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적응하자 찾아온 '향수병'

한정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재독 한국여성모임>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국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으로 시작됐다. 80년도 중반에는 한국 및 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관광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세미나 등에 참가했고, 한국의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운동이 계기가 되어 90년부터 정식회원이 되어 지금까지 여러 활동에 참여해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50년 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정신대" 문제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는 사실이 독일 매스컴에 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 "정신대" 문제를 알게 되었다. 사태를 이해하자 잔혹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그 후 나는 정신대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정대협과 협력하며 독일 내 여론 형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우리 여성모임들의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재독 한국여성모임, 베를린 일본 여성회, 독일의 여성단체 및 인권단체들과 종교단체, 개인 및 타 단체 등과 더불어 일본 정부에 <편지 보내기 운동>, 일본의 상임 이사국 가입반대 서명운동, 베를린 정신대 국제행사, 할머니 증언집의 독일어 출간, 베를린 영화제에 "정신대 영화" 상영과 토론을 주최했다.

2000년은 정신대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의 최고봉이었던 도쿄의 <국제여성법정>을 위한 준비와 행사의 참여로 분주한 한해였다. 2000년 법정지지 서명운동(14,000명 서명), 김학순 할머니의 포스터에 지문찍기(4000여명)-그 포스터는 2000년 도쿄법정 때 회의장 출입구에 걸렸다-, 2000년 도쿄 법정 참가 후에는 독일에서 "보고강연회"가 있었다.
 
그 밖에도 작고 큰 여러 행사를 회원들과 함께 개최하고, 정대협과 연대하면서 근 10년 동안 정신대 할머니들의 존엄과 명예를 되찾는 운동을 해왔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재독 한국여성모임>의 한 분과로 정신대 문제해결을 위한 "국제연대소위원회"의 대표직을 맡을 정도로 관심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그 동안의 우리 노력으로 인해 독일인들의 관심과 도움을 끌어 낼 수 있었으며, 지금은 정신대 할머니의 비참한 운명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독일인들 중에는 일본 사람들이 정직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시 보아야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2001년 헤이그 법정이 내린 최종판결 후에도, 온 세계인이 일본의 양심을 지켜보고 있는 순간에도, 파렴치한 일본은 손해배상은커녕 정신대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증인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염원하며 이를 위해 계속 운동을 해야 할 터인데, 지금의 분위기는 이제 '끝났다'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독일에서 산  35년.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다. 아들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 활동을 꿈꾸고 있고, 약하던 딸도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다. 딸은 통일 직후 동독의 무용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몸이(160cm, 45kg인데도) 뚱뚱하다고, 고전무용의 성적까지 좋게 받지 못했다. 동독출신 선생들과의 의견 차이는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할 얘기가 많다.
 
인종차별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하게 말할 물증이 없었다. 우리 딸은 지금은 고전무용보다 모던 무용가로서 활동하려 하고 있다. 아이들은 둘 다 예술분야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택했고, 자기들 나름대로 열정과 욕망,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부모로서는 자식들이 안전한 직업을 갖고 무난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미래가 불확실한 예술분야를 추구하는 아이들 때문에 가끔은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아이들은 제 삶을 살아갈 것이고, 남는 것은 나와 남편뿐일 것이다. 이제는 남편을 보면 종종 내가 독일인하고 산다는 느낌이 없다. 그것은 고난과 고통을 나누는 함께 나눈 인간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이 글을 끝내려니, 독일에 있는 남편의 가족들과 자주 만나 따뜻한 정과 사랑을 교환하지 못했던 부족함이 나를 아쉽게 한다. 그리고 이미 이 세상을 별세하신 한국의 부모님과 오빠와도 서로 주고받지 못한 정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2000년에 돌아가신 오빠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쇠약한 딸 때문이나, 경제적 이유로 부모님의 병가 때나 장례식에 참석 못한 것도 후회 막심하다. 해소되지 않는, 습관적 그리움에 젖어 있는 타국에서의 인생, 이것이 이방인의 삶인 것일까?

병원에서의 근무는 그야말로 작은 투쟁이었다. 병실동료인 막달레나 보조간호원은 나에 비해 덩치가 5배나 되고, 키도 두 배인 뚱보로, 우레 같은 큰 목소리로 긴 복도 중간에서
‘정로’가 아니라 ‘쌍노오’라고 나를 불렀다. 나의 부족한 독일어를 무기로 그녀는 정식간호사인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환자가 벨을 눌러 변기나 가래통을 치워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내가 예의 있게 선심을 써서 갔더니, 그녀는 그 뒤 갈 생각을 않고 벨이 눌러지면 나를 찾았다. 그러면 나는 가끔 큰 목소리의 그녀를 무시하면서 화장실에 앉아 그녀가 갈 때까지 기다린 후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점차 나는 분통이 터져 어느 날 나도 모르게, “Du gehen(너 가라)!”라고 병실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쳤더니, 사람 앞에서는 얌전하게, 뒤돌아서 소곤소곤 욕하는 것이 습관화된 독일 간호사인 그녀는, 정면으로 소리치는 것에 당황해 눈이 휘둥그레져서 병실을 나갔다. 그 후 환자들이 나만 보면 스스로 변기를 비우고 싱글 벙글거리며 보스가 온다고 농담까지 했다. 이때부터 참을성이 없어지면서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분통 터뜨렸다 ‘보스’ 별명


어느 날 말이 적은 병실과장이 함께 환자 진찰을 끝낸 뒤 나에게 “내가 배가 아플 때 당신은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왜 지가 배가 아프면 배가 아프지 내 골치가 아파?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말을 들은 간호사들이 킥킥거리며 웃어대어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키가 2m나 되는 과장 배에 당신 머리가 닿으니까, 과장이 배가 아플 때 당신은 골치가 아프다”라고 설명을 해줬다. 평소에 정중한 과장의 농담이라 화를 내기도 어려워 좀 시무룩했더니 간호사들은 내 눈치를 보며 그날은 나를 기숙사로 일찍 보내주었다.

1년이 지나자 힘들었던 독일인의 얼굴 구별, 언어, 간호사들과의 이해가 나아지면서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3년 고용계약이 아니었고, 송금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일을 다 뿌리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을 만큼 넘기기 힘든 고비였다.

근무를 한지 일년 후부터 병원 측은 해마다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 되면, 병원직원 및 한국 간호사(한복차림)들과 함께 서베를린시의 노동자 단체들과 노동조합, 정치가와 언론인,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시가 행진을 했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르는 장벽 앞, 비어있는 옛 국회의사당(Reichstag) 앞에서 5월의 데모연설을 벌였다.
 
동서장벽 무너진 날 감격

노동자 및 노동조합에서는 근무시간의 축소와 임금인상, 병가 때의 임금지불을 요구했으며, 베를린 시장은 장벽을 비판하며 장벽을 넘어서 서베를린에 오는 동베를린 시민에게 사격을 하지 말라고 동독에 호소했다.

1949년 이차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리되었다. 동독과 동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50년 중반에는 베를린 장벽화(Berlin-Blockade)를 선언하면서 서독에서 동독을 거쳐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던 식량공급까지 막았다.

미군은 서베를린 시민들의 굶주림을 막기 위해 비행기로 서베를린 시민에게 식료품을 수송했다. 그 후 소련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왕래를 금지할 것이란 소문이 돌자 많은 동독, 동베를린 시민들은 몇 개월을 계획해 비밀리에 여행자 비슷하게 위장해 조그만 가방으로 수 차례 이사 짐을 옮기면서 동독보다 부유한 서베를린으로 정착을 했다. 이들 중에는 71년에 결혼한 내 남편과 그의 가족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58년에 서베를린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 후 1961년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세웠고, 89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 까지 장벽을 넘어가는 동독의 시민들을 무차별 사격했었다. 89년은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지는 감격적인 해였다. 나는 베를린에 살면서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고, 그때 많은 한국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빨리 통일이 될 수 있기를 염원했다. 동서독의 통일은 갑자기 우리에게도 남과 북의 통일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했었고, 통일에 대한 관심을 확대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 병원에서의 3년 후, 늙은 간호사들이 많은 결핵병원을 떠나 대학병원으로 옮겨오니 기대한 젊은 사람들은 없고 무뚝뚝하고 말이 적은 동료들만 있었으나, 근무일은 한국과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다. 2차 대전 후 노인들의 도시로 유명했던 서베를린은 서독 내의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베를린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그래도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할머니들이 수두룩했다.  

71년 가을 나는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독일인은 외국인들에게 호기심이 많았다. 쇼핑할 때나 버스에서나 말도 잘 걸었고, 내가 무엇을 질문할 경우 친절히 대답도 잘 했다. 그러나 겨울철은 항상 어둡고 침울하여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해도 적적하고 지루한 생활은 계속되었었다.
 
67년 말, 송년 파티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은 당시 공과 대학생이었다. 향수병으로 시달리며, 절과 같은 결핵요양소에서의 근무는 사람을 너무 외롭게 만들어, 비록 그에게 첫 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나면서 적적함을 달래곤 했었다.

나는 당시 3년 계약이 끝난 상태였으나, 한국의 집안형편 때문에 송금은 계속되어야 했고, 돌아갈 조건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혼하겠다고 내가 한국에 남편의 사진을 보내자, 그것을 보신 아버님은 독일이나 한국이나 좋은 사람은 어디고 똑같다는 말만 하셨고, 어머님은 그저 침묵만 하셨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멀리 시집을 갈 사람이라고 무당이 말을 했다고 했다). 남편 쪽도 우리의 결혼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일찍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고 있었고, 아들에게는 시아버님의 직업을 따라 의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공대 기술계통을 택해 서운한 입장이었는데, 거기에 "외국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반갑지 않은 듯했다. 그저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형식적인 친절로 승낙을 한 것 같았고, 독일은 이혼을 자주 하니 두고보자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우리는 한국의 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독일식으로 결혼의 과정을 밟았다.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처음 호적관청에서 공고가 있었다. 결혼식 전에 신랑신부의 이름과 주소, 결혼식 날짜 등이 호적관청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실렸다. 이유는 신랑신부의 결혼에 이의나 문제제기를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즉 비밀로 이미 결혼을 했거나, 이혼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중으로 결혼하는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관청에서의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랑증인과 신부증인 등 소수의 참석으로 공무원이 주례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관청에서의 결혼 후에 다시 교회에서 성대한 혼인예배를 보게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했고, 나는 그것을 위해 세례까지 받았다.

신혼여행은 경제상의 이유로 서로가 포기했다. 그 즈음 남편은 공과대학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이 지금 31년째가 되었다. 독일 친구들로부터 가끔 "너도 징그럽다. 어떻게 똑같은 남자랑 아직도 사나?" 하는 진담 반 농담 반 어린 소리도 듣는다.

가정에 충실한 남편은 보통은 퇴근 후 집으로 들어와 시간을 보내며, 오히려 내가 여성단체나 여성모임 등을 위해 오후나 저녁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한국에서처럼 퇴근 후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정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웃에 대한 예의도 대단하다. 그는 아무리 급해도 주말이나 새벽에 인적이 드믄 조용한 동네 길을 걸을 때에는 자는 사람 깨운다고 조심하거나, 아예 좀 돌아가더라도 차라리 큰길을 택하기도 한다. 오래 살면서 느끼는 이 사회의 좋은 점은, 시민들이 개인의 존중에 따른 상호 기본예의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8년을 간호사로 근무한 뒤 직장을 그만 두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혼자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73년 큰아들이, 80년 둘째딸이 탄생했다. 독일 어머니들과 같이 놀이터에 앉아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3년 반 동안 잡담을 했다. 그러나 아들이 세 살 반 때 나는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대학 진학을 위해 그 준비과정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2년 반이 지난 후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받아, "베를린 자유대학 의대"에 입학신청서류를 제출했다.

그러나 입학 허가 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모든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어렵게 받은 "의대 입학허가서"를 미룰 수는 없었다. 정신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내버스인 이층 버스에서 빵 두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고, 허겁지겁 강의실, 실습실을 쫓아다녔고, 탁아소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집안일 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해야하니 종종 아이들을 귀양 보내고 책상 앞에 앉기도 했으나, 점차 남편의 생각이 달라져 의견의 충돌이 생기고, 휴가도 같이 못 가고 이리저리 힘만 들어 "사람다운 삶"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질질 결정을 끌다가 결국 "중퇴"로 끝장을 내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했지만, 무엇보다 둘째딸의 건강이 문제였다. 그 애는 쇠약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3주에 한 번 정도는 감기를 비롯해 자주 아팠다. 그러니 아이가 학교에서 밀려버린 과제도 많아져, 마치 내가 학교를 대신 다니는 것처럼 그 애를 도와주어야 했다.

독일 학교에서는 학업과 함께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며, 명랑하고 즐겁게 놀 기회를 마련해 주고, 미래와 예의보다는 "현재" 삶의 중요성과 독립적 인간을 만드는데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따뜻한 정으로 키우는 한국의 교육도 나쁘지 않다. 이곳은 보편적으로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한국의 순한 아이들에 비해 충동적이고 우악스럽다는 느낌인데, 권위주의적이 아닌 교육의 영향 때문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는 아들 학급의 학부모대표 일도 해 보았다. 3개월마다 담임선생 및 부모들과의 "학부모 저녁모임"이 있었고, 학교 전체의 학부모 모임에도 부지런히 참석했다. 대부분 학부모 모임에서는 미국이나 소련과의 "교환학생 문제", 재정문제, 교과서 선택, 실습문제, 학교 수준비평, 선생들의 교환, 마약문제, 낙제문제, 여행비 등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토론을 좋아하는 독일인들은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해대곤 했다. 그래서 밤 10시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결론을 내야할 일이 있을 때는 말들을 빨리 해버려 이해하기 힘든 적도 적잖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가정을 돌보는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이 너무 단조로운 것 같아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을 이용해 시청에서 관리하는 자원봉사자 팀의 일원이 되어 독일 할머니 한 분을 위로 방문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의 나의 부모님들이 편찮으셨을 때 돌보지 못한 죄의식이 이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양로원에 사는 그 노인은 장애자인데다가 가족이 없이 가난하며 외롭게 살고 있었다. 게다가 외과 의사의 척추수술 실수로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쓰라림과 증오에 시달리는 노인이었다. 나치 사상에 젖은 아버지를 두었던 할머니는, 물론 자신은 아버지의 사상을 반대한다고 했지만, 자기가 외국인 여자한테 위로를 받아야 할 운명이 될 줄이라고 과연 생각했을까?
 
첫 방문 때, 노인은 침묵하며 턱과 냉정한 눈짓으로 앉을 자리를 가리키고, 침대와 침구를 구김 없이 정리하라는 신호를 하고, 찻잔과 수건들을 제자리에 놓게 한 후에야 나에게 입을 떼었다. 이런 냉랭한 시작이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할머니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몸의 상태가 나빠져 병원으로 옮길 때는 자신이 아끼던 고향산천 그림까지 나에게 주었다. 가끔 할머니가 혼자 지하실에 내려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그 노인이 줏대와 자부심이 강한 독신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일의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3년이 지나자 오히려 내 자신이 정신적으로 피곤해 지기 시작했다. 인생을 포기한 시각으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오로지 죽음 만 기다리는 할머니의 입장과, 그렇지 않다고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하는 일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매번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나의 삶에도 항상 즐거운 시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점차 그게 고역으로 다가왔고, 내가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이 될 때도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를 진정으로 위로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3년 동안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중단했다. 그러고 나서 1년 후 할머니의 별세통지를 받았다. 장례식에는 목사, 시청공무원들 그리고 나 모두 4 사람뿐이었다.


66년 가을 “똥고집” 독일에 오다

1966년 낙엽이 뒹구는 가을, 청춘의 20대에 내가 간호사로 한국을 떠나와 독일에 왔으니, 이곳에서 산 삶이 이제 35년이 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흘러가는 일상생활에 맞춰 독일의 풍습, 문화, 사회질서 지키며 얌전하게 적응해 왔다. 독일인이 다 됐나? 하는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곳의 “극우파”로 인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금 내가 "외국인“이란 생각을 하게된다.

이 긴 시간을 살면서, 이곳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들이 나를 “가짜” 독일인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독일 남편과 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새 나의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나의 운명이 이곳에서의 정착인가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된다.

갑자기 35년이 넘은 세월이 이제야 현실감을 가지고 다가온다. 한국을 떠날 때는 내가 내 고향을 등지고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곳에 살기로의 결정은 저절로 내려진 것이다. 되돌아보면 독일에서의 처음 10년은 독일 사회의 무 경험자로서의 탐험가, 개척자로서, 10년은 꿈과 소망을 이루는 노력자로서, 10년은 현실에 적응한 당당한 독일의 사회일원으로서 내 의무와 권리를 발휘했고, 5년째인 지금은 내 정서에 충실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누리는 단계에 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앞에 나열한 것들이 나와는 거리가 멀고도 가까운 나그네의 느낌, 퍼즐이 맞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1966년 가을, 외국 가기 힘들었던 간호사 시절, 간호사 모집에 호기심이 발동해 몰래 신청서를 낸 것이 원인이 되어 남 따라 시장 간다고 “대구역”에서 부모님과 이별하였다. 그 당시 보편적으로 가난한 한국이었음으로 찬성, 불찬성 할 것도 없이 아쉬운 부모님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서울행에 올랐다. 설렘과 기쁨과 불안으로 마음이 들뜨고 혼란한 상태였다.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독일로 떠났다. 어렸을 때부터 똥 고집에 기분파로 하고싶은 일도 잘 했고, 싸우기도 자주하고, 뱃속에서 나오는 심정으로 한 행동도 많았다. 일찍 부모 곁을 떠나 돈이 안 드는 간호고등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을 한 것이 나에게 독립심을 길러주었고, “독일행”이란 결심까지 하게 해 준 것 같다.

나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어두운 베를린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에 옮겨 타고 달리기 시작하니, 집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숲을 낀 외로운 길이 나타나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차를 모는 뚱뚱한 중년의 운전수에게 말 못하는 “아다다”처럼 손짓 발짓으로 통화시늉을 했다. 그는 우리를 유괴해 가는 것이 아니고 병원 근무처로 간다고 이해를 시켰지만, 빽빽한 나무들과 베를린의 실망스런 첫인상이 나의 불안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 숲에 쌓인 병원의 정문을 통과한 후 으슥한 곳에 도착하니, 그곳이 바로 기숙사였다. 앞으로 이 곳에서 일을 해야 되나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결핵요양병원이었다. 활짝 웃는 뚱뚱한 간호사들이 친절하게 대접했지만 계속 먹어야 하는 느끼한 덩어리 고기, 콩 수프, 우유밥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언어도 고생이지만 식사도 고생이었다. 그때부터 오랫동안 계속 잘 먹지 못해 나는 늘 노란 탱자 얼굴이었는데, 30년 후 누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흰 사람인데, 그때는 왜 노란 탱자였느냐고 물었다. 못 먹어서 그랬었다고 말하며 한바탕 웃었다. 마시면 설사하는 우유는 적응하는데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오죽했을까. 그에 비해 치즈, 소시지를 끝도 없이 먹어대는 독일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숨까지 어렵게 쉴 정도로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다.
“독일은 무엇이 다르냐?” 하고 질문했을 때, “독일에는 당신같이 뚱뚱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이 특별히 친절하다” 라고 대답해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뚱뚱이들은 뚱뚱해도 날씬하다는 말을 듣기 좋아하고, 80이 넘은 할머니도 결혼하지 않았을 경우 Frau(부인)가 아닌 Fräulein(아가씨) 라는 명칭을 듣길 원한다는 것들이 초보 외국인들이 모르는 독일의 관습이라는 것도 늦게 서야 알았다. 그러나 그 사이 이곳도 풍속이 바뀌어 지금은 모두 "Frau"라고 부른다.

아무튼 나는 잘 먹지도 못하면서, 근무를 위해 어두운 하늘의 새벽 별을 보고 숲길을 한참 지나서 병동에 도착했고, 어두운 저녁별을 보면서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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