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출국

김순임




1966년 4월 28일 김포공항은 독일 라인마인 지역으로 취업차 출국하는 128명의 간호사들과 그들을 전송 나온 가족, 친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 선배언니와 나를 제외한 모든 간호사들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있어서 힘든 노동의 대가로 외화획득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보다는 어떤 친선문화사절단이 대거 출국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의 마음은 그러한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그냥 빨리 탑승을 했으면 하는 초조한 기분 속에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의 뒷덜미를 잡고 너는 못가 하고 끌어 낼 것 같은 불안한 심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1962년 봄 광주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연령 미달로 6 개월을 기다린 후 양호교사로 재직 중 일간지에서 해외개발공사 광고를 보고 파독 간호사 선발에 응시했으나 제 일차 파독 간호사 모집에서 떨어졌다. 일차 파독 간호사들이 출국하기도 전에 제 2차 선발광고가 있어 다시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 때 소문에 일차 간호원들은 국회의원 한 사람이 간호사 한 사람 씩 밀어주어 갔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2차 선발에 끼게 되어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해외개발공사에서 실시한 독일어 강습에 다니면서 외무부에 여권신청 후 출국만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5일 전에 2차 파독 간호사들은 모두 여권발급이 되었는데 나는 제외되어 있었다. 해외개발공사 담당직원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니 외무부 여권과에 문의하라고 하였다. 나는 시골사람이라 서울지리에 밝지가 않아 여기저기 물어 외무부 여권과에 가서 문의했더니 어떤 설명도 없이 여권발급이 안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기가 팍 죽어 가지고 그럼 언제 나오는 가고 물었더니 “몰라요” 했다. 나는 이제 주눅이 들어 더 이상 말을 부쳐보지도 못하고 외무부를 나왔다. “왜 안나왔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고 물어보지 못한 나 자신도 저주스러웠지만 불친절하고 교만해 보이던 외무부직원의 태도에서 내가 한국을 떠나고 싶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생긴 것을 느끼고 있었다.

초라한 모습으로 외무부를 나와 길을 걷는 나에게 “누나!”하고 고향친구의 동생이 서울 한복판에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누나 이번에 독일 못 가실 거라 하던데 안 됐어요”
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김 순경이 그러던 데, 누나가 신원조회에서 걸렸다던 데요.” “뭐라고?!” 그는 다시 “누나 외삼촌이 6. 25 때 활동했다면서요” 했다. 나는 급히 친구동생과 헤어진 후 큰 형부에게 가서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형부는 아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있는데 큰 힘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번 만나보라고 전화번호를 주셨다. 나는 그 분을 만나 출국준비용으로 갖고 있었던 약간의 돈을 봉투에 넣어 내 여권발급에 힘써 주시라고 하면서 드렸다. 그 다음날 외무부에 가서 여권을 받았다. 문제가 되었던 외삼촌은 6. 25 때 좌익활동에 연루되어 6. 25 이후 희생당하셨고, 나에게는 사탕 잘 사주시고 친절한 미남 삼촌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능하고 무식한 권력층이 권력을 도구로 가난한 서민을 깔아뭉개고 온갖 부조리와 부패가 만연되었던 그 시대에 조국을 떠났다. 시골농부의 딸로 태어난 나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독일에 도착한 2일 후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1967년 동베를린사건이 터졌다. 독일과 한국 당국에서는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지만, 당시 독일어를 제대로 읽을 능력이 없었고 한국신문을 읽을 기회도 없는 처지여서 그냥 들리는 소문만으로 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 중에는 정보부에 끌려간 사람 중에 간호사도 있다는 말도 들렸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무섭고 떨리는 소식들이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4년을 근무한 후 서베를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고국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 소식을 접하신 부모님들로부터 3번이나 서베를린으로 가지 말고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국제전화를 쉽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참으로 난감하였다. 나는 왜 그렇게 부모님이 강경하게 나오시는 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동베를린사건 이후 서베를린은 간첩활동무대로 한국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베를린으로 이사를 갔다.  


힘든 시작
 
독일 도착 이틀 후에 근무를 시작하여 서베를린으로 옮길 때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근무한 4년 동안의 생활은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생스러웠다고 기억된다.

습한 기후 때문에 항상 머리가 천근의 돌을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고, 음식이 너무 생소해서 고된 병원근무에 필요한 열량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체중이 자꾸 줄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은 언어불통의 문제였다. 병원 측에서는 한국간호사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2시간씩 독일어 강습을 실시했다. 근무 도중에 모여서 받은 독일어 수업은 처음 2-3 개월 동안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수다스러웠던 독일 여선생님은 왕방울 같은 두 눈을 굴리고 다양한 표정을 써가면서 열심히 강의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처음에는 변화무쌍한 그녀의 표정과 제스처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열심히 말부터 배우려고 노력했다.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4월에 도착하여 대학병원의 정원에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게 장미가 만발한 8월쯤 되니 귀가 약간 트이고 서투르나마 의사표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쯤에는 주위환경도 눈 여겨 바라보면서 독일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거리, 하나처럼 똑같은 식으로 장식된 주택가의 커튼들, 발코니에 심어 놓은 똑같은 꽃들이 너무나 획일적으로 보였고, 부드러운 갈색머리와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에 어울리지 않게 경직됐거나 약간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한 독일인들에게서 너무 큰 이질감을 느꼈다. 이런 부정적인 느낌들 때문이었는지 나의 독일생활 시작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는 한국간호사들을 2주일 동안 입원시켜 구충제를 복용하게 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물론 언어불통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사전에 본인의 동의는커녕 어떤 설명도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은 의료법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나도 입원이 되어 회충약을 복용했다. 그런데 약복용 이틀째 되는 날, 얼굴이 뒤틀리고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소동을 30분 간격으로 두 번이나 치르게 되어 당장에 약 복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병원생활에 적응이 되어 가던 9월 상순, 나는 전염성 간염으로 6개월의 긴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격리병동에 입원이 되자마자 전신에 황달이 퍼지고, 구토와 구역질에
시달렸다. 체중은 32Kg까지 내려갔다. 내가 정보부 직원까지 매수하여 오지 못할 곳을 왔기 때문에, 이제는 병들어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럽고 외로운 마음에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에 밤이면 죽음의 사자가 나를 유혹하는 꿈이 무서워 밤새 몸을 뒤척거리면서 뜬눈으로 세웠고, 그래서 간호사과 의사들이 병실을 오락가락 하는 낮에 잤다. 정성스러운 주치의와 간호사들의 보살핌으로 12월에는 회복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12월 중순 어느 날 아침, 나는 새벽에 깨어 해가 떠오르는 동쪽 유리창을 향해 서 있었다. 병원은 조용하고 밖의 찬 공기를 병실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이른 새벽이었다. 동쪽 하늘에 엄청나게 큰 불덩이 같은 태양이 떠올랐다. 장엄하면서도 찬란한 햇볕이 온통 나에게로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두 어깨를 활짝 펴고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받아들이고 싶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함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지치고 힘들어 일어나기 어려운 순간에 부닥칠 때마다 그날의 아침해를 기억하면서 기운을 얻어 다시 박차고 일어나게 된다.

나는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고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에 감사한 마음으로 퇴원했다. 6개월 동안 일을 못했으니 월급을 받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구좌에 상당금액이 저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어도, 일정기간은 직장에서 월급이 지급되며, 그 기간이 지나면 의료보험에서 생활비가 지급되는 의료보험제도의 혜택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나는 그 병이 직업을 통해 얻은 직업병이라고 인정이 되어 3년 동안 매달 식이요법을 위한 보조금도 받았다.


독일 정착의 결정과 첫 고국방문
 
한국간호사들은 대부분 3년 고용계약으로 독일에 취업을 해왔었다. 3년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한 병원에 같이 근무하던 동문의 선배가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망설였다. 유난히 어렵게 시작했던 독일생활이었다. 다시 다른 나라에 가서, 새 말을 배우고, 사람들과 기후 그리고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독일에 머물기도 결정을 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한 곳에 정착해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타향살이는 15살부터 시작되었다.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양호교사로의 취직을 위해 이력서를 낼 때도 부모님께서는 혼기가 차가는 딸이 고향에서 취업을 했으면 하셨지만, 전라도의 최남단 장흥 사람이 먼 경상도로 갔다. 그것은 부모형제를 떠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흔히들 말하는 역마살 때문인 것 같다.

독일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일년에 한 번씩 휴가를 받으면, 유럽의 여기저기 가보고 싶었던 곳을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고대 희랍신화의 발생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 델피, 미케네, 크노소스 등이다. 많지 않은 간호사의 월급이지만 다른 동요들은 착실히 저축하여 고향에다 논도 사고 집도 샀다는데, 나는 여행을 많이 다녀 별로 저축을 할 수 없었다. 고국에 대한 향수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더 지배적이어서 나는 10년 동안이나 고국 방문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76년 8월, 드디어 10년만의 고국방문은 참으로 감격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부모형제들의 정겨움과 따뜻한 마음은 10년 동안 겪은 나의 외로움을 일시에 녹여주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가는 길에 내 시야를 스치는 아름다운 고국산천에 대문짝 만한 큰 글씨로 세워진 반공표어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버스가 시골 어느 초등학교를 지날 때, 교문에 세워진 표어는 나를 경악하게 했다. 오른쪽에 “나라 사랑, 국어 사랑”, 그리고 왼쪽에 “쳐죽이자 김일성” 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닌가! 국어 사랑은 아름답고 바른 말을 가르치고 사용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쳐죽이자”는 말은 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휘였다. 거리의 전봇대, 공용버스 안과 밖, 심지어 시골 구멍가게의 유리문에도 반공표어 일색이었다. 그리고 “옆집에 오신 손님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라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시골에 머물고 있을 때 시골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가버렸지만, 나의 불쾌감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충격이나 불쾌감은 잠시였고, 나는 오랜만에 고향의 흙 냄새와 따뜻한 정에 도취되어 작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고향의 모든 것을 내 몸 전체에 넣어 가려고 했다. 심지어 뒷간에 들어가 매캐한 암모니아 냄새도 들이 마셨다. 그렇게 하고 독일에 돌아오니 몇 개월 동안은 이상하게도 등이 따뜻하고 든든해서 하루하루의 생활이 그 전과 다름을 느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나의 독일 생활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하셨다. 나는 그냥 잘 살고 있다고만 말씀을 드렸다. 엄청나게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께서 혼란을 겪으실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 독일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라, 어머니께서 오시더라도 기후나 음식 등, 모든 것이 불편하실 것이에요. 제가 독일로 모실 여비를 보내드릴 테니, 약도 잡수시고 친구들과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유람 다니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그람! 그런 델 뭘 할라고 가야”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가 다시 고향을 떠나는 날, 읍내 버스정류장에 나오신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는 나를 붙잡고, “나는 그래도 니가 사는 것, 꼭 한 번 봤으면 쓰것다”, 하시는 게 아닌가. 아, 어머니의 마음!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와 자식은 이렇게 다르구나.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딸이 외국에서 어떻게 사는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10년 동안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을까! 그러한 어머니를 뒤로하고 다시 떠나는 몰인정한 나. 갑자기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지더니 광주에 도착할 때까지 그칠 수가 없었다. 옆자리 승객이 “인자 그만 우시오, 아줌씨!” 라고 했을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예 소리를 내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방문과 아이들 언어 문제


몇 년 후 드디어 나는 어머니를 독일로 초청했다. 어머니는 장시간의 비행이었음에도 하얀 치마저고리를 막 다려 입으신 것처럼 단정하게 입고 예쁜 낭자머리에 버선고무신을 신고 의젓하신 모습으로 출구로 나오고 계셨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국 여성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나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탄하여 하마터면 인사드리는 것조차 잊을
뻔했다. 잠시 후에 어머니는 “어서 앞장서라” 하셨다. 변함없는 어머니의 단호한 음성과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불편해 하셨다. 당장 따뜻한 온돌 아랫목을 그리워하셨고, 기후 때문에 내가 처음의 나처럼 자꾸 머리가 무겁다고 하셨다. 나는 정갈스럽고 맛 좋은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아는지라,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진짓상에 올려야 할 지 안절부절했다.

어머니는 해드리는 대로만 드시고 칭찬도 평가도 없으셨다. 어머니가 계시는 동안 내가 통감했던 것이, 국제결혼은 큰 불효라는 점이었다. 사위의 예의범절은 접어 두고라도, 한 마디도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어머니께 참으로 죄송스러웠다. 어머니께서는 도착하신 지 2주일 째부터 집으로 가고자 하셨지만, 비행기표 관계로 4주만에 귀국하셨다.

이제는 국제통화료도 염가라서 이따금 전화를 드리면, 제일 먼저 사위의 안부를 물으신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특별히 사위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위의 안부 여하에 따라 시집 간 딸의 행과 불행이 좌우된다고 믿는 조선의 여성관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어머니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나의 남편은 영국사람이다. 남편이 아이를 갖고 싶어했을 때 나는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남편 역시 독일에서는 외국인이라 배타적인 독일에서의 자녀 교육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남편은 일 초도 주저하지 않고 코즈모폴리턴으로 기르면 된다고 했다. 그것이 가능한 지 모를 일이지만, 좋은 생각이라 판단하고 동의했다. 이왕이면 아이를 서넛은 낳고 싶었지만, 서른 여섯에 첫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연년생으로 딸 하나, 아들 하나만 낳았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자연분만을 할 수 없어서 제왕절개수술을 했었기 때문에, 만약 둘째 아이도 그래야 된다면 동시에 난관수술까지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분만이 가까워오자 남편과 나는 주치의와 의논했다. 주치의는 제왕절개수술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자연 분만의 경우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에게 물어보지 않고, 기왕에 내가 입원해 있을 테니 3-4일 후에 수술을 받겠다고 했다. 그러자 주치의는 화를 버럭 내면서, 왜 남편이 수술을 받지 않고 당신이 받겠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난관수술에 비해 정관수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해 병원에 입원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남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의사는 우리에게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고 오라고 했다. 남편은 정관수술은 남성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한다고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여러 문헌을 읽고 난 후에 자기가 하겠다고 결정했다. 둘째 아이는 자연분만을 하게 되었고, 분만 일 주일 후에 남편은 정관수술을 받았다.

남편은 모유가 전혀 없어 우유를 먹여야 하는 신생아 시절부터 아이들 양육에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우유며, 일회용 기저귀를 부지런히 사다 나르고, 밤에도 아이들이 울면 벌떡 일어나 우유를 만들어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참으로 열심이었다.

그러한 일을 하면서 남편은 갓 태어난 아이들과 늘 대화를 했다. 생 후 일 주일 밖에 안된 아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련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우리 아이들은 세 살이 되어 어린이 동산(유치원)에 다니게 될 때까지 영어와 한국어밖에 하지 않아서 독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점차 어린이 동산을 통해 독일어에 익숙해지자, 집에 오면 우리와 독일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시종일관 영어로만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독일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한국 친구들도 아이들을 보면 한결같이 독일어로 말했다. 남편은 나에게 몇 번이고 주의를 하라고 충고했다.


아이들 키우기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어 학교에 들어가자 영어와 독일어는 잘 하는데, 한국말을 못하게 되자 남편은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혼자서도 아이들에게 거뜬히 영어를 가르치는데, 베를린에 한국 사람이 수 천명 산다면서 왜 한국말을 못 가르치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남편은 영국인이나 영어를 쓰는 사람과 거의 친교가 없는 반면, 나는 한국 교포단체에서 모임이 있으면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남편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어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비난이 심해지자 나는 나의 무능력을 스스로 변호하고 나섰다. “나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므로 여자는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우선 나부터 남 앞에서 똑바로 말 할 수 있도록 배워야할 처지다” 라고. 남편은 어이가 없어 했고, 드디어 큰 아이가 초등학교 일 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 짐을 싸서 두 아이들과 나를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에 가서 말을 가르쳐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광주 성모유아원에 5개월을 다녔다. 아이들은 말도 빨리 배우고 유아원 생활도 즐겼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에 다시 독일로 와서 아이들은 영어와 독일어 이중 언어 학교인 케네디 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 약 일년 동안은 아이들이 한국말을 하였으나 점차 독일어와 영어만 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그리 쉽게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아이들 교육에 대한 원칙은 갖고 있었다. 나는 대다수의 인간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그 가능성을 점점 상실하면서 자란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 하면 안돼요”, “그런 짓 하지 말아요” 등,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인 말보다 많이 듣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유아기에 조심했다. 또 아이들에게는 꼭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당한 일을 위해서는 항상 아이들 뒤에 우리가 있다는 든든한 믿음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정당하게 성적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때는 학교에 시정을 요구하고, 그것이 관찰되지 않을 때는 학교를 바꾸기도 했다.

우리는 작은아이가 5학년을 마칠 때까지 텔레비전 없이 살았다. 동시에 학교에서 숙제도 많지 않고, 과외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무료한 시간을 갖지 않도록 힘썼다. 아들은 육상경기와 보트반에 들어갔고, 클라리넷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혼자서 색소폰을 연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국제 고등학생 모의 유엔총회에 해마다 참석할 수 있도록 성원을 해주었더니,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딸아이는 여섯 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가무에 능한 여성모임 회원인 송금희씨로부터 한국 춤을 배우기 시작해서 아직도 한국 춤을 배우고 연구하고 있으며, 열 한 살 때부터 김덕수씨에게 장구를 배우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때에는 또래의 친구들과 “천둥소리”라는 사물놀이패를 만들어 여러 곳에서 초청공연을 흥겹게 하고 다녔다. 서양악기로는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7년 동안 받았다.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면서 해마다 한 번은 런던, 제네바,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열리는 국제 고등학교 친선음악제에 참가하여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어울려 숙식과 연습을 함께 한 후 공연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국경을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면서 건강한 휴머니스트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이들에게 나의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나는 실패했다. 그러나 수학을 전공하는 아들은 아침식사에도 빵보다는 두부 된장찌개와 밥을 선호하고, 기회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벼르고 있다. 한국학과 아시아 민속음악을 전공하는 딸은 작년 일년 동안 고려대학에서 한글을 배워 겨우 문맹을 면한 상태이나, 앞으로 적극적으로 한국 예술을 유럽에 소개하겠다고 포부를 말한다. 




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