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기울며 대학 중퇴하고...

손행자(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학교 다닐 적에 제일 어려웠던 과목이 국어였다. 그런데 신문에 내 글을 싣는다니 망설여지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도 경제난 때문에 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나의 경험담을 써서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될까하여 용기를 내게 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무난하게 세상물정 모르고 학교공부만 충실해왔다. 그러나 아버님이 4·19 뒤 군수, 경찰서장 등 일괄 처리에 몰려 본인의 잘 잘못과 무관하게 직장을 물러나시게 되었다.

그 후 아버님은 장사 중에 그래도 고상한 것이 서점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항상 읽고 공부하시는 자신의 성격에 맞아서 택하셨는지 광주 계림동에 서점을 여셨다.

그 때가 내가 조선대 약대에 입학하던 해였다. 어버님은 경험 없이 시작하신 일이 잘 되지 않아서 집안은 생활이 어려워졌다. 아들이었으면 집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마련해 주셨겠으나 나는 딸자식이기에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 실직으로 학업 중단
 
그러나 내 마음은 어떻게 하면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나 하는 길만 찾고 있었다. 집에서 한글타자학원에 다니라고 하셔서 가기는 했지만, 시간만 채우고 정신은 딴 곳에 있어서 3개월을 다녔으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결국 타자학원 선생님도 불만스러워하기만 했고, 일자리를 열심히 구해보아야 미인이나 되면 비서로 오라는 곳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키도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니 허송세월만 하면서 집안 일만 하였으나 그것은 너무 지루할 뿐이었다.

그러다 원불교 수녀나 되어 세상사람을 끌어안으며 사는 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한데 상의도 없이 옷을 챙겨 싸 가지고 원불교 교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 전에 원불교 정녀님을 만나 미리 알아보았더니, 전남여고 나왔으니 원광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고, 또 천주교 수녀가 되려면 그 과정이 오래 걸리고 어려워서 엄두도 낼 수가 없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원불교가 초창기이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가 열심히 배우면 외국에도 파견을 한다고 하셨다.

그 교당의 생활이란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내 또래의 다른 한 처녀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밭일하고 모든 잡일을 성의껏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리에 있는 본당의 세미나에 다녀오라고 해서 일주일을 다녀온 뒤 내 고민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원광대학의 학비는 면제되지만 생활비는 각자의 집에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돈이 있으면 약대 학비를 내고도 남을 돈이니 그것도 그림의 떡이었다.

실망 속에 궁리를 해보아야 별 방도가 없어 그만 병이나, 먹으면 토하고, 3일을 누워 있으니 미안해서 다시 집으로 가겠다고 하니 승낙을 했다.
 
상심 끝에 무작정 원불교당으로
 
그때 실망스러웠던 것은, 수녀들은 천사 같은 사람들로만 알았던 어린 마음에 돈 많은 신자들에게는 수녀들이 더욱더 친절하고, 가난해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점이었다.

세상의 삶이나 수녀들의 세계가 별다른 것이 없으며, 기왕 뼈빠지게 이곳에서 일할 바에야 불쌍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이 더 바람직하다 느껴 광주행복원고아원의 보조로 들어갔다.

한달 월급이 5천원. 그 당시 구두 한 켤레가 6천원이였으니 비교해보면 얼마나 적은 돈인지 상상할 수가 있다.

그나마 돈을 벌려고 간 것이 아니기에, 6살짜리 20명을 맡아서 한방에서 자고 먹고 같이 데리고 놀이하고, 그 많은 손빨래를 해야되었으나, 마침 여름철이라 옷들이 빨기가 쉽고 저녁에는 아이들을 시냇가에 데리고 가서 씻기면서 3개월 동안은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나 날씨가 차츰 추워지니 오줌을 싸면 담요를 빨아야되고, 잘 마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힘이 드는 것 외에도, 일의 내용을 다 알고 나니 또 새로운 일을 찾느라 마음이 안정이 안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치사량의 2배 독약을 먹었지만...
 
그 동안 아버지는 책방을 닫으시고, 서울에 형사전문학교가 설치되어 강사로 계시면서 큰 남동생의 중학교 졸업이 얼마 안 남으셨다고 어머님도 서울로 이사를 하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도대체 내가 서울에 함께 가서 전라도 사투리나 쓰면서 비좁은 곳에 살 생각을 하니 답답해서 고모집으로 가겠다고 결정을 했다. 이미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학교는 광주에서 다녀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님이 장성, 보성, 영암, 순천 ,여수 등지도 전근을 가실 때마다 나와 언니를 광주의 고모님 댁에 남겨놓았기 때문에 고모님은 어머님이나 다름없었으며, 고모부님은 직업이 선생님이라 우리 마음도 잘 알아 주셔서 아버지보다 다정하고 어렵지도 않으신 분이셨다.
 
가족과 헤어져 고단한 방랑
 
게다가 고모님이 문방구를 운영하셔서 나는 물건도 팔고 집안 일도 도와드리고 도매상에 가서 물건도 사오면서 몇 개월을 재미있게 지냈다. 그런데 그 일을 다 알고 나니 또
지루해져, 친했던 친구 영숙의 어머님 일을 도와드리게 되었다.

영숙의 어머니는 목욕탕을 운영하셨는데 4남매를 혼자서 키우시면서 다과점도 해보시고 여러 가지 장사를 하신 분이었다. 영숙이네 집은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 집에 가면 자유롭고 또 따뜻하게 대해주어 그곳에서 몇 개월 일을 하다가 일을 다 배우고 나니 다시 새로운 일이 하고 싶어졌다.

그 동안 세월이 지나 약학대학에 함께 들어갔던 친구들은 벌써 졸업을 하고 이곳저곳에 약국을 차렸고, 그 중에 전남의과대학병원에 근무를 하면서 약국도 하는 친구가, 자기의 약방에 와서 일을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연락을 해와, 나는 너무 기뻐하면서 낮에는 약도 팔고 제조까지 하는 약사노릇을 한 동안 했다.

겁없이 마이신도 하나씩 넣는 약을 제조했으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당시 매상도 적지 않게 올랐다는 기억이 나는데, 얼마동안 약국에서 일을 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그러나 그 친구가 병원의 약제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별다른 일자리는 없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 보았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시집오라는 사람도 없었지만, 시집갈 마음도 없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살고 계시니 내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하루는 약학사전을 뒤져 약국에 있는 독약 세 가지를 골라, 사람이 복용하면 죽을 수 있는 양이 1g이면 2g, 2g이면 4g, 하는 식으로 양을 배로 하여 10g을 제조해놓았다.
친구한테 미안하니 폐를 조금이라도 덜끼치려고 약국 쉬는 날을 기다렸다가 그 전날 밤 22시에 문을 닫고 복용을 했다. 죽는 사람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유서는 쓰지 않고 침묵으로 세상을 뜨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독약을 먹었는데도 9일 후에 다시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님이 와 계시고, 의사들이 왔다갔다하며 무슨 약을 먹었는가 궁금해하기에 말해주었더니, 아마 세 가지 약물이 중화작용을 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약국 일하며 조제기능 배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기차를 타고 가다가 내렸는데, 그 세상이 다 흰색으로, 꽃도
흰색, 모든 물건들이 하얗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아파서 군인들이 많이 서있는 광장에 있는 병원에를 찾아갔더니, 당신은 이곳에서 치료를 못하니까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이제는 서울로 함께 가서 지내야한다고 하셔 서울로 온 뒤 좁은 집에서 한달 정도 있는 동안, 영숙이가 자신의 형부가 춘천에서 군의관으로 있으면서 저녁에는 오승룡 내과병원에서 일을 하는데 간호원을 찾으니 가서 일을 하라고 알선을 해주었다.

내목숨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불가항력을 느끼며 다시 용기를 내 열심히 일을 배우면서 약제사가 없으면 약국일, 검사실에 선생님이 안 계시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배워다.  x-Ray촬영만 빼고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런 나를 원장님 내외분이 아껴주셔서 그곳에서 9개월을 충실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파독 간호요원 모집 신문광고가 여의치 않았던지 시험응모자가 없다며 각 병원으로 전화연락이 왔다. 나는 즉각 그 다음날 가서 시험을 보았고, 한달 동안 해외개발공사에서 강습을 받은 뒤 독일에 오게 되었다.


독일에 간호보조원으로 오다...
 
10월 독일에 도착해 보니, 날씨는 항상 비만 오니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아침&점심은 그런 데로 맛있게 먹었지만, 저녁에 빵을 먹기는 아주 고역스러웠다. 날씨가 우중충해 뜨뜻한 국에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데, 새까만 보리빵에다 치즈를 얹어 먹어야 하니 한숨만 나왔다. 배가 고프니까 먹기는 하지만, 먹고 나도 속이 허전해 퇴근을 하자마자 매번 국수를 해먹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 잘 수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하노버에는 60명 정도의 간호보조원이 오기로 되어 있고 간호원들은 몇 명 되지 않아 한국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은 없었다. 우리 병원은 소아과여서 말 배우는 것에 창피함이 없었다. 병원에 보호자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밥 먹이고, 치료하고, 한 방에 6명 정도를 하루 종일 볼 보아야 했다.

10명의 젊은 여성들이(21-25살) 근무 끝나면 모여 앉아 병동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누며 못 알아들었던 단어들을 독일 간호원들로부터 설명 받았다. 도착해서 일주일 동안밖에 독일어를 배우지 못하고 바로 근무를 시작했으니, 그 당시 독일간호원들은 우리가 못 알아듣는 말을 일일이 설명을 해주어야 했고, 그들은 호기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말도 못 알아 듣는데 근무하려니...
 
처음에 우리는 그저 눈치로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루 빨리 독일어를 습득해야 제대로 알아듣고 실수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저녁마다 10명이 모여서 독일어공부를 했고, 매주 한 번씩 'Volkshochschule'(국민대학)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말을 잘못하니 바보취급을 받지 않을까 생각되어 그럴 때마다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당시의 노동계약조건은 5년. 노동 3년 후에는 간호학교 2학년으로 입학자격을 주었고, 학생월급을 받지 않고 매달 30마르크씩 각자가 내서 제비를 뽑은 다음 녹음기, 카메라 등 살림장만을 했다.

한국에서 떠나올 적에 한국에 있는 은행하고 저축예약을 하고 왔기 때문에 매달 송금을 하면 아버님한테서 얼마를 찾았노라고 연락을 주셨다. 쉬는 날에는 친구들한테 편지를 쓰느라고 항공우표와 편지지에 드는 돈이 용돈에서 꽤 비중을 차지했다.

1년 후 하노버의 각 병원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른 병원의 월급이나 대우가 더 좋은 것 같았고, 한 병원 안에서도 다른 병동이 편한 것 같아 서로 바꾸는 일을 의논하고, 여러 가지 경험담을 주고받은 뒤 헤어질 때는 섭섭해서 눈물들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 병원의 경우는 다 만족해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끼리 병동을 바꾸어 보아야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다른 곳으로 옮기면 새로 다시 일을 배워야 되는데, 이제는 능숙해져서 학생들이 오면 일을 가르쳐 주는 위치에 왔기에 나는 한 병원, 한 병동에서 3년 동안 옮기지 않고 일했다.

3년 후 간호학교를 들어가니 몇 주, 혹은 몇 달만에 이 병동 저 병동을 돌아다녀야 되고, 옮길 때마다 밑에서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되고, 공부도 해야 되고, 소아과라 아이들에게 주의해서 약도 먹여야 했다.

야근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 2주일 계속 혼자서 일을 할 때는 전화받는 일이 힘이
들었는데, 일단 "예예" 해놓고 이것인가 저것인가 한참 생각을 해야 되었으니, 환자들이 어린아이들이라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돌보아준 수녀님은 간호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눈이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고 우리들이 장차 학교를 들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분이 담당을 한 것 같은데, 3년 후 다들 느낀 것은 자기 병동 수간호원의 생김새나 성격들이 우리들하고 비슷한 사람들을 그 짧은 시간(1주일만)에 느끼고 병동배치를 하셨구나 하는 느낌을 하게 되었다.

수녀님들이 다정스러운 분들이라 생각되지만 그 분은 어찌나 총명한지 대하기가 어려웠고, 너희들이 간호학교 2학년부터 들어갈 자격이 있지만 공부하기가 어려울 테니 1학년부터 시작하되 쉬는 날에서 다음 학교 가는 시간을 제외해야 되는데 찬성하는가 물으셨다.
 
근무, 공부... 힘들여 간호사자격
 
다행히도 1학년부터 시작을 했으나, 처음 반 년 동안은 무슨 강의를 하는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하고 골치가 아팠다. 내용은 독일학생의 노트를 빌려서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었고, 1년쯤 지나니 강의하는 것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으나, 우리들 나이가 25-28세 사이라, 독일학생들보다 2-3배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또 휴일이 되어도 편히 쉬지 못하고, 공부생각을 하게 되지만, 공부를 하자하면 곧 머리가 아파 쉬어야 되는 등, 학교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흔해빠진 간호원 자격을 따려고 이 고생을 할 바에야 다른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중단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니 '오퍼레이터'(Operator)라는 컴퓨터 관련 직업이 해볼만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가 1970년. 하노버에는 그것을 배울 데가 없고,  뒤쎌도르프에서 학교를 6개월간 다녀야 하며 자비로 배워야 되는데, 그 동안 계속 송금을 해버려서 모아놓은 돈도 몇 푼 안되어 그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년을 쉰 다음 다시 간호학교를 계속했고, 72년 4월에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광부로 독일 온 남편과 만남...
 
그 동안 한국의 가족은 아버님이 수사범죄서류작성법이란 책으로 성공을 하셔, 형편이 나아져 조그만 집도 장만하게 되었고, 나는 그 걸 계기로 더 이상 집으로 송금을 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간호학교 졸업 후, 이제는 직장도 옮기고 싶고, 내 나이가 30살이 되었으니 결혼을 해야하나, 아니면 SOS 어린이마을에서 보모로 일을 하나 생각중이였다.

독일에서 한국 분들을 서로 알게되는 계기는 1년에 여름철과, 크리스마스 때로 2번이
있는데, 그때 안면이 있는 양재범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나서, 오고 가는 중에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서로 고생한 이야기, 독일에 오게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가 하노버에 방학이 되면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온 것으로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그는 한양대를 다니다가 학비조달을 못해서 광부로 독일에 왔으며, 노동 3년 계약을 마치고 독일의 대학에 입학했다.
 
우연히 만나 고생얘기 하다보니...
 
그러나 나이가 많아 독일 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지원해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 방학 때면 돈을 벌면서 힘들게 공부를 했다. 나는 그가 공부하는 산중도시 클라우스탈-첼러펠트 (Clausthal-Zellerfeld)에 직장을 구해놓고 이사를 한 다음에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렸더니, 속으로는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되니까 정이 들어 73년에 결혼을 하고 77년에 첫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곳은 원래 광산학과가 시초였고, 그 후 공과대학으로 확대된 곳이라, 숲하고 호수밖에 없는 산중이며, 겨울에는 4개월 이상 눈이 쌓여있는 독일에서는 추운 지방에 속한다.

눈이 오래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남편은 유아차 바퀴에 스키를 만들어 가지고 못 가는 곳 없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산보를 다녔으며 그것으로 특허까지 냈었다, 그 산 속의 생활은 남편이 충청도 심신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봄이면 씀바귀로 나물과, 쑥국 등을 먹고, 고사리를 따서 말리고, 여름철에는 산딸기를 따서 잼과 주스를 만들어 놓고, 가을에는 마로넨이라는 우리 나라의 표고버섯하고 비슷하게 생긴, 향기로운 독일 버섯으로 별미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 괴팅엔에 모임이 있을 때는 이 버섯을 따가지고 가서 함께 요리를 해 먹기도 하였고, 근처 호수에는 가재가 많아 삶아서 먹기도 하고 간장에 넣어 가재장을 담아 밑반찬을 만들기도 하였다.

남편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괴팅엔 시에서 열리던 토론회에 열심히 참석했고, 나는 인석(아들)이가 어려서 직장생활하랴, 늦게서 낳은 애를 남한테 맡겨놓고 어디를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정치문제는 남자들만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살았다.

그러나 5·18 광주 항거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게 되고, 이것을 독일 텔레비전에서 직접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 내 고향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남한테 미루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19가 났을 적에 남학생들이 전남여중과 여고 앞길에서 소리를 지르며 "너희들도 나와라" 부르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은 하지 못하고 남편을 통하여 토론내용을 관심있게 듣곤 했다.

그후 김대중씨 구명운동 때에 처음으로 내 이름을 정정당당하게 서명할 수가 있었다. 그 성명서는 당시 독일의 총재였던 빌리 브란트에게 보내어졌다. 서명은 6천명(?) 이상이 했으면 독일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회답을 받고, 독일 각처에서 서명운동을 했으며, 독일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만장일치로 성명서에 찬성을 했다.
 
5·18 소식 듣고 내 고향 광주 생각
 
빌리 브란트 총리의 관심과 성명서는 현 김대중 대통령이 생을 보전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모르고 있는지, 2년 전 대통령으로서 독일을 방문했을 때 빌리 브란트의 묘라도 한 번 찾아보지 않고 돌아가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남편은 흥분하기도 했다. 우리가 독일국회 자료실에 그때의 회의내용 자료를 요청했더니 몇 시간만에 회의진행 토론결과와 우리가 보낸 성명서까지 모든 서류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기계과를 졸업하고 우리는 에쉬보른 이라는 시로 이사를 했는데,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에 자주 모였고, 인근도시에 있는 한국사람들과 왕래가 잦았다.

그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한국여성들은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대게 2주일 한 번 쉬는 날이면 집안 일도 해야하고, 아이들도 키워야했으며, 풍족하지 못하는 경제 속에서 피곤한 몸으로 직장에 나가는 여성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가정 일만 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더 자주 오게 되었다.

괴팅엔, 뮌헨 그리고 베를린과 독일 각처에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김치와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나서 토론도 할 수 있다 하여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여자들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데도 생색은 남자들이 다 내곤 했다.


독일에 심은 한국음식의 맛...

올해 10월이면 나는 36년간 독일에 산 셈인데, 먹고 싶은 독일음식이 없으며 우리 음식, 더욱 김치는 2일만 안 먹으면 속이 허전하고, 느글느글해서 밥을 안 먹은 것만 같다.

겨울에 김장을 하기 위해 벌써 4-5월에는 생멸치를 사다가 멸치젓을 담는다. 청국장도 자주 해먹는데 콩을 삶아 스팀 위에 담요를 씌워 놓아두면 5-6일 후면 실이 나와 먹게 된다. 처음에는 그것을 아들 방에다 놓아두었더니 아들은 냄새가 난다고 제 방에서 안자고 우리 침대에 오곤 했는데 서로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방에서 냄새가 나서 통풍을 오래 해야했다.

그래서 지금은 상자를 짜서 25촉 짜리 전구를 켜고, 시간조절기로 시간을 조정해 온도를 25도로 해놓으면, 3일이면 실이 나온다. 그러니 빨리 숙성이 되어서 좋고, 밖에 내놓고 할 수 있어 냄새가 안나니, 일종의 발전을 한 셈이다.
 
청국장·김치 식도락 즐겁기만...
 
겨울동안 김장김치 썰어놓고, 돼지고기 조금에 두부를 넣어 청국장찌개를 끓이고 깍두기와 먹으면 한 겨울 건강에도 좋고 맛이 있어 식사하는 시간이 즐겁기 그지없다.

74년에는 아직 아이가 없어서 텐트를 가지고 스페인 여행을 갔다가, 바르셀로나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에브로 강과 지중해가 합쳐지는 곳에 '리오마(Riomar)'라는 곳에 들르게 되었다.

물이 출렁출렁 잠겨있는 넓은 논에는 벼가 파랗게 심겨있고, 밭에는 참외, 수박, 가지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어 한국의 시골풍경 바로 그대로였다, 시골사람들이라 인심도 좋아 밭에서 직접 참외를 사면 우수를 집어주는 곳이다.

그곳은 햇볕이 쨍쨍 내리쪼이고 채소과일이 푸짐할 뿐 아니라, 마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해물은 어렸을 적에 고향에서 먹었던 갈치, 꽁치, 조개, 맛, 바다고동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처음 갔을 때는 집도 몇 채 없고, 바닷가에 조개잡는 어부 외에는 사람을 볼 수도 없었다. 우리는 매년 휴가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들렸다가 얼마나 발전됐나 보곤 하는데, 84년도에 들렸을 때는 집들을 많이 짓기 시작했고 조그마한 도시가 되어 길도 나고 가로수도 심는 중이었고, 벌써 이주해와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져 바로 계약을 하고 집을 샀다.

겨울 휴가철에 우리 집이 된 곳이다. 남편이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오면 소금간을 쳐서 햇볕에 말려 가지고 온다. 또 그곳에서 한 시간쯤 차를 타고 큰 항구로 가면 오후에는 들어오는 고기잡이배들이 다양한 생선종류를 싣고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밤에는 전지를 가지고 가서 바닷게를 잡아서 그것으로 게장을 담아온다.

겨울철에는 오렌지가 제일 맛있는 때라 50Kg씩 사 가지고 독일에 돌아와 친지들과 나누어 먹고 쨈을 만들면 아주 향기로운 별미가 된다. 그곳은 쌀이 나는 곳이니, 방앗간에 들려 우리가 먹는 쌀 비슷한 쌀을 사겠다고 하면 그때 바로 정미를 해준다.

여름철 3주, 크리스마스 2주의 휴가는 짧은 기간이라 우리는 늘 아쉬운 마음으로 독일로 돌아오게 된다. 겨울철에는 에브로(Ebro)강 상류로 강낚시를 가는데 독일에서 휴가 온 독일 사람들은 매기, 흑도미를 잡아오면 빵가루를 묻혀서 기름에 튀기는 요리 외에는 할 줄을 몰라 몇 마리씩 우리에게 선사를 하면 흑도미는 살이 쫄깃쫄깃해서 회로 먹으면 아주 맛이 있다.
 
한국 채소·버섯 현지인도 좋아해
 
스페인 생활에 반해서 스페인어를 배우러 학교에 다니고, 말이 통하니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86년부터는 뒤셀도르프 근처인 크레펠트로 남편이 직장을 옮겨 경제적 형편도 풀리고 집도 독채를 빌려 살았는데, 정원이 아주 넓어서 온갖 한국의 채소씨를 부쳐와 여름철 내내 채소를 사지 않고 한국의 채소를 주위 친구들과도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상추, 오이, 쑥갓, 파, 부추, 깻잎, 배추 그리고 싸리버섯도 재배하고, 독일에서 표고버섯이 좋다고 하여 씨를 사다가 통나무에 뿌려 놓으면 7년 동안 3번 수확을 할 수 있었다. 닭까지 키워 계란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계란을 사겠다고 일부로 오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에서 나는 채소는 별로 먹고 싶은 것이 없다. 병원근무는 매달 3-4일만 대기근무를 했기 때문에 시간여유가 있어서 밭농사 짓는 것이 아주 즐거운 취미의 하나이다.


김치·된장국으로 여생 보내는 게 소원...
 
우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이요법 상담소에 1년 반을 근무하다가 독일 경기가 나빠지자 후계자를 찾기에, 나는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에 질병에 대한 지식도 있고 해서 94년 9월에 상담소를 인계받았다.

내가 하는 일은 체중이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다이어트를 통해 체중을 감소시키는 식단을 짜주고 상담을 하면서 체중을 조절하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독일식의 체중감소의 영역을 넓혀 감자, 과일, 채소를 자주 먹는 것에 중점을 두고, 고기를 적게 먹는 방법으로 고쳤다.

독일의 의료보험제도는 보험료가 비싼 대신 혜택이 넓고 많은 장점이 있으나, 치료를 받을 때 개인이 따로 부담하는 경비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건강을 소홀히 하는 단점도 있다.
 
독일식 식습관 비만 위험커
 
독일은 빵이 주식이라 빵에 버터나 마가린을 바른 다음 치즈나 소시지를 얹어먹고, 채소요리를 할 때도 기름을 넣어서 요리를 하기 때문에 고기 외에도 지방을 많이 먹게 되며, 독일 사람들이 즐겨먹는 케이크에는 기름뿐만 아니라, 설탕까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체중이 늘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식물에 요오드가 적게 들어있어 신진대사가 잘 안되어 갑상선 기능부진이 많기 때문에 단지 다이어트를 해서 체중을 줄이기는 어렵다.

우리 연구소의 특징은 유사요법을 기반으로 하는 약제를 주사하여 신진대사를 돕도록 하는 방법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8년 동안의 경험이 말해 주는 것은, 당뇨병 환자들이 이 요법을 받을 경우, 음식을 적게 먹어도 혈당을 정상으로 유지할 수 있어서 쉽게 체중을 줄일 수 있고, 적게 먹으니까 인슐린을 적게 맞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이 주사약에는 9홉 가지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Ca, K, 등이 들어 있어 갑상선 부진 환자들에게 효과가 아주 좋다. 그러나 주사의 효과는 다이어트 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지 단지 주사 만 가지고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지만 독일 사람들은 자기 건강을 위해 개인적인 지불을 하는 습관이 없는 데다, 이것이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병치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5년 동안은 수익이 적어 현상유지하기에도 아주 어려웠다.

힘든 육체 노동은 아니지만 고객들이 아무 때나 시간이 있을 때 찾아 올 수 있도록 연구소를 열어 놓고 있어야 하니 나의 자유시간이 주말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이 고령이셔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어도 1-2주일은 남에게 맡겨 놓을 수가 있지만, 이왕 한국에 간다면 2-3개월은 있고 싶어 적당한 시간을 찾으며 자꾸 미루는 바람에 벌써 한국에 다녀 온지가 18년이나 되어 버렸다.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두부요리 학원을 다이어트 연구소와 함께 경영하는 것이다. 이곳 독일에도 이제는 콩으로 만든 요리가 건강에 좋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고, 더욱이 갱년기 여성들에게 필요한 식물성 호르몬이 들어 있어 두부 요리책도 나오고 있고, 사람들도 두부를 많이 먹으려고 노력을 해서 두부공장도 많아 졌다.
 
한국음식 활용 식이요법 개발 꿈
 
그러나 한국식 된장이나 다양한 두부요리방법 같은 것은 아직 미미한 편이라 나는 생선요리와 함께 이런 것을 직접 가르쳐 줄 수 있는 요리학원도 함께 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당뇨병 환자에게 몸무게와 인슐린 투약의 양을 줄이게 하는 우리의 유사요법 혼합약제의 효능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연구소의 방법으로 체중을 줄인 환자들의 보고서를 모아 당뇨병 전문연구 치료기관에 알려 다른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의 바람은 독일에 살고있는 친구들과 함께 나이 들어 혼자의 힘으로는 생활할 수 없을 때 김치, 된장국, 밥을 먹고서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이다.




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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