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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시민의 신문" 에 연재된 에세이

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 (송금희) 공부가 싫었던 말괄량이의 좌절...송금희(심리치료사, 보육교사) 한국은 내가 태어나 자라고 사춘기를 보낸 '모국'이다. 그러나 한국은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30여 년 동안 독일 생활을 하면서 항상 향수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 있을 때면 여전히 불편해 하는 나를 느낀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살던 시절의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은 탓일까? 나는 팔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유교적인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난 우리 어머니는 나 역시 아들이길 바라셨다. 아들이길 바랬던 막내딸은 이번에는 '여성스럽게' 자라나 주길 바랬던 당신의 뜻과는 달리 수줍음을 모르는 사내아이 같았다. 위로 세 언니들이 있었기에 내 또래의 다른 여자 친구들 보다 나 자신.. 더보기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 (조국남) 아들 기대 속 셋째 딸로 태어나...조국남(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보면 거의가 남자라 짐작을 해서 그런지 나는 가끔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국 공관에서 보내오는 우편물의 수신인 난에는 아주머니(Frau) 대신 아저씨(Herr)란 호칭이 딸려 온다.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글이름자가 풍기는 울림이나 뜻에 서투른 독일사람들이야 어떠하랴. 이곳 독일 관청에서도 일반적으로 외국인의 이름에서 남녀의 성구별이 어려우면 우선은 남자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은 남성중심시대의 산물로, 아니면 현시대의 산 증거로 봐야 할까? 자녀들은 자라면서 대개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만큼 그 기대에 상응하는 자녀노릇.. 더보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이방인... 안차조(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독일에서 나의 삶은 올해 33년째가 된다. 그리고 독일국적을 취득한 지도 22년이 되어, 독일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나는 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한국인이 되고, 또 독일인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그 원인들을 분석해보면, 매우 복잡하며 애매한데, 문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의 행동양식을 은연중에 요구한 것에도 큰 몫이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문화로의 적응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동양 여성의 수동적 이미지를 당연하게 요구했다. 이 모순된 요구는 이중문화권에서 사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마주하는 공통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 자신과의 갈등을 자주 겪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자.. 더보기
어려운 출국(김순임) 어려운출국김순임 1966년 4월 28일 김포공항은 독일 라인마인 지역으로 취업차 출국하는 128명의 간호사들과 그들을 전송 나온 가족, 친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 선배언니와 나를 제외한 모든 간호사들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있어서 힘든 노동의 대가로 외화획득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보다는 어떤 친선문화사절단이 대거 출국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의 마음은 그러한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그냥 빨리 탑승을 했으면 하는 초조한 기분 속에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의 뒷덜미를 잡고 너는 못가 하고 끌어 낼 것 같은 불안한 심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1962년 봄 광주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연령 미달로 6 개월을 기다린 후 양호교사로 재직 중 일간지에서 해외개발공사 광고를 보고 파독 간호사.. 더보기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 (유정숙) 재독한국여성모임과의 첫 만남유정숙 재독 한인 여성회 회원 1985년 4월, 나는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독일에 왔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삶을 다 물리치고 다섯 살 된 딸아이와 독일의 탄광도시인 보쿰에 도착하였다. 남편도 같이 왔다. 처음 일년간 박사과정의 이수에 필요한 어학코스를 할 동안 나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 하나는, 내 주변의 "독일적" 상황이 내가 다 "물리치고" 온 한국 생활을 정신적으로 정리하고, 현재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더 없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여성으로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아 갈등을 느끼며 왜 이래야만 할까라는.. 더보기
가정 기울며 대학 중퇴하고... (손행자) 가정 기울며 대학 중퇴하고...손행자(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학교 다닐 적에 제일 어려웠던 과목이 국어였다. 그런데 신문에 내 글을 싣는다니 망설여지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난 때문에 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나의 경험담을 써서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될까하여 용기를 내게 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무난하게 세상물정 모르고 학교공부만 충실해왔다. 그러나 아버님이 4·19 뒤 군수, 경찰서장 등 일괄 처리에 몰려 본인의 잘 잘못과 무관하게 직장을 물러나시게 되었다. 그 후 아버님은 장사 중에 그래도 고상한 것이 서점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항상 읽고 공부하시는 자신의 성격에 맞아서 택하셨는지 광주 계림동에 서점을 여셨다. 그 때가 내가 조선대 약대에 입학하던 해였다. 어버님.. 더보기
암담했던 '서울의 봄' 뒤로하고 (강여규) 암담했던 '서울의 봄' 뒤로하고강여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내가 독일에 온 것은 80년 3월, 박정희가 암살된 후 불확실한 희망이 존재하던,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최루탄 가스와 휴교령이 반복되던 대학시절을 등뒤로 나는 조금은 도망가는 심정으로 유학을 택했다. 박정희 정권의 병영화한 사회에서,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구호와 함께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 그것을 위해 노동자의 인권이 참혹하게 짓밟히고, 모든 비판적 목소리가 빨갱이로 도장 찍히는 숨막히는 사회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단속을 피해야 하고,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에 불안해하면서, 남자친구들이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군대에 끌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비굴을 강요당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가난하고 초라했던 우.. 더보기
독일 적응하자 찾아온 '향수병' (한정로) 독일 적응하자 찾아온 '향수병'한정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국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으로 시작됐다. 80년도 중반에는 한국 및 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관광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세미나 등에 참가했고, 한국의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운동이 계기가 되어 90년부터 정식회원이 되어 지금까지 여러 활동에 참여해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50년 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정신대" 문제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는 사실이 독일 매스컴에 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 "정신대" 문제를 알게 되었다. 사태를 이해하자 잔혹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그 후 나는 정신대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정대협과 협력하며 독일 내 여론 형성을 위해 .. 더보기
"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 (김정숙) "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김정숙(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파독 간호사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접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당시의 눈물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고 기쁨의 눈물도 없지 않았다. 내가 이곳으로 올 작정을 한 것은 먼저 왔던 친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보고 난 뒤였다. 이 편지는 나를 황홀의 경지로 몰았다. 이 친구가 사는 집에는 수영장이 있어 근무가 끝나면 언제나 수영을 할 수가 있고,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테레오 전축도 2개월 일한 월급으로 구입할 수가 있고, 헤르만 헤세의 추종자들인 히피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며, 카라얀의 지휘아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토벤을 들을 수 있고, 시내 중간 중간에 있는 공원잔디에 누워서 괴테의 책을 읽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