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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시민의 신문" 에 연재된 에세이

"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 (김정숙)

"내가 왜 독일간호사 식사준비나 하느냐"...

김정숙(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



 
'파독 간호사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접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당시의 눈물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고 기쁨의 눈물도 없지 않았다.

내가 이곳으로 올 작정을 한 것은 먼저 왔던 친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보고 난 뒤였다. 이 편지는 나를 황홀의 경지로 몰았다. 이 친구가 사는 집에는 수영장이 있어 근무가 끝나면 언제나 수영을 할 수가 있고,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테레오 전축도 2개월 일한 월급으로 구입할 수가 있고, 헤르만 헤세의 추종자들인 히피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며, 카라얀의 지휘아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토벤을 들을 수 있고, 시내 중간 중간에 있는 공원잔디에 누워서 괴테의 책을 읽고는 저녁에는 연극 구경을 하는 등 정말 아름답게 행복하게 매일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서온 친구편지에 반해 독일행
 
나는 당장 파독간호사 모집에 응했다. 그리고 70년 10월 커다란 희망을 안고 마치 천국으로 가는 양 들뜬 기분으로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도 별 관심조차 갖지 않은 채 비행기에 올라다.

그러나 비행기가 뜨기 시작하고, 전송 나와 계시는 저 밑 땅위의 어머니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는 순간, 내가 앉은 이 비행기가 떠오른 하늘과 땅의 거리를 문뜩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드디어 이별의 아픔을 깨달았다. 황당하게도 난 그 때부터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후회가 온몸을 저려 왔다. 72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질 때면 그 때의 그 후회스럽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 순간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드디어 비행기는 베를린공항에 도착했다. 울음으로 지친 나는 많은 파독 간호사의 틈에 끼어 날 데려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숙'이라 적힌 내 이름표를 들고 손을 드니, 나이든 독일간호원이 맞는다. 나와 같은 몇몇 다른 간호사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국사람들은 세끼 따뜻한 밥과 음식을 먹는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는지 정성껏 만든 볶음밥으로 우리를 대접했다. 그 순간 세세하고 잔잔한 정을 나누는 독일인들의 마음가짐이 이곳이 낯설기만 한 한 이방인에게 감동을 줬다.

독일 병원에서 내가 처음 해야 했던 일은 환자들의 공동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한 일주일 화장실 청소를 꾹 참으며 하고 나니, 다음 임무는 환자 침대를 닦고 바꾸는 일로 바뀌었다. 그 다음은 휴게실에서 간호사들의 아침상 차리는 일이었다.

어느 날 조용히 간호사들의 아침상을 차리느라 군데군데 쟁반을 식탁 위에 놓던 나는 그만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다. 식탁 위에 놓아야 할 아침식사 쟁반 대여섯개를 병실 중간에 있는 복도로 하나, 둘. 셋, 넷 차례차례 던져버렸다. 쟁반 깨어지는 소리가 와장창 나니 간호사고 환자들이고 모두 방에서 나와 복도를 쳐다봤다. 그 곳에서 나는 "나도 독일간호사와 꼭 같은 인정받은 대학을 나온 정식 간호사인데 왜 내가 독일 간호사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하느냐"고 한국말로 외치고(독일 말로 구사할 수가 없어) 병동을 떠나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난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 더 이상은 이곳 독일 땅에서 간호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귀천 안 가리는 가치관차이 실감
 
얼마 후 수간호원이 기숙사로 날 찾아왔다. 무슨 일이 날 그렇게 화나게 했는지 얘기 좀 하자고 해 마음속 말을 모두 털어놨다. "우리 한국에서는 간호사들이 이런 천한 일들은 하지 않는데, 여기 독일 간호원들은 하지 않는 이런 일을 왜 내가 맡아서 해야하는가? 난 이런 일을 하려고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을 그만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그러자 그 수간호원이 "그럼 내일부터는 주사하고 약을 나누어주는 일을 맡길 테니 이곳에 있어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일의 귀천을 별로 따지지 않고, 영역별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 사람들에게 나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독일에서 처음에 우리가 제 능력에 따른 처우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 그 수간호원과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독일 말로 내 생각도 전달 할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당시의 얘기를 하곤 함께 웃으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얘기하곤 했다.


2년 구애편지 보냈던 남편
 
이 일이 있은 뒤 점차로 지위가 올라 수간호원의 대리를 맡기도 하고, 몇 년이 지난 다음엔 간호원장과 수간호원의 인정을 받아 일년 동안은 월급을 받으면서 병원의 재정보조로 수간호원을 위한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수간호원으로 몇 년 동안 열심히 재미를 느끼며 근무를 했다. 간호사의 직업이 내 성격엔 정말 잘 맞는 것 같다. 대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변을 가능하게 한 뒤의 그 후련한 마음은 환자나 간호사만이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독일에서 우리 한국 간호사들을 보고 천사와 같은 간호사들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지금도 어디서나 간호사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일해온 재독 한국여성간호사들에게 고마움이 가득하다.
 
쟁반시위 지켜봤던 학생 관심...

 
내가 병실에서 쟁반을 깨트리며 자존심을 내세워 시위하던 그 일이 있던 후에, 우리 병실에서 일을 하던 수줍음이 많던 젊은 독일 남자 대학생은 나를 볼 때면 빙긋이 웃으면서 친절히 대해주었다. 아마도 그때 내 심정을 이해하면서 위로를 하고 싶었던가 보다.

그는 우리 병동에서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 그가 일년 후쯤 어디선가 여행길에서 내게 편지와 목걸이를 보내왔다. 이곳 독일에서는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는 Du(너)를 쓰고 이외 사람과는 Sie(당신)를 사용한다.

그런데 몇 번 편지가 온 이후 Sie로 시작했던 존칭이 Du로 변해갔다. 처음의 "존경하는 김간호사님"이 "사랑하는 김간호사님"으로 바뀌더니,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나만 보면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난 그래도 아무 눈치도 없었는데 우리 병동 수간호원이 날 보고 저 대학생이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 한국엘 가지말고 저 대학생과 결혼해서 이곳에서 살면 자기와도 친구로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어떻겠느냐고 졸라댔다.

그런데 고국에 있는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용은, 독일에 있던 한국간호사들이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어려우니 누나는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독일에 있는 간호원들이 고국으로 더 많은 돈을 송금하기 위해 오전 병원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파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헛소문이 어떻게 방영이 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30년을 살면서도 아직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고 나서 나는 독일의 계약기간 3년 근무를 마치고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본심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독일에 있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스위스에 갔다온 것처럼 행동해서 좋은 곳으로 시집가야겠다는 계산이었다.

얼마나 어리석고 주체 없는 나의 모습이었는가. 그래서 이 젊은 독일 대학생의 접촉을 본 척도 않고 취리히에서 2년 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 젊은 대학생은 내게 매일 편지 한 통씩 보냈다. 그렇게 편지를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젊은 독일 대학생의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여성이 누구인가를 들었다며 "만약 내 아들을 좋아해 베를린으로 돌아온다면, 진심으로 환영하며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라고 적고 있었다. 결국 이 독일 대학생과 결혼했다. 작년에는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내 고향 한국에서 6주 동안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얘야 집안일은 나눠 해야 한다"
 
우리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님은 아직 직장 여성이었고, 남녀평등을 직접 실천하신 분이기도 했다. 시어머니 직장이 우리 집에서 머지 않아 자주 들리곤 하셨는데, 시어머님께서 오시는 날엔 꼭 남편이 음식 준비를 해야했다.

시어머님은 아들에게 "얘야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란다"고 하시며 "집안일 경험이 없는 남자가 나중에 혼자되면 생활이 아주 어려워질 수 있으니 부부생활을 할 때 집안 일을 나누어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오시는 날 만이라도 아들에게 집안 일을 시켰다.

한국에서 자란 여성으로서 나는 이럴 때마다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게 불편하기만 했지만, 어려서부터 그런 일에 익숙한 남편은 항상 집안 일을 잘 도와주었다.


직장과 가정 그리고 아이들
 
결혼을 하고 이 사회에 들어가 살아보니 나는 점차 이곳에서 필요한 일반 상식의 부족함을 느낌과 동시에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학업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한국과는 학제가 틀려, 대학입학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야간고등학교를 더 다녀야 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오후 3시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오후 5시부터 10까지는 야간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이때 대학생이었던 남편은 매일 아침 일찍 함께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했고, 저녁은 혼자서 챙겨먹는 생활을 일년 정도 했다.

그럴 즈음, 간호원장과 수간호사로부터 수간호사 과정을 공부할 마음이 있다면 1년 동안 월급을 주며 학비까지 부담할 테니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수간호원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날 이렇게 인정해주는 게 너무도 고마워서 나는 다니던 야간학교에는 휴학계를 내고 이 과정을 이수한 뒤 수간호원이 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즐겁게 일을 했다.
 
두 애 모두 건강해 항상 감사

 
그 사이, 남편도 대학을 졸업하고, 내 직장 일도 안정이 되니 남편은 자꾸 애를 갖고 싶어했다. 나는 좀 더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의견에 따라 아이를 갖기로 작정을 하고 건강한 아이를 갖기 위해 6주 동안 휴양을 떠났다.

휴양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만에 첫아들인 프리드리히를 임신하게 되고, 2년 후에는 딸아이 미란다를 갖게되었다. 아들은 지금 대학에서 IT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고 딸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다행히 두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주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나는 ^우리 집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언제나 정성을 다하여 은혜와 진실을 나누는 아늑한 샘터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려고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과는 달리 쉽지가 않다.

친딸처럼 잘 대해주시겠다던 시어머님께서 아이들이 태어난 후부터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들의 의견에 차이가 생기고 친목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갈등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2년 전 시어머니는 임종하시면서, ^고맙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표현해 주셔서 과거의 의견차이는 어제의 흰눈처럼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시어머님의 명복만을 빌 따름이다.

남편과 나의 차이점이라면, 난 조심성이 없는 대신 남편은 아주 꼼꼼하고 확실하다. 나는 지구력이 모자라지만 능동적이며 즉흥적인 반면, 남편은 일을 섣불리 시작하지 않으나 시작한 것은 계획성 있게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런 차이 때문에 우린 자주 부딪히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를 보충하며 살아왔다. 이런 성격의 차이는 집을 장만하는 문제에서도 드러났다. 나의 계산으로는 월세를 20년 정도 내는 것보다는 주택융자로 내집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경우엔 아주 유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은 꼼꼼히 계산을 하더니, 집을 마련하다 보면 예상도 하지 못한 지불이 많을 텐데 생활이 빠듯한 월급쟁이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다고 했다.

난 몇 번씩이고 계산을 하고 또 하고 상담소 등등을 쫓아 다녔다. 다행히 시아버님께서 ^네가 하는 것을 보니 단단히 잘하는 것 같다. 시의 보조금 외에 은행에서 융자받을 돈은 내가 빌려 줄 테니 집을 마련하도록 해라^ 하시며 나의 편에 서서 큰 힘이 되어 주셨다. 이때의 시아버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날 한없이 감동시켰다.
 
시아버지 사랑에 한없는 감동
 
집을 지을 때 난 내 인생을 위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집 지을 장소를 알아보던 중, 시의 필요에 따라 예외적으로 건축허가를 해 주는 땅이 있음을 알고, 시의 사무실에 연락을 하여 우리 이름을 등록시켰다.

전체 113가구가 이 땅을 함께 사서 집을 짓기로 했는데, 그 중 12명이 건축사업자문위원으로 선출이 되어 매주 1번씩 모여 집 짓는 과정의 모든 것을 함께 토론 결정하였는데 나는 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 12명중 여성은 2명뿐이었다. 외국인에 가정주부인 나 이외에 이들은 모두 대학출신이며 직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어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매주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그전의 모든 결정사항과 오늘의 토론사항을 잘 읽고 연구해 갔다.

그러다 보니 지난 번 결정사항이 기억나지 않으면 모두 나에게 물어보고 내가 얘기하는 것은 틀림없을 거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나는 자신의 중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 작은 성공은 나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광주가 내게 남겨준 정치의식...
 
80년 5월 독일의 텔레비전을 통해 광주에서 한국 경찰이 무작정 몽둥이로 대학생을 때리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는 장면을 보았다. 너무 끔찍했다. 눈을 비비고 보고 또 봐도 이들은 한국사람들이었다. 얼마 후 전화벨이 울리면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텔레비전을 보았느냐"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말했다. 난 그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무슨 일인지, 어째서 경찰이 저렇게 시민을 때리고 차며 구타할 수가 있는지.

우선 몇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의견을 들었고 모두가 하나같이 울분을 터뜨렸다. 빠른 시간 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 자유대학 동양학과에 모여 2, 3일 내에 한독 친선회가 결성되었고, 5월 30일에는 시위를 통해 광주시민을 위한 연대 운동을 벌렸고, 11월 9일에는 "김대중을 구출하자"는 구호 아래 시위를 했고, 그 외에도 한국의 밤을 개최하고,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광주의 충격과 함께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회와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일TV '끔찍한 장면' 보고 공분
 
광주는 나에게 정치의식을 일깨워준 아주 중요한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광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연극, 강연회,
한국문제토론회, 편지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많은 독일사람과 한국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우리 고국의 장래를 염려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정체성과 관련된 예를 하나 들고 싶다. 해마다 개최되는 재독 한인 전국체육대회가 있던 날, 그 해는  당시 서독 수도인 본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광주항쟁의 진상을 전달하며, 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기 위해서 각 도시에서 몰려온 한인들에게 카드와 광주항쟁 보도자료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 남자 한 사람이 뒤에서 내 엉덩이를 차고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이때 옆에 서서 우리와 연대하던 독일 남자 한 사람이 이 한국 남자의 횡포에서 날 구해 주었다. 그는 내가 한국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국남자의 횡포를 막아 준 것이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지만, 그 한국 남자와 나 사이에서 나는 동질성을 찾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피가 다른, 그러나 생각이 같은 이 독일사람과 나의 마음은 정이 흐르며 의식에서 동일함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 이후로 나는 내 개인의 정체성이란 개념에서 핏줄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단정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재독여성모임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으며, 여성모임을 통하여 여러 경험을 하게 되었고,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93년에는 이곳 베를린에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세종학교' 건립에도 참가하였다. 지금은 한글학교의 재정과 운영을 돕기 위한 이사회의 위원장을 맡아 적은 힘이나마 후원을 하고 있다.
 
낮선 한인에게 봉변당하면서 캠페인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곳에 오래 살고 있어도 외국인으로 가끔 나는 소외감을 느끼며, 나와 같이 독일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는 외국인들이 상당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곳 베를린의 여러 구청에 설치되어 있는 외국인 상담자문위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이 자문 위원회는 외국인과 독일인, 외국인과 접촉이 있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외국인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제안을 하는 기구이다. 내가 속해 있는 슈판다우 지역에서 나는 자문위원장으로서 이곳 베를린 외국인문제 해결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혼자 죽고 싶어도 혼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곳은 한국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죽음의 동반자 '호스피츠'라는 직업이 생겼다. 나는 명예직으로 이 일을 하며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기적을 가져다 준 투병생활...
 
87년 우리 아이들이 3살과 5살이었으므로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한국에서 일년쯤 살면서 한국어를 가르쳐 보고 싶은 욕심으로 남편과 아이 둘을 데리고 내한했다.

남편 역시 한국말도 배우고, 아이들하고도 오랜 시간 함께 보내기 위해 3년간의 휴가를 몽땅 모아 3개월 정도 한국에서 지낼 계획을 하고 내한을 했다. 그런데 내한 후 6주만에 갑자기 옆구리에서 어깨로 통증이 와 숨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병원엘 갔더니 기가 막히게도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진단 직후 대학친구를 만나 한국에서 가능한 치료방법을 알아보니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어 곧 독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서양의학으로는 반년정도 살 가망은 있지만 치료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서양의학이 아닌 전인치료 내지 자연치료요법을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방한 중 기막힌 '간암' 선고
 
다행히도 내 주치의인 여자의사인 슈후는 친구와 같은 사이라 아주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이였다. 슈후는 암이란 하루 이틀에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죽음과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갖는 단 하나의 자유이니 입원해서 조용히 내 인생을 생각해보고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4주 동안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충고를 했다.

그래서 애 둘과 남편을 두고 4주 동안 병원에서 지내면서 내 자신의 내면생활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 간암의 치료법은 항암제를 간에 투입하는 법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실험 단계였고 단지 절제수술만이 가능했는데 나의 경우는 간암의 크기가 가로 10cm, 세로 10cm 정도이며 큰 혈관에 암이 붙어 있어 절제 수술도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간장이식수술을 계획하고 이식할 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일본사람 게올게 오샤바가 창안해 낸 마이크로 바이어틱 이란 식이 요법을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 치료를 계속하여 1년쯤 지난 다음 혈액검사를 받았더니 암의 흔적이 없어졌고, 1년 반이 지난 후에는 암의 크기가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1994년부터는 암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나는 그 식이요법을 통해 암이란 죽음의 병에서 치유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지금까지 암과는 무관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생과 사를 거의 동시에 느낄 때, 살아 있음을 순간 순간 느끼는 행복감도 맛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 난 살아 있구나!"라는 사실만으로도 퍽 흡족했고,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중하며, 삶과 죽음의 거리라는 것이 정말 종이 한 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기적 같은 회복은 정신치료의 효력이었다고도 믿을 수밖에 없다.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을 당시, 난 '이 암이라는 병으로 죽어도 되니 자살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택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구나'란 생각을 했고, 역설적으로 그 가능성은 나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었다.

그 전에는 자살이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 보지를 못했었는데, 내 내면 아주 깊은 곳에는 이런 염원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기쁨이 한 편에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식이요법 완쾌, 소중한 인생...
 
내가 죽음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은 병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가져왔고, 동시에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통해 내 생활과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내면의 많은 것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자, 마음이 평온해 지면서 암의 크기도 적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미스톨, 비타민, 효소 등을 섭취하고, 묵상 등을 하는 조화 있는 생활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암이란 병은 오히려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날 동반해주었고, 나에게 자신 있게 삶을 이끌어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이 암이 동기가 되어 자연식품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편의 건강도 훨씬 좋아졌다. 아이들 역시 자연식품섭취 덕택에 지금껏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여러 면에서 암은 나의 소중한 인생의 친구였다.