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담했던 '서울의 봄' 뒤로하고

강여규(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내가 독일에 온 것은 80년 3월, 박정희가 암살된 후 불확실한 희망이 존재하던,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최루탄 가스와 휴교령이 반복되던 대학시절을 등뒤로 나는 조금은 도망가는 심정으로 유학을 택했다.

박정희 정권의 병영화한 사회에서,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구호와 함께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 그것을 위해 노동자의 인권이 참혹하게 짓밟히고, 모든 비판적 목소리가 빨갱이로 도장 찍히는 숨막히는 사회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단속을 피해야 하고,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에 불안해하면서, 남자친구들이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군대에 끌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비굴을 강요당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가난하고 초라했던 우리들의 야학이 폐쇄되는 것을 겪으면서 나는 무기력과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숨막히는 억압 피해 무작정 유학길
 
한국어를 한 마디로 못하던 서양 신부가 교정을 배회하며 민들레를 유해한 잡초라고 뽑아대던 미국식 대학의 영문과에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갓 돌아왔다는 선생이 수업시작 전에 창 밖을 내다보며 "What a beautiful day!"를 남발하고, 일년도 안 되어 제자에게 대리번역을 시키는가 하면, 인상깊은 강의를 하던 한 교수가 갑자기 청와대를 드나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대학을 잘못 택한 것인지, 대학이 모두 그런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졸업 후, 취직하여 사회에 편입되는 것에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학문에 대단한 정열이 있던 것도 아니면서, 우리의 소박했던 70년대 민주화의 요구를 남겨두고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일단 한국을 떠난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나는 문학이라는 재미 외에는 별 애착이 없던 영어를 버리고 독일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택했다. 영어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리라는 어찌 보면 황당한 고집과, 철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한국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유럽의 한 나라, 독일을 택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본 것만이 아닌 다른 것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희망과 함께, 개인의 독자적 삶을 포기하고, 사고와 행동의 틀을 규격 속에 집어넣으라고 강요하는 국가적 횡포와 사회적 강요를 거부하고 떠나는 것은 정당하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 변명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떠나는 자의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던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떠남이 그저 단순한 선택일 수만은 없던 배반의 느낌이 거기에는 있었다.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그 중에는 누구보다도 정신과 몸의 외유가 필요한, 보다 성숙한 사회적 참여를 위해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외국을 드나드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고, 유학생들조차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값싼 방학휴가 정도로 인식되는 요즈음에는 이런 심리적 콤플렉스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채 여행의 자유도 없고, 여권 하나 받는 일이 몇 달 씩 걸리고, 유학시험이라는 것이 있던 70년 대 말에는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특권의 획득이란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가방하나 들고...
  
그런 단순하지 않은 심정으로 나는 JAL기를 타고 일본, 알래스카를 돌아 하루 이상이 걸린 긴 비행 끝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와 줄 사람 하나 없던 나는 무거운 짐을 끌고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 도착해 나를 독일의 남쪽 끝 푸라이부르크로 실어다 줄 기차를 기다리며, 냉한 습기에 얼어 있었다.

먹이를 쪼는 살찐 비둘기들, 공기 속을 떠다니는 금속성 섞인 낯 선 기름냄새와 볶은 양파의 냄새. 지붕 덮인 선로를 들어오고 나가는 육중한 기차의 움직임.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서툰 독일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중년의 독일 여자. 그녀의 낡은 긴 부츠와 지푸라기 같이 윤기 없는 짧은 머리카락, 그리고 알코올 중독기미가 보이는 부석거리는 얼굴과 거칠고 붉은 손. 그러나 아주 따뜻한 느낌의 미소. 그녀는 야근을 한 뒤 아버지 장례식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너는 어디서 왔냐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조금 전 도착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오랜 노동과 거친 삶의 흔적이, 그러면서도 당당해 보이던 모습에 적잖이 감동되어 있었고, 아주 좋은 출발이란 느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잖은 행운 속에 공부시작...
 
내가 철학공부를 시작한 프라이부르크시는 아름답고 전원적인 도시 중의 하나다. 독일 환경운동의 진원지로 중요한 환경연구소가 있고, 흑림지대(Schwarzwald) 속의 문화중심지로 음악, 법학, 환경학·신학(가톨릭) 등이 명성을 누리고 있다. 또 프랑스와 스위스에 인접한 국경도시여서 주말을 이용, 여행하기도 좋다.

아무튼 그 시에서 시작한 독일 생활은, 자기암시인지 모르나, 처음 말을 나눈 독일 여성이 빌어준 행운이 적잖이 따라와 주었다는 느낌이다. 번잡한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도, 대학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곳에 값싸고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었던 것. 방의 전 임대자가 쓸만한 가구들을 많이 물려주고 가 시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오로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었다. 첫 일년은 모든 것 제치고 모자라는 독일어만 배우기로 했기 때문에 전공에 대한 압박도 없었다.


첫 일년 '시선의 지평' 열리고...
 
그런데 독일어는 어떻게 배운다? 문법이나 독해력은 혼자서 책을 읽으며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어학과정은 나처럼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언어준비를 하는, 세계 도처에서 온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어, 잘하고 못하는 것이 도토리 키재기 정도였기 때문에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독일의 첫 해에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대학이라는 특수한 영역말고도 독일 어디에서나 흔히 보게 되는 수많은 외국인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일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외국인의 경험이래야 미군과 일본관광객 정도가 거의 전부였던 70년대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독일이 가진 풍요함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의 경험에서 차단되어 있었던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나라와 인종이 있는가, 그것을 한 나라 안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제한적일 지라도 얼마나 시선의 지평을 열어주는가,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느낀 자유로움이나 풍요로움은, 한국을 떠나있다는 단순한 사실과 독일에 대한 문화적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그 첫 일년은 나에게 유년을 제외하고는 가장 빛나던 시간이었다.

오전에만 있던 수업이 끝나면, 책 읽고 산책하고, 친구들 만나 놀고, 주말에는 한국학생들과 한국음식 비슷한 것도 해먹곤 했다. 그리고 야외로 나가 주변의 농가와 포도밭 사이를 달려보려고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다.

일년 생활비 외에 준비된 게 없던 나에게는 상당한 거금이었으므로, 저녁에 대형 슈퍼마켓을 청소하여 보충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 동안 등에 땀이 흐르도록 빠른 동작으로 큰 매장을 청소하고 난 뒤 자전거로 어둠을 타고 집으로 향할 때의 행복감과 외로움.

낯 선 나라의 낯섦은 많은 점에서 나에게 정신의 활력소가 되었다. 낯 선 것이 언어뿐이었던가! 사람의 얼굴, 옷매무새, 몸 동작, 생활습관, 그리고 심지어 집의 모양과 길거리의 구조, 건물의 배치형태 등에서 나에게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전혀 의미로 전환되지 않음을 경험하는 경이로움.


기존관념 괄호에 넣고 공존터득
 
보고 듣는 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어린애가 된 것 같고, 의미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자꾸 헛걸음질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답답함이기도 했으나, 기존의 것들을 일단 괄호 속에 넣고, 모든 것을 다시 질문하는 자세로 대응하게 하는, 어쩌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다.

그 기회를 내가 생산적으로 이용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나에게 삶의 지침을 하나 형성시켰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자신의 입장을 상대적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과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의 주장은 항상 의심해볼 것, 인간과 인간 사이, 세계의 상이한 문화들 사이에는 이해의 한계가 있음을 기억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할 것. 이것은 언뜻 소극적인 자세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모든 면에서 내 것을 버리지 않고도 타인과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닐까?



'자율 교육'의 나라에서 아이 키우기...
 
전공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학과정 중에 알게 된 독일학생과 결혼을 했다. 교사지망생이었던 그가 교사 연수과정을 끝내고 하이델베르크 인접도시의 고등학교로 부임을 하게 되자 우리는 프라이부르크를 떠나는 것이 섭섭했지만,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생활은 그저 학생의 신분이었을 때와는 달리, 가정을 갖고 아이를 기르는 일도 함께 해야하는 분주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교육은 거의 실험에 가까웠다.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그 외의 상급학교를 거쳐가며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사전 지식이나 경험 없이 이곳 교육제도의 장단점을 경험해야 했다.      

만 6세부터 다니기 시작하는 초등학교에서, 특히 1~2학년 때에는 모든 교육과정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국어(독일어)를 대충 읽고 쓰는데 2년이 걸렸다. 우리나라처럼 영아교육이니 뭐니 해서 취학 전 아동에게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외 성적순 없고 논술훈련 중심
 
한국식의 극성 조기교육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이곳은 아이들의 문자교육 시기를 너무 늦추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그 외에도 교사가 아파 결근을 했다며,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숙제도 20~30분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적은 양에 불과했다.

나는 도대체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를 안하고도 되는 것인지를 의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해, 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과 관련, 시험을 보고 성적을 매기기 시작했다.

우리의 교육과 아주 달랐던 것은, 맞춤법도 제대로 다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 글짓기로 국어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수업참가태도를 제외한 시험은 모든 과목에서 논술형으로 진행되었고, 사지선다형의 답안 고르기 형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후 모든 상급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대학입학자격시험도 논술과 구두시험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교육제도와 교육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상이한 한국과 독일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며, 오해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많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가 쉽지 않은 교육의 내용과 효율성의 문제는 제외하고, 몇 가지 일반적인 교육환경의 차이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곳 학생들이 학교수업과 집에서 숙제 등으로 소비하는 시간은 대략 한국의 1/3 정도이다. 방학은 즐겁게 노는 것이며, 방학숙제는 없다. 여기도 과외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낙제의 위기에 처한 소수의 아이들을 위한 비상책이다.

아이들에게 $너 학교에서 몇 등이지?^ 라는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이곳도 가정환경에 따라(예를 들어 부모 교육수준의 높낮이) 학생들의 성적이 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교육의 기회균등이 이루어져 있어, 돈 없어 공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생들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또 학생들은 나이와 함께 제 권리를 알아 주장하게 되므로 아이들의 진로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인 기대나 강요는 거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교사는 절대로 학생들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이것은 간단히 신체손상에 대한 형사소송감이 된다.


약물중독 극우폭력 휩쓸릴까 우려
 
학생들 사이에 학년에 따른 선후배의 관념이 없고, 학교에 따라서는 고학년 학생에게 저학년 학생의 보호 및 상담자의 역할을 맡게 하는 제도를 두기도 한다. 아이들은 일찍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배우며, 따라서 나의 권리와 남의 권리를 인정할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천국이 없듯이 이곳의 문제점도 많이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마약과 알코올 중독문제, 가출청소년들의 문제, 방향감각을 상실한 청소년들 중에 극우조직이나 신나치조직 같은 것에 들어가 외국인 및 장애자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독일 전체 인구의 약 9%에 해당하는 외국인, 그들의 자녀 중에는 독일어가 불충분하고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열의 부족으로 상급학교 진출이 부진하여 노동시장에서의 질적 경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이런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눈을 감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독일은 광범위한 교육개혁의 필요를 인식하고, 그 방향과 방책을 논의하고 있다.


15년째 아이 데리고 한글학교 가며...
 
하이델베르크 한글학교는 이 지역에 사는 한국교민들이 2세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16년 전에 창립을 하였다. 나는 창립의 소식을 듣고, 그 다음 해 다섯 살짜리 큰 아이를 데리고 한글학교를 찾았고, 그 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매 주 토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한글학교에 나가고 있다. 나는 두 아이가 아버지 나라인 독일 외에, 어머니 나라의 한국과 한국문화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며 성장하게 해 주고 싶었다.

이제 20살인 큰 아이는 3년 전에 한글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둘째만 다니고 있으나, 나는 6년 째 한글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어, 소위 근무를 하고 있다. 교장이라고 해서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의 학생수도 지금은 30명 정도의(학생들이 많을 때는 60명까지도 되었었다) 작은 주말학교에 불과하여 교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긴 하지만, 나에게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곳이다.
 


고국선 '영어 공용어' 논란이라는데...
 
그 투자의 결과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한글학교를 통해 자라는 아이들이(나의 아이들도) 한국어를 할 줄 알며, 한국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한글학교는 자발적이며 비영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립교육기관이라고 그 성격을 말할 수 있다. 독일 전역에는 현재 36개의 한글학교가 있고, 그 규모는 학생수가 600명에서 10명까지 천차만별이지만, 한국교포, 유학생 그리고 한독가정이 중심이 되어 자녀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전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한국에서조차 자신의 언어를 홀대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니, 한자교육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이곳 한글학교의 학부모와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문화적 자아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년 전 독일인 두 부부가 각각 딸과 아들을 데리고 한글학교를 찾아 왔었다. 이 두 부부는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서 길렀다며, 한글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게나마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미 열 여섯, 열 일곱의 다 큰 청소년들이었지만, 2년 정도 한글학교를 다녔고,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아보려는 노력도 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큰 도움은 줄 수 없었으나,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덜어 주지는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입양아로 와서 성장한 한국계 독일인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찾아오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학교는 학부모가 내는 소액의 수업료로는 유지가 될 수 없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하이델베르크 시에서 열리는 거리축제나 외국인 축제에 참가하여 한국음식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 행사에는 학부모와 교사가 모두 참가하게 되는데, 하루 종일 서서 음식을 팔다보면 온 몸이 뻣뻣해질 정도로 힘이 든다. 그러나 이것에서 나오는 수익이 적지 않고, 김밥, 잡채, 튀김 그리고 김치 등, 한국음식의 맛보이기 뿐 아니라, 이곳에 한글학교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연중행사의 하나가 되어 있다.
 


'문화적 자아'·'문화적 다리' 고민
 
대체로 외국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각 지역에 사는 한인들과 그 자녀들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유지하는 하나의 길이지만, 한국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세계화란 말을 세계시장의 점령이란 투쟁적 의미가 아니라, 네 것과 내 것을 함께 인정하는 공존으로 이해한다면,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그 거주지 문화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 것을 전파하는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리란 오고 가기 위해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흐름은 가능하지 않다.

나의 희망은 우리의 자녀, 자녀의 자녀들이 세계 곳곳에 살면서도 자신의 한 뿌리인 한국을 잊지 않고, 그들이 몸담고 살고 있는 곳곳에서 반성적이며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우리의 후세들이 세계 다양성의 담보자로서, 상이한 문화의 중개자로서 전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이방인이며 소수민족의 일원인 나
 
나는 현재 하이델베르크시 '외국인 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5년 전부터 의원으로 일해 오다가, 올 6월에 의장직을 맡게 되었다. 외국인 의회는 외국인 거주자들(시 전 주민의 13%)에 의해 직접 선출된 16명의 외국인 의원과 7명의 시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정치적 협의체로서 시의 자문기관이다.

이곳엔 독립된 작은 건물과 자체 예산을 가지고 있고, 의장의 사무를 보좌하는 비서 한 사람이 있다. 의원들은 시의회 의원과 마찬가지로 명예직으로 일하며 약간의 활동비를 받게 된다. 예산의 대부분은 외국인을 위한 정치활동 및 행사에 지출이 된다.

우리 외국인 의회의 과제는 외국인들의 의사소통기구로서, 시민단체 및 외국인단체들과 협력하면서, 시의 행정부와 시의회를 통해 외국인이 받는 부당한 대우나, 외국인 적대 행위 및 정책 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이 자신의 뿌리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공간과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외국인의회 의장하며 차별 실감
 
우리의 기본 입장은, 독일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란 독일의 국체를 존중하면서, 우리가 소수자로서 이 사회의 동등한 일원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의 권익을 침해당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전체 인구의 약 9%나 되는 외국인이 살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이주해온 구 소련 및 동유럽에 살던 독일계 이주민과 그 동안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이주민들까지 합치면 10%가 훨씬 넘는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외국인은 독일 국적이 아닌 외국국적을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데, 이들 중에는 이미 20~30년을 독일에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는 이들이 외국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한 이 사회에 정치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전혀 없다는 데에 있다.

연방의회는 물론, 주의회나 시의회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모두 없다. 그러나 이런 외국인들은 독일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세금을 내며,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인 모든 형태의 보험료를 다 지불하고 있다.

시민(시티즌)이란 말이 애초에 "세금을 내는 자"라는 규정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한다면, 병역의무 외에 모든 면에서 의무를 다 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연방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의 참정권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나, 지금까지 그것이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로 독일에 온 이주민들은 살기에 바빠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별로 없기도 했으나, 독일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언젠가는 돌아갈 잠정적인 체류인 정도로 생각하면서, 독일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융화정책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이주민들의 2~3세가 성장하고 있고, 여러 지역에서 일종의 게토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중 상당수의 이주민 자녀들은 독일어가 짧아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지 못하며, 그 결과로 노동시장에서는 저임금 노동이나 실직자로 밀려난다.

독일에선 4년 전에야 보수적 기독교민주당의 16년 장기집권이 끝났다. 사회민주-녹색당 연합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자신이 이민국임을 인정하고 외국인에 대한 적극적인 이민 정책을 계획하고 있으나, 노동 1세대, 2세대의 문제들은 여전히 누적된 채로 남아 있다.


"신뢰보다 감시가 더 좋은 것"
 
나는 독일에 살면서 비교적 잘 운영이 되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없이는 종이 위에 쓰여져 있는 것에 불과하다. 독일의 격언 중에, "신뢰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감시는 더 좋은 것이다"란 표현이 있다. 감시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운영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관여하고 간섭하는 일이다.

내가 외국인으로 이곳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권리란 스스로 찾고 보존하지 않을 때는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이 비록 작은 지역 사회이지만, 외국인을 대표하는 일이라는 것이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그래서 가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앞으로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란 회의가 일기도 하는데,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스스로에게 주는 기회라고도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다.






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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