이때 대학생이었던 남편은 매일 아침 일찍 함께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했고, 저녁은 혼자서 챙겨먹는 생활을 일년 정도 했다.

그럴 즈음, 간호원장과 수간호사로부터 수간호사 과정을 공부할 마음이 있다면 1년 동안 월급을 주며 학비까지 부담할 테니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수간호원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날 이렇게 인정해주는 게 너무도 고마워서 나는 다니던 야간학교에는 휴학계를 내고 이 과정을 이수한 뒤 수간호원이 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즐겁게 일을 했다.
 
두 애 모두 건강해 항상 감사

 
그 사이, 남편도 대학을 졸업하고, 내 직장 일도 안정이 되니 남편은 자꾸 애를 갖고 싶어했다. 나는 좀 더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의견에 따라 아이를 갖기로 작정을 하고 건강한 아이를 갖기 위해 6주 동안 휴양을 떠났다.

휴양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만에 첫아들인 프리드리히를 임신하게 되고, 2년 후에는 딸아이 미란다를 갖게되었다. 아들은 지금 대학에서 IT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고 딸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다행히 두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주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나는 ^우리 집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언제나 정성을 다하여 은혜와 진실을 나누는 아늑한 샘터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려고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과는 달리 쉽지가 않다.

친딸처럼 잘 대해주시겠다던 시어머님께서 아이들이 태어난 후부터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들의 의견에 차이가 생기고 친목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갈등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2년 전 시어머니는 임종하시면서, ^고맙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표현해 주셔서 과거의 의견차이는 어제의 흰눈처럼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시어머님의 명복만을 빌 따름이다.

남편과 나의 차이점이라면, 난 조심성이 없는 대신 남편은 아주 꼼꼼하고 확실하다. 나는 지구력이 모자라지만 능동적이며 즉흥적인 반면, 남편은 일을 섣불리 시작하지 않으나 시작한 것은 계획성 있게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런 차이 때문에 우린 자주 부딪히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를 보충하며 살아왔다. 이런 성격의 차이는 집을 장만하는 문제에서도 드러났다. 나의 계산으로는 월세를 20년 정도 내는 것보다는 주택융자로 내집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경우엔 아주 유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은 꼼꼼히 계산을 하더니, 집을 마련하다 보면 예상도 하지 못한 지불이 많을 텐데 생활이 빠듯한 월급쟁이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다고 했다.

난 몇 번씩이고 계산을 하고 또 하고 상담소 등등을 쫓아 다녔다. 다행히 시아버님께서 ^네가 하는 것을 보니 단단히 잘하는 것 같다. 시의 보조금 외에 은행에서 융자받을 돈은 내가 빌려 줄 테니 집을 마련하도록 해라^ 하시며 나의 편에 서서 큰 힘이 되어 주셨다. 이때의 시아버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날 한없이 감동시켰다.
 
시아버지 사랑에 한없는 감동
 
집을 지을 때 난 내 인생을 위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집 지을 장소를 알아보던 중, 시의 필요에 따라 예외적으로 건축허가를 해 주는 땅이 있음을 알고, 시의 사무실에 연락을 하여 우리 이름을 등록시켰다.

전체 113가구가 이 땅을 함께 사서 집을 짓기로 했는데, 그 중 12명이 건축사업자문위원으로 선출이 되어 매주 1번씩 모여 집 짓는 과정의 모든 것을 함께 토론 결정하였는데 나는 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 12명중 여성은 2명뿐이었다. 외국인에 가정주부인 나 이외에 이들은 모두 대학출신이며 직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어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매주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그전의 모든 결정사항과 오늘의 토론사항을 잘 읽고 연구해 갔다.

그러다 보니 지난 번 결정사항이 기억나지 않으면 모두 나에게 물어보고 내가 얘기하는 것은 틀림없을 거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나는 자신의 중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 작은 성공은 나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광주가 내게 남겨준 정치의식...
 
80년 5월 독일의 텔레비전을 통해 광주에서 한국 경찰이 무작정 몽둥이로 대학생을 때리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는 장면을 보았다. 너무 끔찍했다. 눈을 비비고 보고 또 봐도 이들은 한국사람들이었다. 얼마 후 전화벨이 울리면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텔레비전을 보았느냐"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말했다. 난 그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무슨 일인지, 어째서 경찰이 저렇게 시민을 때리고 차며 구타할 수가 있는지.

우선 몇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의견을 들었고 모두가 하나같이 울분을 터뜨렸다. 빠른 시간 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 자유대학 동양학과에 모여 2, 3일 내에 한독 친선회가 결성되었고, 5월 30일에는 시위를 통해 광주시민을 위한 연대 운동을 벌렸고, 11월 9일에는 "김대중을 구출하자"는 구호 아래 시위를 했고, 그 외에도 한국의 밤을 개최하고,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광주의 충격과 함께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회와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TV '끔찍한 장면' 보고 공분
 
광주는 나에게 정치의식을 일깨워준 아주 중요한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광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연극, 강연회,
한국문제토론회, 편지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많은 독일사람과 한국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우리 고국의 장래를 염려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정체성과 관련된 예를 하나 들고 싶다. 해마다 개최되는 재독 한인 전국체육대회가 있던 날, 그 해는  당시 서독 수도인 본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광주항쟁의 진상을 전달하며, 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기 위해서 각 도시에서 몰려온 한인들에게 카드와 광주항쟁 보도자료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 남자 한 사람이 뒤에서 내 엉덩이를 차고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이때 옆에 서서 우리와 연대하던 독일 남자 한 사람이 이 한국 남자의 횡포에서 날 구해 주었다. 그는 내가 한국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국남자의 횡포를 막아 준 것이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지만, 그 한국 남자와 나 사이에서 나는 동질성을 찾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피가 다른, 그러나 생각이 같은 이 독일사람과 나의 마음은 정이 흐르며 의식에서 동일함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 이후로 나는 내 개인의 정체성이란 개념에서 핏줄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단정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재독여성모임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으며, 여성모임을 통하여 여러 경험을 하게 되었고,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93년에는 이곳 베를린에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세종학교' 건립에도 참가하였다. 지금은 한글학교의 재정과 운영을 돕기 위한 이사회의 위원장을 맡아 적은 힘이나마 후원을 하고 있다.
 
낮선 한인에게 봉변당하면서 캠페인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곳에 오래 살고 있어도 외국인으로 가끔 나는 소외감을 느끼며, 나와 같이 독일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는 외국인들이 상당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곳 베를린의 여러 구청에 설치되어 있는 외국인 상담자문위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이 자문 위원회는 외국인과 독일인, 외국인과 접촉이 있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외국인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제안을 하는 기구이다. 내가 속해 있는 슈판다우 지역에서 나는 자문위원장으로서 이곳 베를린 외국인문제 해결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혼자 죽고 싶어도 혼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곳은 한국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죽음의 동반자 '호스피츠'라는 직업이 생겼다. 나는 명예직으로 이 일을 하며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기적을 가져다 준 투병생활...
 
87년 우리 아이들이 3살과 5살이었으므로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한국에서 일년쯤 살면서 한국어를 가르쳐 보고 싶은 욕심으로 남편과 아이 둘을 데리고 내한했다.

남편 역시 한국말도 배우고, 아이들하고도 오랜 시간 함께 보내기 위해 3년간의 휴가를 몽땅 모아 3개월 정도 한국에서 지낼 계획을 하고 내한을 했다. 그런데 내한 후 6주만에 갑자기 옆구리에서 어깨로 통증이 와 숨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병원엘 갔더니 기가 막히게도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진단 직후 대학친구를 만나 한국에서 가능한 치료방법을 알아보니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어 곧 독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서양의학으로는 반년정도 살 가망은 있지만 치료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서양의학이 아닌 전인치료 내지 자연치료요법을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방한 중 기막힌 '간암' 선고
 
다행히도 내 주치의인 여자의사인 슈후는 친구와 같은 사이라 아주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이였다. 슈후는 암이란 하루 이틀에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죽음과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갖는 단 하나의 자유이니 입원해서 조용히 내 인생을 생각해보고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4주 동안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충고를 했다.

그래서 애 둘과 남편을 두고 4주 동안 병원에서 지내면서 내 자신의 내면생활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 간암의 치료법은 항암제를 간에 투입하는 법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실험 단계였고 단지 절제수술만이 가능했는데 나의 경우는 간암의 크기가 가로 10cm, 세로 10cm 정도이며 큰 혈관에 암이 붙어 있어 절제 수술도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간장이식수술을 계획하고 이식할 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일본사람 게올게 오샤바가 창안해 낸 마이크로 바이어틱 이란 식이 요법을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 치료를 계속하여 1년쯤 지난 다음 혈액검사를 받았더니 암의 흔적이 없어졌고, 1년 반이 지난 후에는 암의 크기가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1994년부터는 암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나는 그 식이요법을 통해 암이란 죽음의 병에서 치유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지금까지 암과는 무관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생과 사를 거의 동시에 느낄 때, 살아 있음을 순간 순간 느끼는 행복감도 맛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 난 살아 있구나!"라는 사실만으로도 퍽 흡족했고,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중하며, 삶과 죽음의 거리라는 것이 정말 종이 한 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기적 같은 회복은 정신치료의 효력이었다고도 믿을 수밖에 없다.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을 당시, 난 '이 암이라는 병으로 죽어도 되니 자살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택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구나'란 생각을 했고, 역설적으로 그 가능성은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었다.

그 전에는 자살이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 보지를 못했었는데, 내 내면 아주 깊은 곳에는 이런 염원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기쁨이 한 편에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식이요법 완쾌, 소중한 인생...
 
내가 죽음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은 병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가져왔고, 동시에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통해 내 생활과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내면의 많은 것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자, 마음이 평온해 지면서 암의 크기도 적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미스톨, 비타민, 효소 등을 섭취하고, 묵상 등을 하는 조화 있는 생활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암이란 병은 오히려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날 동반해주었고, 나에게 자신 있게 삶을 이끌어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이 암이 동기가 되어 자연식품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편의 건강도 훨씬 좋아졌다. 아이들 역시 자연식품섭취 덕택에 지금껏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여러 면에서 암은 나의 소중한 인생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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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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