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한국여성모임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저는 오늘 이 시기에 대해 여성모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뒤 배경으로 

하여 저의 개인적인 기억들을 중심으로 말을 엮어 보겠습니다. 

저는 1985년에 독일 보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빨리 많

은 거주한국인들을 사귀게 되었고 오자 마자 이미 여기서는 연극 금강공연, 여성

모임의 공장의 불빛 공연 등이 있어 자연스럽게 활동적인 분위기에 같이 휩싸여 

들어갔습니다. 

독일오기 전에 70’년대에 유신독재철폐운동,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면서 동시에 

여성운동이 뒷전으로 밀리는 시기도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기도 했습

니다. 그러다 재독한국여성모임을 만나게 되면서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즐겁기도 

그리고 적극적이기도 하다가 모임 내의 충돌 상황 때에는 고민도 많이 하기도 하

였으나 지금도 회원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이미 1989년에 총무직을 맡게 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당시의 여성모

임의 내적인 상황이 반영된, 즉 여성모임의 내적인 갈등이 아직 뭔지 잘 모르는 

회원의 총무직이 그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는데 좋을 것 같다는 회원들의 판단하

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한 예가 1989년의 민협에의 가입여부 건입니다. 

여성모임 총회에서의 치열한 논쟁을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투표를 하여 아슬 

아슬한 표 차이로 가입이 결정되었으나 그 순간부터 내적인 갈등이 외형으로 확

실히 들어나게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자세한 해석은 여기서 생략: 한국과 독일

에서의 삶의 관계성) 

그러다 1991년 10월 총회에서 민협탈퇴를 결정하게 되면서 갈등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저 개인의견으로는 긍정적인 결정으로 평가합니다. 

민주화, 통일논의에의 참여여부와 아울러 여성문제로서 구체적으로 „제 2차 대전 

중 태평양 권에서 일어난 일본의 종군위안부“ 문제 건이 제시되게 되고 또한 독

일에 거주하는 한국인, 즉 이주민으로서 부닥치는 외국인 적대적인 행위와 그 정

치적 분위기 문제 그리고 2세들의 문화교육, 스스로의 독일어, 문화교육 등의 주

제들이 이 시기의 주된 사안들이었습니다.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회원들 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관심분야를 행동으로 옮기

려 할 때 각 회원들의 의견이 다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뒤 배경 속에서 큰 행사를 한 것을 꼽아보면, 1990년에 „파독한국간호사 

25주년 행사“를 하면서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리고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를 집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2

특히 왜 지금도 „재독한국간호사“라 하지 않고 „파독간호사“라 하는가?에 대해 많

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행사 이후서부터 지금까지의 저 개인적인 문제는 „물론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주류 회원이 직업이 간호사로 여기로 이주하였지만 재독한국여성모임이 동시에 

간호사모임으로? 즉 여성모임회원의 정체성에 대해 회원들 사이에 아직도 의견차

이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들의 이주동기가 어떠하였던지 여기서 여성으로 만

난다고 봅니다. 

스스로의 독일어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독일어연수회를 하면서 기억하는 것은, 특

히 회원들의 자녀들은 한국말도 배우면서 서로 오랫동안 사귈 수 있었던 기회도 

되었다는 것과 재정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예를 들면 빡빡

한 거주공간을 이용하면서 시끌벅적하게 사느라고 서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결과

적으로는 그러한 기회를 우리가 마련했다는 것에 지금도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1993년 베를린에서 „제 2차 대전 중 태평양 권에서 일어난 일본의 종군위안부

“에 관한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부터 열심히 지금까지도 문제해결을 위해 여성모

임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들 스스로 „여성과 전쟁“ 그 피해자들의 

삶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하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대회 때 피

해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하루 종일 그냥 울기만 한 것이 기억납니다. 또한 이 

일을 하면서 한국을 36년간 식민국으로 만들었던 나라의 일본여성들과 지금까지 

같이 일하면서 서로의 만남을 기피하던 감정을 극복하고 같은 여성으로서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한 의미를 던져줍니다. 

90년대 중반에 성년으로 접어드는 자녀들을 초청하여 „두 문화 사이에서의 부모

와 아이들“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면서 서로 다른 사회화 과정을 거친 두 세

대들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토론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도 기억에 남습니다. 

외국인 적대감정이 통독되고 나서 외형적으로 더 크게 될 때 과연 이 나라에서 

살 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질문도 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투쟁데모에 참석도 

하고 공개서한도 열심히 써서 보내고 하던 일도 기억납니다. 

이 시기에 더욱더 공고히 된 것은 이러한 활동을 하다 보니 많은 연대단체들을 

사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혼자 활동하지 않고 같이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 것인가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월민중제와 제 다른 독일단체들의 후원과 연대

는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오월민중제는 재유럽 제 민주한인단체들과의 만남의 

장소 또한 한국이주민으로서 서로 만나는 장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의 또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993년부터 모든 회원들에게 주3

소록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군부독재시절 소위 민주화운동을 하는 

단체의 회원들은 정보부의 사찰을 감수했어야 했기 때문에 회원의 주소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었던 것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여성모임의 구조변경이 현실적으로 요청되었습니다. 조직구조개

편논의가 사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긴 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지역중심의 여

성모임이 아니라 총회를 중심으로 하여 개별회원들의 참여를 높이고 총무단을 강

화하여 사업과 활동을 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랫동안의 조직구조개편작

업논의는 회원들이 모였다 집에 돌아 갈 때는 우울하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습

니다. „침체“라는 표현을 하면서도 계속 활동이 이어져 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

습니다. 

2002년에 조직구조를 개편하면서 2002년 1월에는 회원들의 자선적에세이를 한

국의 시민의 신문에 연재하는 일도 하고 „여성상담전화“를 개설하기도 하였습니

다. 

2003년에는 재독한국여성모임 25년을 기록하는 기념문집과 „여성모임사진첩“을 

만드느라고 엄청난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한 여름에 며칠 동안 같이 앉아 일을 

하면서 몸에 땀띠가 나던 기억도 있습니다. 또한 저의 경우 그 일을 준비할 동안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한국에 갔다 오고 아픈 가슴을 달래다 보니 제가 맡았던 책

임을 시간에 맞추어 못하는 바람에 책임추궁도 당하던 기억도 납니다. 결국에는 

했지만. 또한 49구제 날에 베를린 한 회원집에 모여 일을 하여야 하니까 그 회원

이 거기서 49제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게다가 책을 인쇄

해주는 인쇄소를 잘못 만나 그로 인해 우리끼리 싸우고 하던 기억도 납니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명예가 생기는 일도 아닌데 미

친 듯이 이런 짓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리고 우

리는 그런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여성모임회원들이 탈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는 서로의 의견과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그로 인해 당분간 서로 만나는 것

이 부담스러운 시간도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이제는 비회원으로 참석한 그 당

시의 회원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성모임 30주년을 같이 하게 되는 것에 저희들

이 서로 성장했다고 지금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인간사에서의 자연스

러움이라고 저는 봅니다. 같이 자리하게 된 것이 기쁩니다. 

여성모임이 아직도 비정부조직으로서 그리고 자조직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오후의 좌담회에서 많은 기억들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정숙 

posted by 재독한국여성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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